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번 절 앞, 아시즈리미사끼(足摺岬) 등대
16. 17일째(38번 절) – 이번 순례의 마지막 절, 곤고후쿠지
1월 29일(금)
어제 통렬한 전쟁을 치른 덕분인지 오늘 출발이 상쾌하다. 비록 비가 내리는 아침이지만 오늘 갈 길이 26키로라 한결 마음이 홀가분하다. 짐도 숙소에 놓고 다녀올거고, 게다가 오늘이 순례의 마지막 걷는 길이기에 더욱 그런 것같다. 역 앞에서 8시 20분발 버스, 첫 차를 타기 전, 역내 창구에 들러 내일 떠날 기차표를 예매하고 곧바로 버스에 오른다.
어제의 그 공포스러운 버스정류장 오가와도오리까지 가서 내린 뒤, 걷기를 시작.
비를 맞으며 걷는 것은 이번 순례길에서 처음이다.
그동안 날씨가 잘 받쳐줘서 순례길이 행복했는데, 이번 빗길도 나름대로 좋은 느낌을 받으며 걷는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우산을 쓰고 걸어도 바지가랑이가 젖기 시작하더니 신발이 축축해지고 곁들여 몸도 무거워진다. 오오자키(大岐)해안이 아름답게 펼쳐진 입구에 작은 찻집. 정보센터도 운영하고 있는 듯해서 들어가보니 두 할머니가 운영하고 있는데, 분위기가 따스하다.
창가에 앉아 비내리는 모래사장을 보면서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면 좋을 듯해서 물어보니, 내가 마시기엔 가격이 비싼 편이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을 무릎쓰고 오차를 부탁했더니 흔쾌히 차 한 잔을 내려 주시네. 한 모금 들이키니 온 몸이 따스해짐을 느낀다. 저 아래로 내려가 짚다리를 건너 모래사장이 있는 송림 사이로 걸어갔으면 했더니 할머니께서 오늘은 바람도 불고 비도 오고 해서 만류하신다. 얼굴이 참 곱다고 말씀드렸더니 예쁘게 웃기만 하시고, 고개를 돌리신다. 잠깐이지만 잘 쉬었다 갑니다.
점심 무렵 빗방울이 점점 더 굵어지고 작은 항구엔 빈 배만이 물살에 일렁인다. 이부리(以布利) 항.
항구 바로 안쪽에 자리한 돈가스 음식점. 소담하니 끌려 들어간다.
정식을 시켜 먹는데, 먹으면서 느낀 게,
'아, 정식을 시켜야 밥을 제대로 먹게 되는구나.'
단무지가 나온 것이다. 밑반찬도 몇 가지 더 나오고. 음식점에서 이런 것을 먹기가 참 어려웠는데. 국맛이 좋아 한 국 더 부탁하니, 역시 후한 인심을 베푼다. 아울러 한 시간 전부터 오른쪽 발 위부터 한 뼘 가량 부근이 아팠는데, 약국을 못 찾겠다고 하면서 붙이는 파스가 없는지 여쭸더니 딱 하나 남아 있는 것을 주신다. 붙이고 나니 한결 나은 듯하다.
원래, 지체장애 6급(왼쪽 고관절 부위 수술) 판정을 받은 게 2002년 8월. 교통사고로 입은 상처 후유증이 있는데, 그래서 의도적으로 왼발을 보호하기 위해 오른쪽 발을 많이 쓴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된 듯하다. 게다가 엊그제 사가온센 부근에서의 10키로, 어제도 10여 키로 뜀박질로 피로가 누적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후 오른쪽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절뚝이며 걷는데 200여 미터의 언덕배기가 왜 이렇게 힘든지. 쇼산지를 오를 때보다 몸이 천근 만근이다. 숲길엔 빗물이 내를 이루어 질퍽이고, 방금 까마귀가 먹다 버린 귤 껍질 안엔 빗물이 고여 흐르고, 노래가 절로 나온다.
옛날에 이 길은 꽃가마 타고 말탄 님
따라서 시집가던 길 여기던가 저기던가
복사꽃 곱게 피어있던 길
한세상 다하여 돌아가는 길
저무는 하늘가에 노을이 섧구나. (아씨, 이미자)
왜, 갑자기 이 노래가 생각나서 부르게 되었는지는 알수는 없지만 저절로 흥얼거리게 된다. 아마도 너무 힘이 들어서겠지. 시집살이 서럽다 서럽다 해도 이보다 더한 것이 있겠는가? 코보대사님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힘든 데를 데려왔는가 무슨 까닭으로, 순례길 전부를 돈 것도 아닌데, 이 순간 이번 순례길을 마무리하면서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순간이다. 절로 눈물이 핑 도는게 가슴 한 켠이 뭉클해진다. 또 하나의 노래가 슬며시 입밖으로 흘러나온다.
푸른 물결 춤추고
갈매기 떼 넘나들던 곳
내고향집 오막살이가
황혼 빛에 물들 간다
어머님은 된장국 끓여
밥상위에 올려놓고
고기 잡는 아버지를 밤새워 기다리신다
그리워라 그리워라
푸른물결 춤추는 그곳
아--저 멀리서 어머님이 나를 부른다. (어부의 노래)
그래, 어머니가 그리웠던 게로구나. 이제 돌아가신지 3개월. 힘들게만 사시다가 병석에서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신 어머니. 어머니의 된장국이 그리웠던 게야. 아무도 듣는 이 없는 여기서 나는 목이 쉬도록 마음껏 울어 제낀다. 한바탕 서럽게 울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진다. 뭔가 억눌렸던 짐을 내려놓은 것같다. 뭔가 가지런해지는 느낌이 든다.
드디어 이번 여정의 마지막 코스 아시즈리미사끼와 38번 절 곤고후쿠지.
곤고후쿠지의 못이 고요하다. 작은 빗방울이 만드는 동선이 퍼져나가며 다른 동선과 어우러져 춤춘다.
아시즈리미사끼 앞의 거친 파도도 잠잠해지는 듯하다.
이번 순례길은 아쉽게도 여기까지다. 주어진 시간이 여의치 못해 다음을 기약해본다. 납경장에 묵서를 써 주시는 분께 즈에를 맡아주실 수 있는지 여쭤 보니 흔쾌히 받아주신다. 다리를 절며 걸어가는 모습이 안타까웠던지 버스정류장까지 배웅해 주시고 버스기사분께,
"시미즈(淸水) 의료원이 6시에 문을 닫는데, 바로 그 앞에서 세워주세요."
부탁까지 해주신다. 그리고는 버스가 떠날 때까지 지켜봐 주시는데 너무도 감사하다.
3월 18일, 희야시스 님이 6번째 결원을 마치시고 귀국보고하는 내용에서, 이 분을 만나뵈었다고 한다.
내 안부를 걱정했다는 말씀과, 즈에를 잘 보관하고 있으니 염려 마시라는 내용과 함꼐.
시미즈 의료원 앞에 6시 조금 못 미쳐 도착. 병원 2층으로 올라가 의사에게 아픈 다리 부위를 보여주니 가볍게 파스와 약 3일치를 지어주신다.(한국으로 돌아와서 약 2주일간 아프다가 원상회복 되었다.)
나까무라 역까지 가는 막차 버스가 6시 20분에 있어 10여 분간 슈퍼에서 장을 보고 정류장 팻말 있는 데로 다가서는데, 왠 젊은 외국 아가씨가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게 눈에 들어온다. 이젠 누구에게라도 다가서는 것은 내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적어도 여성에게는, 미국 여성이다. 인사를 건네는데 나처럼 나까무라 역까지 간다는 거다. 버스에 올라타 보니 달랑 기사와 우리 둘뿐이다. 우리는 통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앉아 나까무라 역까지 40여분의 긴 대화를 쉴 새 없이 나누었다.
이름은 제인 빌하이머. 시미즈에서 고교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기간제 교사로 와 있단다. 지금까지 8개월째라는데, 앞으로 8개월을 더 있을 예정이란다. 내가 내년 1월에 다시 이곳을 지나게 될 때는 이 분은 여기 있지 않을 것이다. 나이는 26세밖에 안 됐는데도 참 당찬 아가씨다. 우리나라에도 와서 한국 학생들을 가르쳐볼 의향이 있는지 물어봤는데,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하여, 나는 열 내며 한국의 좋은 점을 있는 대로 늘어놓는다. 시간이 언제 그렇게 빨리 흘러갔는지 벌써 나까무라 역에 가까이 왔다. 우리는 서로 먹을 것을 주고 받고, 기념사진도 찰칵.
나까무라 역에 내려 역 구내로 함께 걸어가면서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건넨다. 이 저녁에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으니, 고치 시에 간단다. 친구가 마중나와 준다는데 괜히 내가 걱정한다. 아름다운 고치 역, 밤이 아름다운 고치 역이니 그래도 안심이 된다. 잘 가요~.
오늘밤, 그냥 보내기가 너무도 아쉽다. 목욕 후 밤 늦은 시각, 그렇게 늦지 않았는데도 시내가 어둡다. 아까, 빌하이머 샘께서 소개해 준 맛집을 찾아 나선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 숙소에서 3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맛있는 라멘 집이 있다고 해서 찾아 나선다. 빌하이머 샘 말씀대로 제대로 된 맛집을 찾은 듯하다.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을 라멘을 먹으며 보낸다.
이제 내일 아침 6시 차를 타야 하기에 일찍 잠자리에 든다.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이 한국에서의 출국을 앞둔 그날처럼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다. 직원에게 모닝콜을 부탁하고 시계 알람 체크하고 그래도 안심이 안되어 잠깐 눈만 붙였다가 일어나 지난 17일간의 일정을 정리해본다.
이번 순례길을 계획하면서 사실, 38번 절까지 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무작정 열흘치 정도만 계획하고 나머지는 진행 과정을 보고 되는 대로 걷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걸은 건데. 무려 38번 절이 있는 아시즈리곶까지 오게 될 줄이야. 총 도보거리를 계산해 보니 513.9키로. 17일간의 거리로는 다소 무리를 한 것 같지만
그래도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으며 삶의 선이 굵어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돌이켜보는 시간을 갖고 앞으로의 나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내일이면 이제새로운 출발선상에 선, 다시 태어난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숙소- 38, 곤고후쿠지(金岡福寺) / 도보거리 26km
숙소에서 8시 20분발 버스타고 오가와도오리까지 간 뒤 - (26k) - 38.곤고후쿠지에 도착
숙소 : 나까무라(中村) 제1호텔(비즈네스)(0880-34-4100)
음식 1,600엔
라멘+라이스 950엔
버스비 2,300엔
병원비 4,000엔
노쿄비 300엔
숙박비 5,030엔
소계 : 9,150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