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 가능성, 두 번째 사랑이 근사한 구석은 바로 여기에 있었어.
두 번째 사랑에는 제법 근사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깨닫고 있어. 첫사랑이 워낙 강렬했던 탓에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이 존재할 거라는 상상은 불가능했거든. 그래서 가끔은 걱정도 했지. 너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내 몸속에 남아 있나, 너를 만나면 사랑이 저절로 생겨나려나, 말라버린 샘물처럼 아무것도 솟아나지 않으면 그때는 어떡하지.
너와 처음으로 눈을 맞추던 날, 내가 소리 내어 엉엉 울었던 걸 너는 모르지. 모든 것이 처음이던 시절, 나의 동력은 넘치는 사랑이 아닌 책임감이었어. 짓눌린 어깨가 무거워서 울고, 뿌듯한 피곤함 속에서 간간이 웃음 짓는 나날이었어. 바깥세상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졌지. 초행길에는 나도 모르게 라디오 볼륨을 줄이듯이, 첫사랑을 만난 후로 내 발걸음은 늘 조심스러웠던 것 같아.
그런데 너는 나를 소리 내어 엉엉 울게 했어. 몇 번이고 곰곰 생각해 봐도 그날의 눈물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어. 다만 분명한 것은, 너와 함께하는 동안은 너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는 거야. 판단하고 걱정하고 대비하는 시선이 아닌, 어쩜 이렇게 예쁘고 귀한 사랑을 품에 안았을까 하며 감격하는 마음으로.
너를 만난 순간부터 한눈에 반했다고는 말 못 하겠어. 첫사랑도 그랬듯 나에게는 시간이 필요했어. 함께 울고 웃는 날이 차곡차곡 쌓일수록 우리는 가까워졌지. 너만의 표정을 발견하고 깊이 교감하고 있다는 확신이 드는 찰나의 순간들이 쌓이면서 사랑은 더 커졌어. 그리고 궁리했어, 내가 너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그저 사랑만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측 가능성, 두 번째 사랑이 근사한 구석은 바로 여기에 있었어. 처음이라 의미도 모른 채 얼렁뚱땅 지나온 시간 속에서는 온전히 누릴 수 없었던 순간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뒤집어보고 판단하느라 빛나는 조각인 줄 몰랐던 부분을 이제는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었거든. 다가올 날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었어. 다그치는 대신 한 번 더 끌어안겠다고 다짐하는 것도 그래서 가능했어. 한 번 걸어본 길은 나에게 그래도 된다는 믿음을 줬거든.
해 봤던 사랑을 다시 시작하면서 기대했던 몇몇 순간이 있었어. 기다리던 것 중 하나는 '너의 첫 문장'이었지. 네 형아가 세 살이었을 때, 물을 ‘무’라고 하고 멍멍이를 ‘워워’라고 불렀던 건 아직도 생생한데, 처음으로 내뱉은 문장은 도무지 기억이 안 나는 거야. 어쩌면 기억해야겠다는 의식이 나에게 없었기 때문일지도 몰라.
그래서 너의 첫 문장은 절대 놓치지 않겠다며 벼르고 있던 나였어. 보물을 손에 쥔 사람은 관심도 없는데 찾아 헤매는 사람만 진심인, 조금 요상한 보물 찾기는 그렇게 시작되었어. 그리고 어느 봄날, 너는 식탁 앞에서 또렷하게 외쳤지.
또 죠!
네 작은 입술과 여린 혀가 빚어낸 첫 문장은 '또 죠!' 번역하면 '또 줘!' 였어. 며칠새 용케 만들어낸 변형 버전으로는 ‘빼 죠(=빼 줘)’가 있었고. 빈 그릇을 가리키며 어어 하며 소리내거나, 간식을 다 비운 그릇을 앞에 두고 으앙 울어버리던 네가 ‘또 죠’를 처음 내뱉던 날 나는 푸핫 웃어버렸어. 그리고 생각했지. 입술을 동그랗게 말고 ‘또 죠’를 외치는 네 앞에서 나는 몇 번이고 지겠구나. 블루베리고 요거트고 이제 나는 족족 털리겠구나. 저 귀여운 주문을 이겨낼 방법이 한동안은 없겠구나.
그리고 참 아이다운 너의 말을 한동안 곱씹으며 생각했어. 모든 사랑은 이 문장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또 줘’로 시작해서 ‘안아줘, 재워줘, 먹여줘’로 변주되는 아이들의 주문 속에서 내가 닳아간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 속에서 내가 채워지고 있었다는 깨달음. 따뜻한 밥을 지어 먹이고, 아이 배를 도닥이며 재우는 시간 속에서 누군가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이 되어 보는 경험. 사람의 온기와 말랑한 느낌이 나에게도 위로가 되더라는, 뜻밖의 발견.
더 달라고 떼를 써도 내내 갈증 나던 마음이,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면서 비로소 채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 그렇게 두 번의 사랑을 만나 차차 익숙해지고 스며드는 동안 내 손에는 두 보물이 남았네. 하나는 모든 게 처음이라 너무나도 소중하고 기특한 사랑. 또 하나는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또 새롭게 예뻐 버리는, 그런 강력한 사랑.
시간이 흐르고 언젠가 네가 왜 형아만 예뻐하냐며 입술을 삐죽 내미는 날이 오면, 엄마가 꼭 말해 줄게. 사실 형의 첫 문장은 놓쳐 버렸는데, 네 첫 문장은 엄마가 꼭꼭 간직하고 있다고. 이렇게나 두 번째 사랑이 근사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