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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꿔요, '브라즐'과 '개나다'에 가는 날

여섯 살이 꿈꾸는, 여기보다 어딘가에

by 둥리지

서툴던 아이의 말이 제법 정확해졌다고 느낀 것은 올해 초였다.


올해로 여섯 살이 된 아이의 말에는 아이 티가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순수와 동심이 뚝뚝 묻어나던 아이의 말을, 나를 울고 웃게 했던 아이의 순간을 글로 남겨야겠다고 결심한 것 또한 그 시점부터였다. 결심이 흐려질세라 냅다 행동으로 옮겨버린 결과물이 다름 아닌 이 브런치북이었고.


그런데 아이의 말을 채집하겠다는 나의 레이더가 너무 강력했을까. 아닌데, 귀를 요만큼 더 열었을 뿐인데, 이상하다. 제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글감으로 승화된다는 걸 눈치채기라도 한 건지, 요즘 들어 아이의 말이 부쩍 정돈된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을 가리킬 때 여전히 1인칭 대신 3인칭으로, 본인 이름을 부른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울 지경이었다.


조바심이 났다. 아이의 천진난만했던 시절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반환점을 돌아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나 싶어 정신이 번뜩 들었다. 예상치 못한 아이의 말에 와하하 웃음을 터뜨리던 날이 점점 줄어들 거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조금 싫었다.


어쩌면 순수한 아이 옆에서 철이 덜 든 엄마로, 어깨가 가벼운 엄마로 조금 더 오래 있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아이는 자라나는 키와 함께 저만의 세상을 넓혀가고 있었다. 한국을 빛낸 위인들의 이름을 하나씩 호명할 때마다, 방문 앞에 주저앉아 세계지도 벽보를 가만 들여볼 때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공간과 숫자 너머의 세계를 이해하고 상상하는 어린이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는 유치원에서 다문화 수업을 받고 온 날 유독 말이 많았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중국에 사니까 중국인이야? 다른 나라 갈 때는 비행기를 꼭 타야 해? 그럼 제주도에는 왜 비행기를 타고 가? 여권이 찢어지면 비행기에 못 타? 미국에 가려면 비행기를 몇 시간 타야 해? 엄마는 미국에 가 봤어? 아빠랑 같이 갔어?”

전생 같던 시절의 기억을 주섬주섬 꺼내 펼친다. 수능 끝난 남동생에게 누나 노릇 하겠다며 호기롭게 둘이 떠난 일본 여행을, 신혼여행지였던 싱가포르와 몰디브에서 보았던 풍경을 떠올린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철학자의 길을 걸어 보던 스물한 살의 나를, 싱가포르 어느 골목 어귀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밤마다 소설책을 읽으며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던 스물다섯의 나를 떠올린다.


말은 노래가 되고 이야기는 자랑이 된다. “여기 정말 멋진 곳이야. 엄마는 여기 혼자서도 여행했어. 그리고 여기는 너무 좋아서 세 번이나 가 본 나라야. 우리나라가 겨울일 때 여긴 여름이거든, 가면 일단 따뜻해서 너무 좋아. 좋겠지, 너도 얼른 가 보고 싶지.”


여섯 살짜리 아이를 앉혀놓고 자랑에 자랑을 더하는 나도 참 우습다 싶을 때쯤, 질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아이가 말한다. “나는 마다가스카르에 갈 거야. 내가 스무 살 되면 할머니랑 싱가포르도 가기로 했고. 이집트에 가서 스핑크스도 볼 거야. 미국도 갈 거야. 엄마 케냐 안 가봤지? 나는 케냐도 갈 거야.”


그러더니 책상 앞에 앉아서는 한동안 사부작거리던 아이 손에 들려온 종이 한 장.

상황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유치원에서 3월에는 브라질을, 4월에는 캐나다를 배운 아이가 저만의 나라 목록을 만들어 내민 것인데. 보시다시피 나라 이름이 좀, 웃기다. 거꾸로 쓴 숫자 3 옆에는 '브라즐', 그리고 그 옆에는 '개나다'. 획 하나 틀린 것치고는 볼 때마다 피식피식 웃게 되는 요상한 나라 이름.


야무지게 내년 2월까지 빼곡하게 적은 이 종이 위에 아이는 매달 새로 알게 된 나라 이름을 새겨 넣을 것이다. 새롭게 배운 나라에 관한 지식을 가족들에게 잔뜩 뽐내다가는 슬며시 물어올 것이다, 엄마도 같이 가고 싶냐고. 그 말에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약속을 하겠지. 꼭 같이 가자고, 엄마도 그 나라가 마침 궁금했던 참이라고.


아이가 훨훨 날아오를 날이 아직 오지 않은 덕분에 이런 호사를 다 누려 본다. 같이 지구 반대편을 날아 보자고, 원래부터 꼭 나와 갈 생각이었다고 다짐하는 아이가 내 앞에 있다. 캐나다에서 인사하는 법과 브라질 문화를 줄줄 읊으며 여기도 저기도 다 가볼 거라는 아이는 좌절을 모른다. 계산을 모르고, 현실을 모른다. 그래서 더 빛이 나는 아이의 꿈.


그리고 아이의 꿈이 담긴 종이 앞에서 잠깐 미소 짓는 나는 여전히 철없는 엄마. ‘브라즐’과 ‘개나다’가 적힌 종이를 들여다 보며 생각한다. 너와 내가 철 없이 지낼 수 있는 날이 아직은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끝나가는 줄 알았는데, 우리 아직 한창이었다고.


초록이 예쁜 계절의 너. 브라즐과 개나다 다음 나라는 무려 마다가스카르. 5월이 끝나는 날, 저 종이에 또 새겨 넣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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