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가격의 원리
시장, marketplace와 market의 차이
시장은 자본주의의 꽃이다. 오죽하면 '시장'경제라고 할까. 시장은 "여러가지 상품을 사고파는 장소(marketplace)"로 정의된다. 전통시장이나 편의점이 먼저 떠오른다. 꼭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만 시장에 가는 것은 아니다. 그저 구경하기 위해 가기도 한다. 시장에는 다양한 상품이 진열되어 있고, 상품은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잊고 있었던 필요를 끌어내기도 한다. 와 새로운 밀키트가 나왔네, 아 맞다 집에 식용유가 떨어졌다는 식이다.
시장에는 상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도 있다. 시장의 사람은 둘로 나뉜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편의점과 전통시장의 차이점이 그렇다. 전통시장에는 사고파는 사람 모두 여럿이지만, 편의점에는 사는 사람만 여럿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전통시장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또 어떤 사람들은 편의점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즐거움 만큼이나 편안함이 중요해 질 때, 시장에는 상품만 남는다. 상품만 남은 시장은 구체적인 장소(place)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집 근처 편의점이든, 도심 어딘가의 창고이든, 김포나 안성의 물류센터이든, 상품의 장소성은 탈각된다. 사고파는 추상적 행위만 남는다. 마켓(market)이라는 본질만 남는다. 그걸 플랫폼이라고 부르는 것 같기도 하다.
애초에 진열할 수 없는 상품이 있다
부동산이 그렇다. 아파트를, 땅을 진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워낙 고가라서 일시불로 사는 경우도 드물지만, 대금을 치뤘다고 해서 쇼핑백에 담아갈 수도 없는 상품이다. 애초에 장소가 없는 시장, 부동산학에서는 그걸 '추상적 시장'이라고 한다. 한 번이라도 부동산을 사고팔아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분명히 큰 돈이 오고가는 거래를 하고나서, 서류 몇 장을 들고 나올 때의 그 이상한 기분.
부동산학 첫 시간에 그걸 배운다. 부동산과 동산의 차이를 아느냐고. 동산, 내 휴대폰이 내 것인지는 내 손이 쥐고 있어서 알 수 있다. 하지만, 부동산은 그렇지 않다. 등기부를 통해 알 수 있다. 고정성, 부동성이 있어 분실할 수 없는 상품이지만, 쥐고 있다고 내 것이 아니다. 도난이나 분실은 불가능하지만, 그보다 더 위험한 상품이기도 하다.
그 시장에 가고 싶은 이유
망원시장 좋더라, 홈플러스 보다 이마트가 낫지, 당근마켓에서 샀는데 완전 좋아. 우리가 늘상 하는 말인데, 시장이 잘 된다는 의미는 뭘까.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내가 원하는 상품이 많으면 좋고, 파는 사람 입장에서는 사는 사람이 많으면 좋다. 결과적으로 거래가 많아야 좋은 시장이다.
그런 점에서 부동산 시장은 좋은 시장이 되기 어렵다. 기본적으로 상품이 한 곳에 진열되어 있지 않다. 발품이 되었든 임장이 되었든, 마치 시골 오일장처럼 상품을 고르기 위한 비용 자체가 크다. 애써 상품을 골랐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고가에, 정가도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구매절차까지 복잡하다. 거래가 많이 이루어 질 수 없는 구조이다.
주식 거래와 단적으로 대조된다. 모든 상품이 한 곳에 진열되어 있고, 상품의 가격이 저렴하며, 시세가 명확하고, 거래수수료까지 없다. 약 1,000억 개의 상품(상장주식수)으로 연간 6,000억 번의 거래가 이뤄지는 주식과 달리(회전율 600%), 부동산은 7,000만 개의 상품이 350만 번(회전율 5%) 거래될 뿐이다. 실로 엄청난 차이다. 주식시장이 시끌벅적한 망원시장이라면, 부동산 시장은 입장 대기자만 많은 명품숍이거나 파리 날리는 시골 점방 수준인 셈이다.
부동산도 싸고 쉽게 팔아야 손님이 온다
부동산 시장을 활성화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상품의 가격을 낮추고, 고르기 쉽게 하며, 가격은 정확하고, 구매절차를 쉽게 하면 된다. 할인이 아닌 한, 상품을 가격을 낮추려면 부동산을 잘게 나누는 방법 밖에 없다.
가장 고전적인 방법은 임대차이다. 부동산 소유권 중 사용권만 분리해 파는 것이다. 매매시장에서는 1984년부터 허용된 집합건물이 있다. 물리적으로 하나인 건물을 권리만 분할해 판매한다. 아파트, 연립, 다세대 같은 주택 상품부터 상업(구분상가), 업무(지식산업센터), 숙박(분양형 호텔)까지 다양하게 시도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부동산 시장의 진입장벽은 높기만 하다.
더 획기적인 방법이 있다. 부동산의 권리를 주당 몇 만 원 수준의 주식 단위로 나누는 방법이다. 2001년 「부동산투자회사법」을 통해 도입된 이 제도를 "부동산투자회사(리츠, REITs, Real Estate Investment Trusts)"라고 한다. 임차권과 달리 사용, 수익, 처분의 모든 권한이 있는 소유권에 해당하지만, 집합건물과 달리 내 소유권의 물리적 범위를 특정할 수 없다는 차이점이 있다. 결정적인 차이점은 가격과 구매절차에 있다. 성공적인 리츠의 대명사로 알려진 '신한알파리츠'는 판교의 오피스빌딩의 소유권을 주식의 형태로 판매했는데, 가격은 5,000원이었고 구매절차는 일반 주식과 동일했다. 경쟁률은 4.3:1로 유명 브랜드 아파트의 청약 경쟁률 못지 않았고, 이듬해 주식가격 역시 10,000원 가까이 치솟으면서 시세 차익을 과시했다.
커피 한 잔 값으로 부동산에 투자하는 방법
리츠 투자를 홍보했던 유명한 카피다. 리츠는 분명 명품숍 또는 시골 점방에 가까웠던 부동산 시장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부동산 시장 앞에서 머뭇거리지도 줄을 서지도 않을 뿐더러, 부동산 시장에 관심이 없던 옆 동네(주식 시장) 사람들까지 불러모았다.
하지만 아직 석연치 않은 부분도 남아 있다. 주식 투자수익의 본질이 기업활동에 있듯이, 부동산 투자수익의 본질 역시 부동산활동에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년간 흥행했던 집합건물의 투자자들이 경기변동과 재건축 앞에서 균열을 보였듯이, 리츠 투자자들 역시 어느 시점에서 간접투자자 고유의 페인포인트를 나타낼 수 있지 않을까. 시장이 커졌다고 모두가 웃는 것은 아니니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