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행정실입니다.” 전화기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전화벨이 울린다. 수강신청 기간만 되면 수백 명의 신입생들 절반 가까이 되는 분들의 불만 섞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연세대 교육대학원은 수강신청을 학년 순서대로 하는데. 이러면 신입생들은 필연적으로 원하는 수업을 골라 담는 게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입생들의 불평과 불만을 달래는 것은 행정실에서 아무런 권한이 없는 근로 학생. 같은 재학생의 몫이다.
“1학기생이면 들어야 되는 전공필수 수업 아직 자리 많네요.”
“지금까지 1학기 수강신청 때 원하는 과목 못 들었다고 졸업에 문제 생긴 선생님 한 명도 없다고 해요.”
이래도 물러서지 않는다면. 혹은 상대방의 무례함이 도를 넘는다면 비장의 카드를 꺼낸다.
“첫 학기에는 그렇게 남는 과목 주워 담는 수밖에 없어요. 저도 이제 겨우 2학기인데 지난 학기에 쓰레기통 뒤적이는 고양이처럼 그렇게 했고요. 2학기만 돼도 수강신청 훨씬 수월할걸요?”
쓰레기통 뒤진다는 표현에 내 뒷자리에 앉아계신 팀장님의 웃음 참는 소리가 들린다. 양옆의 차장들도 쓰레기통 뒤지는 고양이가 그렇게 웃겼는지. 고개를 숙인 채 웃고 있었다. 내가 상대방과 같은 (어쩌면 같은 과 선배일지도 모르는) 재학생임을 깨닫게 된 상대방은 신경질을 멈추고 교양 있는 예비 교사가 된다.
교육대학원 첫 학기가 끝났을 즈음 3년 만에 연락온 친구와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다. 행정고시를 준비하다 지금은 7급 공무원 준비를 고민 중이라던 친구는 술이 많이 취했는지 비실비실 웃으면서 내게 물었다.
“왜 임용고시 준비하는 애들은 합격도 안 했으면서 지들끼리 OO선생님. OO선생님. 이러면서 꼴값 떨고 있냐. 볼 때마다 웃기더라.”
훅- 치고 들어오는 무례함에 당황스러웠다. 혹시 내가 먼저 기분 나쁘게 한 게 있나 싶어 방금 전의 대화를 곱씹어 봤지만 그런 일은 분명 없었는데. 그게 선생님 되려고 교육대학원 입학한 사람한테 할 소리는 아니지 않냐고 하려다 꾹 참고 설명해본다.
“사범대나 교직이수하는 사람은 졸업할 때 교사 자격증 나오거든. 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거나 자격증 발급 앞둔 사람들이니까. 약사가 취직 안 하고 면허 장롱에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약사가 아닌 건 아니잖아.”
그러자 친구는 약사와 교사는 결이 다르다면서 임용고시 합격 못했으면 교사 일도 못하지 않냐며 반박을 멈추지 않았다.
“그냥 행정고시 준비하는 사람들도 스터디원들끼리 서로 ‘사무관’이라고 불러주면서 서로 응원해 주면 되는 거지 네가 임용고시생들을 왜 그렇게 신경 써.”
조롱할 의도가 없었음에도 그는 불쾌한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나는 숨이 꽉 막히는 대화 주제에서 벗어나 그가 최근 다녀왔다는 제주도 게스트하우스에서 여자 만난 이야기를 2시간 가까이 들어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친구였던 사이는 지인과 옛날에 알던 사이 그 중간 어디쯤의 관계가 된다. 다음 날 나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교육대학원으로 출근을 했다.
나는 교육대학원 행정실에서 교직이수와 졸업요건 확인을 담당하는 (일명 교직 조교) 일을 하고 있다. 다른 대학교 사범대학에서 1년 동안 교직원으로 일한 경력 덕에 신입생 때부터 조교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지금은 주 3일 출근, 하루 3시간 근무를 하고 한 학기 360만 원씩 장학금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
근로학생이 없을 때는 근로학생 자리에 앉아 대신 전화를 받기도 하는데. 수강신청 기간만 되면 예상을 벗어나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다. 그것은 내가 졸업한 학교의 학부생이나 (교육대학원에 재학 중인) 선생님이 될 어른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왜 수강신청을 평일에 하는 거죠? 직장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거 아닌가요?”
(“그러면 다른 재학생분들 전부 선생님 일정에 맞춰 일요일 오전 10시에 수강신청해야 할까요? 시스템이나 서버 문제 될 거 대비해서 전산부 직원분들 전부 선생님한테 맞춰 주말에 출근해 대기하고 있어야겠네요? 선생님 지금 직장 다니신다면서요? 사장이 주말 출근 시키면 기분 좋으세요? 그리고 선생님 되실 분이 이러시면 안 되죠.”)라고 차마 입 밖으로 말하지는 못했다. 친구한테서 받은 모멸감을 다른 사람한테 풀 수는 없지.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끔 하는 것은 사람으로서의 매너이다. 하지만 예상 밖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에 너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저랑 친구랑 수강 신청을 했는데요. 저희 두 사람 과목 좀 서로 바꿔주시겠어요?”
(“그걸 왜 행정실에서.. 설마 다른 사람이 과목 채갈까봐?!?”)
“아. 제가 연세대학교 학부 출신이라서 교직과목 증원 어렵다는 거 잘 아는데요. 그래도 들을 수 있는 과목이 너무 없네요. 이 과목 좀 (저한테) 열어주시면 안 될까요?”
(“연세대학교 출신인 거랑 교직과목 여석이랑 뭔 상관이 있을까요?”)
이렇듯 자신에게만 ‘예외’를 적용할 것을 요구하는 빌런들이 심심치 않게 출몰했다. 도저히 설득이 안 되는 빌런들은 담당자를 바꿔주겠다고 한 뒤 수강신청 담당하는 차장님께 넘겼다. 같은 학생인 내 말은 그렇게 안 들으면서. 직원이 내가 한 말과 똑같은 얘길 하니까 곧장 전화를 수긍하고 전화를 끊는다. 열받는다.
밤 10시. 대학원 수업을 끝내고 집에 와보니 우편물이 와있었다. 뜯어보니 건강보험료 인하 안내문이었다.
‘2022년 9월분부터 부과체계 2단계 개편으로 귀 세대의 보험료가 인하될 예정입니다. 9월 예상 건강보험료 19,500원. 보험료 인하 예상 –20,190원’
졸지에 최저 보험료 내는 사람이 된 순간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행복주택은 보증금이 8900만 원인데 그중 7000만 원은 청년전월세대출로 빌린 돈이다. 매달 이자로 16만 원 가까이 빠져나가는 것도 서러운데 (지금은 금리가 올라서 이자가 25만 원이다.) 대출받은 보증금이 내 자산으로 잡혀 건강보험 재산 점수가 122점이 된 것이 항상 억울했다.
‘차라리 8900만 원 전부 내 돈이었으면 기분이라도 좋지.’
남의 돈(대출금)에 대해서도 보험료를 부과하는 시스템은 형평성이 없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직장이 없는 나는 건강보험공단에 접속해 지역보험료를 조회한다. 소득 점수 0점. 재산 점수 0점. 자동차 점수 0점이었다. 보험료는 장기요양보험료 포함 21,890원. 진짜 ‘최저’보험료다. 보험료가 23,000원 줄어든 것이 잠시 기뻤다가 모든 점수가 0점인 고지서를 다시 보니 국가로부터 가난을 인증받은 것만 같아 조금 씁쓸해졌다. 소식을 전하고자 아버지에게 전화를 건다.
“어. 아들.”
“바쁘진 않으세요?”
“응. 괜찮아.”
“아빠는 건강보험료 얼마 내세요?”
“34만 원 정도. 왜?”
“저는 4만 원에서 2만 원으로 줄었네요.”
“저번처럼 6개월씩 밀리지 말고 제때 납부해. 아빠 코로나 걸렸다.”
“네. 빨리 나으시고 건강 챙기세요.”
부자 사이의 대화는 그렇게 36초 만에 끝이 난다.
두 달 전에 근로장려금으로 받은 돈 150만 원은 이번 달 카드값으로 빠져나갔다. 국가가 ‘일 좀 더 하지 그래?’ 하면서 건네준 돈. 나는 그 150만 원보다 앞으로 개최될 ‘근로장려금 수기 공모전’이 더 기대되었다. 근로장려금 받은 사람만 접수할 수 있는 공모전이었기에 적당히 잘 쓰면 왠지 상(이라 쓰고 상금이라 읽는 거)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2년 전에 근로장려금 수기 공모전에서 금상을 받았던 나는 대학교 졸업한 지 2년이 지난 지금도 쓰레기통 뒤지는 고양이 마냥 돈 받을 만한 대외활동이나 공모전에 눈독을 들이는 것이다.
“어떻게 딱 장려상 탈 거라고 말하고 진짜 장려상 받냐? 너는 진짜 돈 벌 생각으로 공모전 하는 것 같아.”
언젠가 대외활동을 함께 하던 선배가 내게 말했다. 그때는 그냥. ‘네. 맞아요.’라며 농담하듯 말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진짜로 돈 때문에 공모전 하는 거라고 대답해버리면 그날 밤이 너무 우울할 것만 같아서 그렇게 했다. 그래도 대외활동, 공모전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한 가지 있어 좋았다. 적어도 글 쓸 때는 억울했던 일이 덜 억울하게 느껴지고 나의 불행이 조금 덜어진다는 거.
그럼에도 가난에 대해 쓰려고 하면 울컥하면서 외로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