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가격의 원리
100억 가진 사람과 10억 가진 사람, 누가 더 많을까
한국에는 총 2,100만 가구가 살고 있는데, 자산은 평균 4.5억 정도 라고 한다. 상위 20%를 차지하는 자산 5분위의 중앙값이 10억 내외이니, 한국에 10억 정도 가진 사람은 400만 명 정도 되는 셈이다. 하지만, 100억 이상을 가진 사람은 7,0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100억짜리 상품은 7,000명에게만 팔 수 있지만, 10억짜리 상품은 400만 명에게 팔 수 있고, 2억짜리 상품이라면 전체 가구의 60%인 1,200만 명이 살 수 있다. 100억짜리 상품이 잘 팔리지 않는다면, 2억짜리 상품 50개로 쪼개 1,200만 명에게 팔면 된다는 뜻이다.
고가의 부동산은 누가 사는 걸까
기본적으로 고가의 상품인 부동산에도 해당되는 얘기다. 지나가며 눈에 띌 수 있는 10층 이상인 고층건물이 전국에 12만 동 정도 있는데, 이런 부동산을 직접 살 수 있는 개인은 1만 명도 되지 않는다. 저런 부동산은 과연 누가 가지고 있는 걸까, 호기심에 등기부를 열람해보면 개인이 아닌 기업이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모든 고층건물을 기업이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국에 매출액 100억이 넘는 기업은 5만 개에도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기업의 자산이라고 해서 가계 전체의 자산보다 결코 크지 않기 때문이다.
부동산 쪼개팔기의 시작
개별 가구는 작지만 집단으로는 가장 큰 손인 가계, 이들을 고가의 부동산 시장에 입장시키려면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다. 2억 가진 사람 50명을 모으거나, 100억짜리 부동산을 2억짜리 50개로 나누면 된다. 하지만, 보증과 동업은 하지 않는 게 국룰이니, 부동산을 나누는 편이 속편하겠다. 일단 층별로 쪼개고, 그걸로 부족하면 같은 층 내에서도 호별로 쪼갠다. 얼마 되지도 않았다. 1984년 「집합건물의 소유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고, 같은 해 「부동산 등기법」이 개정되면서부터다.
<응답하라 1988>의 덕선이네가 정환이네 단독주택에 세들어 살았던 것처럼, 서울사람 10명 중 6명은 주인집에 세들어 살았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살 수 있는 집이 없었다. 서울 인구는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해 90년대에 1,000만을 돌파했는데, 4인 가구 기준으로 250만 채의 집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집합건물법 시행 이전인 1980년만 해도 서울의 주택은 100만 채에도 미치지 못했다. 짓던지 나누던지 더 많은 집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드라마틱하게도 1984년을 정점으로 당시 70만 채, 전체 주택의 70% 정도를 차지하던 단독주택은 점점 줄어들기 시작해, 90년대 들어서며 집합건물인 아파트에 역전당하고 만다. 이제는 쪼갠 주택이 대세로, 1위인 아파트가 150만 채로 전체 주택의 60%이고, 2위인 다세대주택이 45만 채로 전체 주택의 20% 수준이다.
쇼핑몰도 오피스도 호텔도 쪼개 파는 시대
집만 쪼개 팔라는 법은 없다. 아파트, 다세대주택으로 시작된 집합건물은 오피스텔을 거쳐 대형 쇼핑몰, 오피스, 호텔까지 진화했다. 업무시설인 오피스를 쪼개어 파는 '지식산업센터'는 1989년 인천주안공장을 시작으로, 구로, 금천, 성동, 영등포 등 서울 준공업지역과 수도권 공업지역 중심으로 확산되었는데, 현재 분양형 지식산업센터는 전국에 600동이 있고 25,000여 기업이 사용하고 있다. 숙박시설인 호텔을 쪼개어 파는 '분양형 호텔'도 2007년 동탄 라마다호텔, 해운대 씨클라우드호텔을 시작으로 전국 관광지역으로 확산되었고,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전국에 150동 정도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문제가 생기지 않으면 문제가 아니다
사고 팔 때는 문제가 없었다. 시행사에게는 성공적인 분양이었고, 수분양자들에게는 성공적인 소액투자였다.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한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격언이 있듯이, 하나의 건물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한 마음 한 뜻으로 관리하기가 좀 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총 4장, 66개 조항으로 구성된 집합건물법의 조항이 대부분 공용부분, 관리단, 분쟁조정, 재건축에 관한 규정들인 것도 그 때문이다. 더구나 사용주체가 고정된 주택이나 업무시설과 달리, 외부에서 많은 사람이 유입되어야 하는 쇼핑몰이나 호텔은 필연적으로 로비, 복도, 엘리베이터, 계단, 주차장과 같은 공용부분의 면적이 절반 이상을 차지할 수 밖에 없는데, 이 중요한 부분이 소유자 공동의 의사결정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일까. 아파트나 지식산업센터가 문제되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다만, 시시각각 변하는 소비자들의 취향과 유행을 좇아야 하는 쇼핑몰과 경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호텔에서는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2006년 신촌민자역사 위에 완공되어 분양한 '밀리오레'는 상권과 역세권의 특성을 잘못 짚어 15년째 멈춰 있고, 분양형 호텔 역시 2015년과 2016년 연이어 발생한 전염병(메르스)과 국제정세의 변화(사드 배치) 그리고 2020년 전세계를 걸어잠근 팬데믹(코로나)으로 인해 100여 곳 이상이 소송에 휘말렸다. 팔고 떠난 자들은 책임지지 않았고, 다수의 소액투자자들이 한데 모여 대응하는 것도 요원해보였다.
진짜 문제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부동산 쪼개팔기가 합법화 된 1984년 이후는 가히 '공급의 시대'라고 부를만 하다. 연간 200만 호를 쏟아낸 공동주택의 비중은 어느새 80%에 육박한다. 공급의 시대에서 30년이 지난 현재, 그 시절의 공급물량은 이제 재건축 예정 물량이 되었다. 2000년부터 본격적으로 공급되기 시작한 지식산업센터는 10년 뒤인 2030년, 분양형 호텔은 20년 뒤면 재건축 예정 물량이 된다. 가장 사업성이 좋으며 소유자의 관심과 의지도 강한 아파트 재건축도 최소 10년이 걸린다. 지식산업센터, 쇼핑몰, 호텔의 소유자들은 변화에 잘 대응할 수 있을까. 어쩌면 부동산 쪼개팔기의 잔혹사는 이제부터인지도 모른다. <끝>
※ 참고문헌
1. 「인구총조사」 (통계청, 2020년)
2. 「가계금융복지조사」 (통계청, 2020년)
3. 「건축물통계」 (국토교통부, 2020년)
4. 「기업생멸행정통계」 (통계청, 2019년)
5. 「국민대차대조표」 (통계청 한국은행, 2020년)
6. 「주택총조사」 (국토교통부, 2020년)
7. 「전국 지식산업센터 현황」 (한국산업단지공단, 2021년)
8. "상권몰락과 함께 텅텅 빈 신촌 민자역사" (매일일보, 2016년)
9. "분양형 호텔의 문제점 해결방안 토론회" (한국호텔전문경영인협회,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