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영화에는 부동산이 있다
영국은 18세기 산업혁명을 주도한 나라이자 제조업의 종주국이었죠. 가내 수공업이 공장식 기계공업으로 바뀌려면 우선 기계가 있어야 하고 사람 대신 기계를 돌릴 동력이 필요한데, 영국이 방직기와 증기기관을 발명하면서 면직물 생산량이 10배 이상 늘어나게 됩니다. 대규모 공장이 생기고 이 공장에서 일할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공업 중심의 도시가 발달하게 됩니다. 이때 영국의 면직물 생산을 대표했던 공업도시가 바로 축구로 잘 알려진 맨체스터(Manchester)입니다. 당시 세계에서 9번째로 인구가 많을 정도로 번성했고 '면의 도시'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증기기관이 보급으로 석탄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기계 산업에 원료를 조달할 배후도시들이 성장하게 됩니다. 맨체스터와 가까우면서 석탄 매장량이 풍부한 인근 도시들이 성장하게 됩니다. 셰필드(Sheffield), 뉴캐슬(Newcastle), 더럼(Durham) 같은 도시들이죠. 마치 경상북도 대구, 구미와 강원도 태백, 정선의 관계라고 할까요. 영화의 배경이 되는 지역은 석탄도시 더럼으로 수십만 명이 탄광업에 종사했던 세계 최대 석탄 생산지 중 하나였습니다.
광업은 노동집약적인 산업입니다. 탄광을 중심으로 주거시설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광부들이 회사에서 마련한 연립주택에서 단체로 생활하면서 콜리어리(Colliery)라는 하나의 마을이 만들어집니다. 같은 회사에서 같은 일을 하고 심지어 퇴근해도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인데 자연스럽게 공동체 의식이 생길 수 밖에 없겠죠. 탄광업의 특성상 광부들의 목소리도 높았기 때문에, 지역의 문화나 정서도 노동자 중심, 남성 중심이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석탄의 시대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19세기 말 발견된 석유는 석탄과 달리 액체라서 운반하거나 저장하기 쉽고 에너지 효율도 높았습니다. 그리고 50년도 지나지 않아 빠르게 석탄을 대체해나가죠. 석탄산업이 불황에 빠지자 영국 정부는 경쟁력을 잃은 탄광을 폐쇄하거나 민간에 매각하려고 했고 광부들은 파업 투쟁으로 맞섰습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84년 영국 광부 파업입니다.
주인공 빌리(배우: 제이미 벨)는 광부였던 아버지의 권유로 권투를 시작했지만 사실 권투보다 발레를 더 좋아합니다. 그리고 발레 오디션을 위해 콜리어리를 떠나 새로운 도시 런던에 가고 싶어하죠. 발레 유학을 하려면 상당한 돈이 필요하지만 정작 빌리의 아버지는 광부 파업 중입니다. 아버지는 탄광에서 평생을 함께 해 온 동료들과 이제 더이상 탄광에서 일할 수 없는 아들 빌리 사이에서 고뇌에 빠지고, 결국 아들 빌리의 미래를 선택한 아버지는 동료들과의 파업 대열을 떠나 탄광으로 복귀하게 됩니다.
산업은 도시를 만들기도 하지만 쇠락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석탄에서 석유로 석유에서 가스로 산업은 자본주의 경쟁을 통해 끊임없이 발전하고 진화하는데, 도시는 그만큼 유연하지 못합니다. 그나마 사람은 이직하거나 이사라도 할 수 있지만,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도시는 온기를 잃은 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누군가는 떠나지만 누군가는 떠날 수 없는 것이죠. 쇠락하는 석탄산업과 함께 더럼 콜리어리에 남은 아버지가 아들 빌리를 새로운 도시 런던으로 유학을 보내는 것처럼요.
산업 발전에 따른 도시의 흥망성쇠는 영국만의 문제가 아닌 모든 자본주의 국가가 겪는 문제입니다. 한국도 1980년대까지 370여 개였던 석탄 탄광이 2024년 장성광업소(태백), 도계광업소(삼척)를 마지막으로 모두 폐광했습니다. 폐광 이후 지역 경제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공적자금도 투입되었지만 인구는 절반 이하로 감소했습니다. 광업 외에 제조업으로 성장한 창원(기계), 포항(철강), 구미(전자), 군산(자동차) 같은 도시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1980년대 영국이 독일, 일본, 한국 등에 제조업 경쟁력을 빼앗긴 것처럼, 2020년대 한국도 중국 등에 경쟁력을 잃고 있으니까요.
해외에서도 제조업 중심 도시들의 흥망성쇠를 단기간에 극복한 사례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산업의 쇠퇴가 장기적으로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처럼 새로운 산업이 형성되려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죠. 섬유산업의 글로벌 메카였던 맨체스터 역시 1970년대 도시 쇠락 이후 스포츠 문화산업 도시로 재탄생하는데 30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으니까요. 앞으로 30년 뒤, 한국의 중심 도시는 어디일까요?
<빌리 엘리어트> | Billy Elliot
스티븐 달드리 감독, 2001
1984년 영국 광부 파업 시기, 탄광 마을에 사는 소년 빌리(제이미 벨)는 아버지의 권유로 권투를 배우다 우연히 발레 수업에 참여합니다. 발레에 흥미를 느낀 빌리는 사회적 편견과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꿈을 키워갑니다.
아버지는 결국 빌리의 꿈을 인정하고 런던 로열 발레 스쿨 오디션을 지원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빌리는 계급과 지역의 한계를 넘어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을까요?
"사내 아이들은 축구, 권투, 레슬링을 하지, 빌어먹을 발레는 안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