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영화에는 부동산이 있다
'잃어버린 20년'이라고 들어보셨나요? 1986년부터 1989년까지 단 3년 동안 급격하게 폭등했던 일본의 주식과 부동산가격이 1990~2010년까지 20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하락해 1986년 이전 수준으로 돌아간 현상을 말합니다. 당시 주식가격(닛케이지수)은 세 배, 부동산가격은 네 배가 올랐을 정도라고 합니다. '도쿄를 팔면 미국 전체를 살 수 있다.'는 얘기가 나왔고, 실제 일본의 한 부동산 회사가 미국 뉴욕의 록펠러 센터 빌딩을 매입해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생각지도 않았던 일확천금을 얻었는데, 금세 모든 돈이 사라지고 원래대로 돌아온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사실 따지고보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것이지만 사람 마음이 그렇지 않겠죠. 연봉 7,000만원을 받다가 1,000만원이 삭감되어 6,000만원을 받는 사람은 불행하지만, 연봉 4,000만원을 받다가 1,000만운이 올라 5,000만원을 받는 사람은 행복한 법이니까요.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부동산가격이 급등할 때는 돈은 가치가 낮습니다. 돈을 빌리기도 쉽고, 벌기도 쉽고, 쓰기도 쉽습니다. 투자만 하면 가격이 오르고 돈을 버니까요. 그러다 부동산가격이 급락하면 반대 현상이 나타납니다. 우선 돈의 가치가 올라갑니다. 돈을 빌리기도 어렵고, 벌기도 어렵고, 쓸 돈이 없습니다. 투자만 하면 가격이 떨어지고 돈을 잃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데도 쓰지 않고 돈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 최선입니다. 한때 서로 대출을 하려고 경쟁하던 은행도 이제 예금을 유치하려고 애씁니다. 은행의 여신(대출)창구 대신 수신(예금)창구가 바빠집니다.
주인공 리카(배우: 미야자와 리에)는 은행 수신창구에서 정기예금 상품을 판매하는 직원입니다. 마치 명품숍의 판매직원처럼, 비싸고 귀한 돈을 다루지만 리카의 돈은 아닙니다. 월급을 모아 조금씩 투자하고 자산을 늘려가며 노후를 대비하는 보통의 상식이 깨지는 시기에, 리카의 손에 들려있는 고객의 돈은 너무나 크고 멀게 느껴졌을 겁니다.
인플레이션 vs 디플레이션
빈부격차는 인플레이션 시기보다 디플레이션 시기에 더 크게 발생합니다. 인플레이션 시기에는 주식이나 부동산 같은 자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격차가, 디플레이션 시기에는 현금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격차가 벌어집니다. 각자의 조건에 따라 격차가 커질 수 있다는 점은 같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적어도 인플레이션 시기에는 돈을 빌려서라도 자산을 가질 수 있지만, 디플레이션 시기에는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영화에서 리카는 결국 고객의 예금을 훔치고 맙니다. 혼자라면 참아낼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던 고타(배우: 이케마스 소스케)를 만나면서 무력감이 증폭되고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집에 현금을 쌓아둔 노인, 직장을 잃은 회사원, 등록금을 못낸 대학생, 은행에 쌓인 예금을 횡령해 연하의 연인과 고급 호텔과 고가 명품으로 탕진해버리는 모습은 당시 일본경제의 단면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인플레이션도 디플레이션도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영화의 배경인 디플레이션 시기(1990~2010년)의 일본 닛케이지수는 10,000~15,000 내외였지만, 그 이후 지속적으로 회복되어 현재는 1980년대 버블경제 수준을 넘어서 45,000까지 상승했습니다. 디플레이션을 상징했던 마이너스 물가도 플러스로 회복되었고, 물가를 뒷받침하는 소비 여력인 임금 상승률도 물가 상승률보다 높아졌습니다.
한국은 일본처럼 20년 가까이 지속되는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디플레이션을 경험한 적은 없지만, 2012~2022년까지 약 10년간 부동산 중심의 인플레이션을 겪었습니다. 이 시기동안 수도권 아파트가격이 약 2배 오르며 '영끌', '빚투' 같은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경제는 언제나 오름(인플레이션)과 내림(디플레이션)이 있기 마련이지만 어느 하나 길어서 좋을 것은 없습니다. 디플레이션이라면 더욱 그렇고요.
<종이달> | 紙の月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 2015
1990년대 일본, 은행 수신창구의 계약직 사원 리카(미야자와 리에)는 예금상품 판매실적의 압박을 받습니다. 어느 날 고객에게 받은 예금을 가지고 회사로 복귀하던 리카는 백화점에서 들러 화장품을 사는데, 지갑에 현금이 부족하자 고객 예금으로 잠시 충당한다. 은행에 돌아오자마자 다시 채워놓았지만 그녀의 일상에 작은 균열이 생긴다.
리카는 우연히 알게 된 대학생 코타(이케마스 소스케)가 학비 때문에 휴학을 해야 한다는 사정을 듣고 이를 돕기 위해 또 한번 고객 예금에 손을 댄다. 그 이후 코타와 연인이 된 리카는 점점 대담해지는데…
"당신이 갈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