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정하고 속이면 어쩔 수 없다 | 도쿄사기꾼들

모든 영화에는 부동산이 있다

by 오성범

일본에 지멘샤(地面師)라는 부동산 사기꾼이 있습니다. 일본의 주식가격과 부동산가격이 급등하던 1980년대에 주로 활동했습니다. 이들은 주로 연로하여 가족을 잃거나 가족이 없는 부동산 소유자를 노렸습니다. 가족이 없으니 위조할 신분은 하나뿐이고, 그 신분을 확인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분증과 함께 대략의 바이오그래피만 맞춘다면 충분히 부동산 소유자로 행세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실제 소유자 대신 부동산을 매각하고 매매대금을 편취합니다.


매수자는 매매대금을 지불한 후 등기국에 부동산 등기 이전을 신청하지만 거절당하고 맙니다. 한국은 등기를 신청할 때 신청서류의 형식적 측면만 심사하지만(형식적 심사주의), 일본은 신청서류의 진위까지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등기가 이전되지 않으면 매수자는 토지를 취득할 수 없고, 이미 지불한 매매대금도 돌려받을 방법이 없습니다. 사기죄 형사소송이나 손해배상 민사소송을 할 수는 있겠지만 이미 범인들은 달아나버렸으니까요.


한국에서도 부동산 계약을 할 때 상대방의 신분증과 인감증명서를 활용합니다. 하지만 신분증과 인감증명서가 진짜인지 확인하는 경우는 드물죠. 부동산 등기부등본은 소유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발급할 수 있으니 위조해도 소용이 없지만, 신분증과 인감증명서는 본인만 발급할 수 있으니 우리가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습니다. 부동산 계약을 알선한 공인중개사가 신분을 확인한다고 하지만, 이 역시 간접적인 수단일 뿐 직접적으로 또는 공식적으로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권한은 없고요.


최근에는 중개보수를 아끼기 위해 중개거래 대신 직거래를 하는 분들도 많이 늘어났습니다. 직거래는 아파트 시장이 호황이던 2022년까지만 해도 전체 주택거래의 약 20%를 차지할 정도로 많았고, 지금도 10%를 웃도는 상황입니다. 직거래는 누구의 조력도 없이 계약 상대방의 신분을 직접 확인해야 하는 만큼 좀 더 위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작정하고 속이면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중개거래라고 해서 반드시 안전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죠.


작정하고 속이면 어쩔 수 없다

17_도쿄사기꾼들.png
17_도쿄사기꾼들(2).jpg


1990년대 일본경제가 장기 디플레이션에 빠지며 지멘샤의 사기도 잠시 잠잠해졌지만, 2021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다시 부동산가격이 오르자 다시 나타납니다. 2017년, 이번에는 개인이 아닌 대기업이 지멘샤 사기에 의해 약 55억엔(550억)의 피해를 입게 됩니다. 대상 부지는 도쿄 한복판인 시나가와구의 600평이 넘는 부지였습니다. 세키스이 하우스(積水ハウス, Sekisui House Ltd.)는 임직원만 3만명이 넘는 상장 회사인데다, 다른 업종도 아닌 부동산 개발회사였다는 점에서 충격이 컸습니다.


이렇게 소유자를 사칭한 부동산 사기를 막으려면, 계약 상대방이 문서 형태로 제시한 신분증과 인감증명서를 다시 한번 검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일본과 달리 한국은 '모바일 신분증', '정부24'와 같은 전자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는 만큼, 사전에 준비해 온 문서 대신 계약 당사자가 모두 입회한 공개된 장소에서 전자시스템으로 신분을 확인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계약 당사자가 직접 확인하기 어렵다면 제3자에 의한 인증절차를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 보증보험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임차인이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기 위해 전세보증보험을 활용하는 것처럼, 일본에서는 보험회사가 계약 당사자의 신원을 확인하고 이에 대한 보증을 제공하는 것이죠. 이 외에 에스크로(escrow)를 활용하는 것도 좋습니다. 등기 이전이 끝날 때까지 거래대금을 제3자가 보관하는 제도입니다. 지멘샤의 사기는 대부분 등기 이전 과정에서 발각되기 때문에, 에스크로를 활용했다면 예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보증보험이든 에스크로든 하나의 서비스이기 때문에 비용이 발생합니다. 국가가 부동산 거래의 안전을 보장하거나 보호해주지 못하면, 민간 서비스의 영역이 됩니다. 일종의 '신뢰비용'이 발생하는 거죠. 한국은 형식적 심사주의를 채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등기제도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 보증보험이나 에스크로가 잘 발달하지 못했지만, 미국은 국가가 등기에 대한 어떤 보증도 제공하지 않는 형식적 기록주의이기 때문에 보증보험과 에스크로가 잘 발달되어 있습니다. 결국 국가가 하느냐 민간이 하느냐의 문제죠.


한국도 전세사기가 사회문제로 떠오르면서 임차인을 보호하기 위한 보증보험 제도가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다만 보증보험이 활성화 된 미국과 차이가 있다면, 보험을 제공하는 주체가 주택도시보증공사(HUG), SGI서울보증과 같은 공공기관이라는 점입니다. 민간 보험사의 참여가 더딘 이유는 가입자가 내는 보험료 대비 보험사가 부담해야 할 보험금이 더 크기 때문일 것이고요. 공공기관이 손해를 감수하면서 보험을 제공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도쿄 사기꾼들> | 地面師たち

오네 히토시 감독, 2019


부동산 사기꾼인 해리슨(토요카와 에츠시)은 중개사, 법무사, 배우, 위조전문가로 구성된 팀을 만든다. 이들은 관리가 허술한 토지를 찾은 뒤, 치밀한 작전을 세워 소유자 행세를 하며 소유자 대신 토지를 매각하는 부동산 사기에 성공한다.

여러 번의 성공으로 일당은 점점 대담해지고, 이번에는 도심 한복판의 100억엔 규모의 대형 사찰부지를 대기업 세키요하우스에 팔기위해 작전을 짜는데..


"야생동물은 영역에 대한 인식은 있을지 몰라도 땅에 대한 소유욕은 없죠. 땅은 본래 누구의 것도 아닌데 인간이 토지 소유라는 개념을 만들고 전쟁과 살육을 이어 온 겁니다. 인류의 역사는 토지 쟁탈의 역사입니다."



keyword
오성범 경제 분야 크리에이터 소속 감정평가사 프로필
팔로워 187
이전 19화인플레이션 vs 디플레이션 | 종이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