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하나인데 별명은 여러 개
달걀과 양파가 똑 떨어진 걸 알아차리고는 급하게 새벽배송 장바구니를 채운다. 식재료를 냉장고에 차곡차곡 넣으며 아이들 저녁 메뉴를 구상하다 보니 아차, 남편이 아침마다 마시는 오렌지주스를 함께 주문한다는 걸 깜빡했다. 아이들한테 밀려 뒷전이라며 보란 듯이 입을 삐죽 내미는 그 얼굴이 눈앞에 선하다. 미안해서 어쩌지. 그나저나 주말에는 부모님과 함께 식사하기로 했으니, 후식으로 먹을 과일을 좀 사러 가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 동네에 새로 생긴 과일 가게 사장님이 참 친절하시던데, 내일 과일을 사러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냉장고 앞에 선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다니. 우리는 관계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발견하는 존재가 맞긴 맞나 보다. 누군가의 엄마이자 딸이며, 누이이자 아내인 우리의 하루를 떠올려보자. 어제와 오늘이 지겹도록 똑같은 모양 같지만, 실은 그 속에 다양한 사람들과 시공간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나날의 빛깔과 질감을 만들어내고 있다.
학교라는 작은 사회 안에서 교사가 수행하는 역할 또한 다르지 않다. 모두가 ‘선생님’이라는 동일한 호칭으로 나를 부르지만,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고 요구하는 바는 매 순간 다르다. ‘이름은 하나인데 별명은 여러 개’라는 어느 동요의 가사처럼, 교사는 여러 개의 자리를 동시에 차지하고는 각각의 일을 수행한다.
교사는 매년 세 개의 자아를 부여받는다. 새 학기 첫 출근날, 교감 선생님께서는 전체 교사가 모인 곳에서 업무 분장 결과를 발표하시는데, 이 자리에서 교사들은 일 년 동안 책임질 학급과 업무를 확인하게 된다. 가장 먼저 담임을 맡은 학년과 반을 확인하는 순간, 제1의 자아가 결정된다. 국어과, 수학과와 같이 해가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는 유일한 영역인 나의 과목은 제2의 자아가 된다. 마지막으로, 올해 어떤 업무를 맡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제3의 자아까지.
담임, 교과, 업무라는 세 개의 자아로 완성되는 교사. 어느 한 영역이 눈에 띄게 삐걱거리기 시작하면 전부가 흔들릴 수 있으니 늘 균형을 맞추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 삶의 작동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2학기 시작일에 맞춰 복직하는 나는 올해 2학년 어느 학급의 담임교사이자, 일주일에 열여덟 시간 교과 수업을 책임져야 하고, 동시에 안전생활부의 계원이 될 예정이다. 중간에 복직하는 상황 탓에 스스로 익히고 가야 할 부분이 많아 머리가 복잡해질 때는 내 손에 놓인 세 개의 구슬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 중 나를 가장 어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 가장 자신 없는 부분은 제3의 자아, 업무다. 오랜 시간 인문사회부에 소속되어 학교에서 열리는 문예 대회를 담당하거나, 연구부에 소속되어 각종 지필 평가나 평가 계획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해 왔는데 올해는 안전생활부, 그러니까 우리 머릿속에 ‘학생부’로 익숙한 그곳이 바로 내가 속한 부서가 되겠다. 마지막으로 공문을 올려본 게 몇 년 전이더라, 신규 교사도 아니고 다른 지역에서 전입 온 것도 아닌 나에게 친절한 가르침을 줄 귀인이 교무실에 있을까, 아니 그보다도 내가 스스로 업무를 익혀야 할 것 같은데 문서함은 왜 열리지 않는 건지.
든 자리가 너무 요란하면 민폐일 것 같아 복직 전에 업무를 좀 익혀두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문서함을 열어볼 수 있는 권한을 요청하고, 인수인계받은 파일을 하나씩 열어 확인한다. 해야 할 일을 하나씩 처리해 내면서도 동시에 생각한다, 이건 내 코어가 아니야.
제3의 자아, 그러니까 교사에게 할당된 업무는 교사의 ‘코어’가 될 수 없다고 나는 믿는다. 교사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들이 다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업무를 대충 처리해 오류가 나도 괜찮다는 뜻은 더욱 아니다. 각 부서에 속한 교사들이 제 업무에 충실하게 임하는 것은 마땅히 인정받을 일이다. 하지만 효율적인 업무 처리 능력이 교사의 행복한 학교생활을 결정하는 요소냐고 묻는다면, 나는 한참을 망설일 것 같다.
교사용 화장실에 숨어서 몰래 울어야 했던 날,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 교무실에 들어가야 하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던 날 나는 업무 때문에 울지 않았다. 반대로, 온 아이들이 다 예뻐 보이는 날, 내가 이러려고 교사 됐지 싶은 날, 그만큼의 보람과 기쁨을 업무로부터 얻은 적은 없었다. 퇴근 후 동료 교사들과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도, 출근을 앞둔 일요일 밤에 잠 못 이루며 끙끙 앓던 날에도 업무는 저 멀리 밀려나 있었다.
내가 울고 웃는 순간에는, 늘 아이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