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커피와 에그타르트, 주파수 89.1, 드라이브와 쇼핑
얕은 잠, 뜨거워지는 손발, 높아지는 심박수.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을 때마다 내 몸은 신호를 보낸다. 새 학기 첫날을 앞두고 있을 때가 그렇고, 중요한 시험이나 발표를 앞두고 있는 날도 그랬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두려워하는 성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결전의 날을 앞두고 있을 때 내 몸은 늘 조금 더 빨라지고, 조금 더 뜨거워졌다.
마치 합격자 발표 하루 전날처럼, 잠을 자는 내내 귀가 열려 있는 듯했다. 더위가 한풀 꺾였다는데 손발은 또 왜 이렇게 뜨거운 건지. 요동치는 몸과 마음을 다루는 법을 여전히 모르지만, 나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알아채고도 그래 나 늘 이랬지, 하고 당황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숨을 한번 고를 수 있다.
그리고 재빨리 오늘의 하루를 계획할 수 있다. 나에게 주어진 평일 낮의 귀한 시간, 마지막 하루를 어떻게 쓸 것인가. 첫 번째 후보: 아침에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하고 땀을 쭉 뺀 뒤 맛있는 점심을 먹고 집에 와서 고요한 집에서 책을 읽는다. 아, 아무래도 혼자 생각할 시간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책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 같아 바로 탈락. 다음은 두 번째 후보: 아예 각 잡고 출근 준비를 더 바짝 한다, 그럼 출근해서 덜 버벅거릴 테니까! 아, 첫 번째 후보보다 더 빠른 속도로 탈락. 내일 할 일을 오늘 왜 또 해야 하는가.
그럼 오늘은 집중하지 않고도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일,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일로 하루를 채워보자. 생각보다는 기분을, 걸어갈 길보다는 내 발이 가는 곳으로 향하는 하루를 만들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첫 번째. 동네에 있는 할리스에 간다.
사실 나는 프랜차이즈 카페 중에서는 스타벅스 아메리카노를 가장 좋아한다. 산미 있는 커피를 좋아하면서도 스타벅스의 아메리카노, 그중에서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다른 곳과 다른 독특한 매력이 있다. 특히 여름날에 마시는 스타벅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더 맛있는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냥 매년 여름 호들갑을 떨며 사 마실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리스를 가는 이유. 할리스는 '블랙아리아'라는 이름이 붙은 메뉴가 몇 개 있는데 (몇백 원을 추가하면 고를 수 있는 윗 라인의 원두를 사용한 제품들인 것 같다. 예를 들어 블랙아리아 아메리카노, 블랙아리아 카페라테... 식의 메뉴가 있다.) 그 라인이 산미도 있고 제법 커피 맛이 좋다. 게다가 우리 동네 매장은 평일 9시부터 테이크아웃을 할 경우 한 잔에 2000원씩 할인을 해 준다. 그렇게 할인을 받으면 맛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단돈 3200원! 어차피 운전을 하면서 커피를 마실 생각이니 오늘은 할리스다.
그리고 두 번째, 동네 빵집으로 간다. 10시에 오픈하지만, 그전부터 사람들이 미리 줄 서있기로 유명한 빵집. 오늘은 비 오는 평일이라 그런지 빵집 앞이 한산하다. 평소라면 뱃살을 걱정하느라 눈길을 안 두었을 빵집이지만, 내일이 복직이니까. 오늘은 먹고 싶은 거 다 먹기로 한다. 갓 구운 에그타르트에, 올리브 치아바타까지 하나 얹어서 계산한다. 아이스커피에 빵까지 두둑하게 사고 나니 드라이브할 맛이 절로 난다.
세 번째, 시동을 걸고 라디오를 켠다. 아침 시간에 내가 즐겨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은 <이현우의 음악앨범>이다. 아이를 키우며 적막한 집이 싫어 처음 듣기 시작한 라디오였는데, 이제는 아이들의 취향대로 음악을 틀어드려야 하는 시기가 되면서 집 대신 차에서 라디오를 듣게 되었다.
나의 라디오 취향을 간단히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아침 7시에는 이재후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시작해 9시에는 이현우의 음악앨범, 점심에는 이은지의 가요광장을 찾아간다. 그 이후에는 안영미와 이상순의 프로그램을 듣다가 해가 지는 시간에는 <세상의 모든 음악>을 듣는 하루의 루틴. 물론 모든 프로그램을 챙겨 듣진 못하지만, 그 시간대에 라디오를 틀 수만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주파수를 맞춘다. 늘 그곳에 있는 그들의 목소리와 멋진 노래를 만나기 위해.
이렇게 완성된 삼박자, 커피와 빵 그리고 라디오. 아주 완벽한 드라이브의 조건.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 나는 목적지를 설정한다, 오늘의 목적지는 우리 집에서 편도 한 시간이 걸리는 아울렛이다. 비가 오지만 오히려 좋다, 사람이 없을 테니. 우리 집에서 가까운 아울렛에는 없는 폴로와 룰루레몬이 입점해 있다는 그 아울렛으로 나는 떠난다. 주말에는 사람이 많아 가기 힘들 테고, 아이들과 함께하는 쇼핑은 상상만으로도 지치는 일이니 비 오는 수요일에는 여기가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드니 신이 난다.
한 시간을 달려 도착한 아울렛. 한적한 매장 사이를 누비면서 내 취향을 찾아 뽈뽈 헤맨다.
입었던 옷을 한 번 더 입어보기, 이 색이 나을까 저 색이 나을까 오랫동안 고민하기, 여름 쿨톤에 어울리는 색깔과 재질을 도저히 고를 수가 없어 챗지피티에게 물어보기, 웨이팅이 있는 매장에 한없이 줄 서서 입장을 기다리기- 아이들과 쇼핑 왔을 때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이 일들을 마음껏 즐겨본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그래 역시 생각을 비우고 싶을 때는 쇼핑이지.
마음에 드는 셔츠를 하나 사고, 꼭 사고 싶어서 벼르고 있던 운동복도 하나 사고, 가을에 입을 청바지도 하나 사고 나니 마음이 뿌듯하다 못해 두둑하다. 두시 반, 이제는 시동을 걸어야 늦지 않게 아이를 하원할 수 있을 것 같아 발걸음을 돌리면서도 피식 웃음이 나온다.
오늘 하루, 그리고 지난 휴직 기간 동안 제법 재미나게 시간을 보냈다는 만족감. 이 정도면 됐다, 딱 좋았다 하는 마음. 아쉬움이라고는 한 톨도 없는, 깨끗한 만족감. 이 마음들을 꼭꼭 눌러 담은 채 여전히 뜨거운 손발과 들뜬 기분으로 핸들을 잡는다. 덜 먹은 올리브 치아바타를 입에 물고, 조금 남은 커피도 요란하게 빨아올리며 서둘러 유치원으로 향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외친다, 나 내일 다시 학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