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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덜 사랑하면 덜 아플 줄 알았지

그 안에 속해야 누릴 수 있는 행복

by 둥리지

내가 울고 웃는 순간에는 늘 아이들이 있었다.


신규 교사로 발령을 받아 열네 살 아이들의 담임이 되고 열다섯 살 아이들과 수업을 했다. 열 살도 차이 나지 않는 아이들 앞에 선생이라고 섰지만, 젊고 뜨거운 심장이 모인 곳에서는 별 게 다 별일이라 웃을 일도 울 일도 참 많았다. 기특해서 울고, 안타까워서 울고, 아이들이 일지에 적어낸 문장이 예뻐서 울고, 싸늘해진 시선에 놀라서 울었다.


경계를 두어야 한다는 의식도 없이 다 내주려고 애썼으나, 이곳은 쑥쑥 자라나는 아이들이 모인 학교. 멀리 가야 하는 존재들은 뒤를 돌아볼 틈이 없다. 어른들의 사랑과 관심을 허겁지겁 집어삼키고도 갈증이 나니 더 사랑해 달라고, 늘 친절하게 대해달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아이들 앞에서 햇병아리 선생은 말할 수 없었다. 야, 많이 줬잖아. 나는 누가 사랑해 줘.


이래서 선배 교사들이 힘을 좀 빼는 게 좋다고 하는 거였구나,라고 깨달을 때쯤에는 내 안의 많은 부분이 소진됐을 때였다. 앞에 서서 수업을 해야 하는 사람이 웃기 싫어지면 그때는 어떡하나. 하루에 다섯 번, 교실 앞문을 열면서 억지웃음을 장착하고 교실로 들어서는 게 너무 괴로우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렇다고 여기를 떠날 마음은 없는데, 누가 마법을 부려 이 상태를 벗어나게만 해 주면 참 좋겠는데.


출근길에 좋아하는 카페에 들러 아이스커피도 사 가고,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반에 들어가기 전에는 손목에 향수도 뿌려 봤다. 주말에는 여행을 떠나고 출근을 앞둔 일요일 밤에는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며 내일을 지웠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효과는 없었다. 그리고 사실은 알고 있었다. 정면승부가 답이라는 것을. 잘하고 싶은 일을 잘 해내야 행복해진다는 것을. 그것을 에둘러 가는 길에 만나는 모든 것들은 그저 거들뿐이라는 것을.




수능 공부를 하던 고등학교 3학년 때 인터넷 강의에서 만난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더랬다. 공부 안 하고 노는 시간에 진정으로 행복하다면 공부를 그만둬도 된다고. 그런데 너희가 원하는 행복이 그곳에 있는 게 아니라면, 못다 한 오늘의 숙제가 자꾸 신경 쓰이고 이게 아닌데 싶다면, 실은 공부를 잘하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뜻대로 잘 안 되어서 속상한 거라면, 공부를 최고로 열심히 해 버려서 그 행복을 가지라고.


공부를 잘하고 싶으면 다른 거 말고 공부를 많이, 정말 많이 해서 행복해지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얻어맞은 뒤통수가 얼얼한 열여덟의 여고생은 그날 마음에 새겨 넣었다. 그 안에 속해야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있다고.


불행의 요소를 소거한다고 해서 곧장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불행하지 않음'은 행복의 동의어가 될 수 없다. 행복하려면 행복의 요소 안에 있어야 한다.


십 년 전의 교훈을 마주해야 할 때였다. 다시 아이들과 눈을 맞추어야 한다. 다시 만나야 한다. 아이들이 꼭꼭 눌러쓴 멋진 문장을 교실에서 내 목소리로 읽어줄 때 느껴지던 전율을, 봄바람이 살랑 들어오는 교실에서 아이들과 좋은 글을 함께 읽을 때 일렁이던 마음을, 제 나름의 고민으로 움츠러든 어깨와 사연 많은 뒤통수를 교실 뒤편에서 관찰할 때 찌릿해지던 심장을.


무탈한 학급과 안전한 수업 속에 숨어있으려던 마음을, 퇴근 후로는 학교 일에 내 시간을 쓰지 않겠다던 나의 선언을 고쳐 쓸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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