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장녀 인생의 쓸모를 찾은 날
다음 글은 위의 <엄마, 동생이 없어졌으면 좋겠어>의 후속 글입니다.
올 게 왔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아이를 안고 방에 들어가 불을 켜지 않은 채 어둠 속의 대화를 이어 갔다.
동생이 너무 싫다는 말에 어떨 때 동생이 제일 밉냐고 묻는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아이의 말. "지금 제일 싫어." 그리고 잠시 가만 생각하더니 아이는 대뜸 묻는다. "엄마 오늘 무슨 요일이야?" 갑자기 요일을 묻는 아이의 말에 나는 어리둥절하다. 오늘은 목요일인데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아이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한다. "목요일에 싫어요. 지금 싫어요."
아니, 이런 대화에서 피식하면 안 되는데. 어떨 때 제일 싫냐는 말에 목요일에 싫다는 아이. 그러니까 넌 지금 무지 화가 났고 속상하다는 거구나. 그 마음은 네 말대로 '지금 이 순간'에 속한 너의 마음이고.
그렇다면 이제는 내가 답을 해야 할 차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멋진 답을 가만 생각해 본다. 때로는 환부를 벌려 핀셋으로 가시를 빼내야 할 때가 있다. 순간의 따끔함을 참아내야 하는 날이 분명 있다. 하지만 오늘이 그날일까, 아닌 것 같은데. 네 생각보다 너의 상처가 크지 않다고, 거울을 들이밀어 현실을 직시하게 해 주어야 하는 날도 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날이 절대 아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흉터가 내 상처를 위로한다는, 묘한 삶의 기술을 떠올린다. 아이러니하지만 사람 마음이란 그런 거니까. 다정한 위로의 말보다도, 나도 망해본 적 있다는 친구의 말 한마디에 다시 일어설 힘을 얻기도 하니까. 그렇다면 오늘 내놓을 빨간 약은 이거다. "그 마음 엄마 진짜 잘 안다? 왠지 알아? 삼촌 있지, 삼촌. 엄마 동생이잖아. 엄마 어렸을 때 삼촌을 얼마나 싫어했는 줄 알아?"
제 엄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부정적인 감정에 아이는 귀가 쫑긋했는지 이야기를 재촉한다. 대한민국 장녀의 설움이 내 자식의 진통제로 쓰이는 날이 올 줄이야. 이때다 싶어 어릴 적 이야기들을 줄줄 꺼낸다. 사실 엄마가 공부도 훨씬 잘했는데 삼촌은 맨날 착하다고 칭찬받았다고, 그게 그렇게 짜증이 나서 어떤 날은 버스에서 못 본 척하고 일부러 네 삼촌 속상하게 만든 날도 있었다고. 속상하다고 엉엉 우는 삼촌 보면서 쌤통이다 싶어 속으로 웃었다고. 그리고 제일 좋았을 때는 네 할아버지가 삼촌을 막 혼내면서 너 누나 반만 닮아봐라 할 때였다고, 그 말을 들으면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고.
아이의 마음이 조금 풀렸을 즈음에 살살 핸들을 꺾는다. 목적지는 해피 엔딩. "근데 있잖아, 그래도 엄마는 삼촌이 없었으면 좀 심심하긴 했을 거 같아. 싫기도 했는데 귀여울 때도 있긴 했어. 더 커서는 삼촌이랑 둘이 여행도 다녔어. 그래서 엄마는 다시 돌아가도 동생 낳아 달라고 떼를 쓸 것 같기도 해." 너도 그럴 거라는 예언이나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작가의 의도가 빤히 드러난 작품은 독자를 뒷걸음치게 만드는 법이니까.
그 후로 계절이 수 차례 바뀌는 동안 첫째 아이도 둘째 아이도 많이 자랐다. 바운서에 누워 앙앙 울던 둘째는 제 형의 입에 간식을 밀어 넣어주는 두 돌짜리 아이로 거듭났고, 제 동생이 목요일에 싫다던 첫째 아이는 동생을 한 명 더 낳아 달라며 제 엄마 아빠를 졸라 댄다. 손을 맞잡고 동네 산책길을 누비는 두 아이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나는 생각한다.
동생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던 그날 이후로도 첫째 아이의 마음에는 몇 번이고 크고 작은 점이 찍혔을 거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고. 내가 눈치채지 못한 순간에, 다 알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던 상황에 아이의 마음에는 생채기가 났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 점을 흔적도 없이 싹싹 닦아주기보다는 점과 점이 만들어내는 무늬도 제법 멋지다고 말해줄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다고. 너의 마음 위에 그려진 파문이 언젠가는 너의 깊이와 향기가 되어줄 거란 사실을 엄마는 믿는다고. 그리고 그때까지 첫째 인생 경력 한참 선배인 이 엄마가 너의 든든한 편이 되어 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