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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옹아, 서류 먹자, 야옹아

봄날의 산책길에 아이가 늘 외치던 주문

by 둥리지

얽매인 데 없이 발길 가는 대로 걷는 게 산책이라지만, 아이는 계절마다 무언가를 찾고 주우며 발걸음을 옮겼다. 여름에는 톡 하고 터지기 직전의 봉숭아 꼬투리를, 가을에는 가장 예쁜 단풍잎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함박눈이 내리는 겨울에는 나무를 구석구석 살폈다. 나무 깊숙한 곳에 꼭 붙어 있는 매미 허물을 찾기 위함이었다. 매미 허물을 찾는 아이는 숨겨둔 간식이라도 찾듯 허리를 숙여 나무 밑을 유심히 살폈다. 여름날의 태풍과 겨울의 눈보라에도 끄떡 않고 제자리를 지킨 매미 허물을 발견하는 날, 아이는 탄성을 터뜨렸다.


햇빛이 따사로운 봄날에는 늘 고양이를 찾아다녔다.




우리 아파트에는 고양이가 살고 있다. 우리 동 바로 앞 공터에는 누군가 마련해 둔 고양이 집도 있는데, 그곳에서 고양이를 만난 적은 거의 없다. 주로 지하 주차장이나 지하실 창문 틈으로 쏙 들어가는 고양이의 뒤꽁무니를 쫓는 편이었다.


만남의 희소성 때문이었을까, 아이는 고양이를 발견할 때마다 아주 기뻐했다. 추위와 바람을 피해 땅 아래로 숨었던 고양이들이 지상으로 돌아오는 봄에는 고양이를 연신 불러대며 산책을 했다.

“고양아, 고양아, 어디 있니, 나와 봐라.”

정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는지 다정함을 한 스푼 더해 고양이를 재차 불러 낸다.


“야옹아, 야옹아, 서류 먹자, 야옹아.”


아니 잠깐, 서류를 먹는다고? 우유도 아니고, 석류는 더 아닐 테고. 아이와의 대화로 캐낸 서류의 비밀. 고양이 서류는 다름 아닌 고양이 사료였다.


사료라는 단어가 서류라고 들렸구나. 그래서 너의 사전 속 서류는 동음이의어가 되어버렸구나. 그나저나 고작 여섯 살짜리 아이의 사전 속에 단어 '서류'는 어떻게 흘러 들어갔을까. 유치원 선생님들의 대화 속에서 건져 올렸을까, 혹은 남편과 내가 유치원에 제출할 서류 혹은 보험 서류에 대해 이야기 나눈 적이 있었을까. 여섯 살보다는 서른여섯에게 열 배는 잘 어울릴 법할 그 단어를 아이는 빚어낸다. 여리고 말랑한 입술을 동그랗게 모아가며.



아이에게 불시착한 단어, 서류를 타고 시간 여행을 떠나 본다. 때는 3년 전, 목적지는 교무실. 육아휴직 기간 동안 잠깐 떠나온 나의 자리를 떠올려본다. 컬러프린터와 흑백프린터가 동시에 팽팽 돌아가던, 그야말로 토너 마를 날 없던 교무실. 교과 시간에 쓸 학습지와 교실에 게시할 인쇄물, 원서와 생활기록부 그리고 각종 공문에 파묻혀 분투하던 나날. 그야말로 서류와의 전쟁을 벌이던 그곳에 내려앉던 봄날의 햇살과 나른함을 떠올려본다.


이번에는 미래로. 아이가 다 자라 어른이 되었을 때로 날아가 본다. 매일이 신나고 새로운 이 어린이에게도 언젠가는 전공이라는 것이, 직장이라는 곳이, 직함이라는 것이 생길 테다. 고양이 서류 말고 진짜 서류와 씨름하는 날도, 서류 한 장에 담긴 실수에 눈물을 쏙 빼는 날도 분명 있겠지.


그날의 너는 어떤 시선과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까. 너의 서류에는 어떤 세상이 담겨 있을까. 좋아하면서도 잘하는 일을 업으로 삼을 수 있는 행운을 누리고 있을까. 어떤 길을 돌고 돌아 그곳에 도착해 있을까. 여전히 웃을 때 눈이 예쁘고 마음이 따뜻한 어른일까. 그날의 너는 산책할 때 여전히 무언가를 살피며 걷고 있을까, 그렇다면 참 기쁠 것 같은데.



비슷한 시선으로 아이를 관찰하고 또 상상하는, 다정한 노래 한 조각을 함께 소개하며 오늘의 글을 맺는다. 노래 속 아이처럼 입 벌리고 낮잠 자던 어린 시절을 여전히 기억하는 당신에게, 그리고 아이와 함께 순수의 시절을 통과하고 있는 당신에게 이 노래를 선물한다.



가을방학 - 낮잠열차

언제 어디든 잠들 수 있는 사람들이 있지
예를 들면 지금 내 옆에 한 명
만원 열차라 엄마는 서있고 소녀만 앉아서 가네
미안해서 자는 척은 아닌데

아이들은 왜 항상 입을 벌리고 자는 걸까
곱게 입힌 치마 반쯤 뒤로 돌아간 채

언젠가 너는 깨어나 어른이 된 널 보겠지
회사에 출근하는 너, 남자랑 키스하는 너
그런 날이 오기 전에 아직은 좀 더 자 두렴
사탕보다 더 달콤한 젤리보다 더 말랑한 낮잠



계절마다 무언가를 살피고 줍던 너의 산책길을 기억하며. 봄이 한창이니 내일도 같이 고양이를 찾아 헤매자, 너의 주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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