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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이토록 사랑스러운

나쁜 기억은 한 줄짜리 기억으로, 좋았던 날은 한 장의 사진처럼.

by 둥리지


늦었다고, 배 안 고프다고, 아침 먹으면 소화 안 된다고. 엄마가 정성스럽게 차려준 아침상을 홱 밀쳐놓고 기세등등하게 집 나섰을 너희가, 교실에서는 매 순간 납작한 마음을 끌어안고 저마다의 싸움을 하고 있다는 걸 어른들은 알까. 선생님과 친구들 사이에서 제법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친구들이 웃을 때 함께 웃기 위해, 이상과 현실의 차이에서 오는 슬픔에 지지 않기 위해 매 순간 애쓰고 있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을까.


뜻대로 되지 않는 친구들과의 관계, 잘해보려고 할수록 좁아지는 입지. 보통의 교우관계를 꿈꾸는 게 이리도 어려운 일이었는지. 하지만 보통의 존재들도 속 아프기는 매한가지다. 장점도 단점도 없는 것이 꼭 무색무취의 인간이 된 것 같아 스스로를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날들. 보통의 나날을 꿈꾸는 아이들과, 보통의 존재로 사는 것이 미치도록 지겨워 몸부림치는 아이들이 모인 이곳은 중학교.


상실의 경험 속에서 크고 작은 상처를 받은 아이들은 이름도 성도 없는 가상의 공간으로, 언제든 관계를 잘라내고 뒤돌아설 수 있는 곳으로 도망치기도 하지만. 선생님이 이름을 조금이라도 틀리게 부른 날, 그게 그렇게 큰일이라고 귀부터 얼굴까지 새빨개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정하게 부른 이름, 학습지에 적어준 고작 한 줄짜리 응원에 씨익 웃어버리는 이유는 또 무엇이고.




지필고사를 보는 날, 복도를 순회하며 창문으로 살짝 너희를 훔쳐볼 때 드는 기분은 매번 새롭다. 성적에 관계없이 한없이 진지해진 아이들의 표정을 내다보고 있을 때는 조금 슬프기까지 하다. 아, 공부를 못하고 싶은 사람은 없구나, 하는 마음에. 그리고 마음속으로 응원한다. 이거 수업 시간에 다 다루었던 건데, 괜히 꼬아서 생각하다가 헷갈리지 말고 출제 의도대로 쉽게 쉽게 정답의 길을 걸어주기를. 노력하니까 되더라, 성실하게 복습하면 되는 거더라 하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스스로를 믿고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마음의 맷집이 나날이 늘어나기를. 무언가를 붙들고 포기하지 않았던 그 경험을 바탕으로,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 한 번 더, 하고 매달릴 수 있는 어른이 되기를. 몰입의 기쁨과 목표를 이루었을 때의 성취감은, 손끝을 까딱거려 얻을 수 있는 순간의 도파민보다 훨씬 더 값지고 충만하다는 것을 몸소 깨닫기를.



그렇다고 경주마처럼 목표를 향해 달리기만 하는 모습만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첫눈 오는 날, 벚꽃이 만개한 날,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 크리스마스 이브와 같은 날이면 일렁이는 마음이 넘쳐흐르던 교실을 기억한다. 기분 좋은 들뜸, 에라 모르겠다 하고 져주고만 싶은 설렘의 기운이 교실에 가득한 날. 특히 봄바람이 살랑이는 날이나, 여전히 햇살은 뜨겁지만 가을바람이 한 가닥씩 느껴지기 시작하는 날 창문을 열고 수업할 수 있는 계절을 나는 유독 좋아했다. 창틈 새로 들어오는 운동장의 체육 수업 소리와 교실에 떨어지는 빛 한 줄기, 그리고 일지를 쓰느라 골몰하고 있는 너희들의 뒷모습이 화음처럼 어우러지던 3교시. 그 장면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어서 교실 뒤에 서서 너희를 한참 바라보기도 했지.


아이들의 날카로운 말과 이기적인 행동에 상처받는 날도 분명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머릿속에 남는 장면은 온통 이런 것들이다. 어쩌면 우리가 학교에서, 그리고 삶 속에서 남겨야 할 것은 이런 깨달음일지도 모른다. 나쁜 날은 한 줄짜리 기억으로 남지만, 좋았던 날은 한 장의 사진처럼 남는다는 것.


생색내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다섯 살의 일지를 보며 놀라는 순간. 그러다 이내 고마워지고 또 응원하게 되는 순간. 이렇게 사랑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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