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마켓하는 30대 미혼 남자입니다
“어떻게 백수인데 두 달 연속 카드값이 150을 넘지?”
깜짝 놀라 결제 내역을 확인했다. 핑계를 하나 대자면 저번달에 대학교 동기 모임 숙소비 45만 원을 내 카드로 결제한 다음, 계비 통장 돈 45만 원을 내 통장으로 빼냈다. (네이버 포인트 9천 원 적립 완료! 고맙다 친구들아.) 그리고 매달 자동 결제되는 행복주택 월세가 신용카드 실적에 포함된다. 그럼에도 지난달 생활비가 100만 원을 넘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당근마켓에 올릴 만한 물건부터 찾아보았다. 한 달 전 코스트코에서 47,900원 주고 구매한 면도날 14개짜리를 꺼냈다.
‘미개봉 새 제품. 질레트 프로쉴드 면도날 4개 단위로 판매합니다. 가격은 한 묶음(4개)에 13,000원입니다. 직거래할 때 보는 앞에서 새 거 한 묶음 뜯어드릴게요.’
당근마켓에 판매 글을 올린 지 30분도 안 됐는데 두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렇게 면도날 8개가 팔려나갔고. 나는 판매완료 처리를 했다. 그러자 다음 날 판매중인 다른 물건 쪽으로 연락이 온다.
“안녕하세요. 혹시 질레트 면도날 4개만 팔아주시면 안될까요?ㅠ”
“저도 사용해야 돼서요! 죄송합니다!”
‘4개에 15,000원에 팔아볼 걸 그랬나?’ 당근마켓에 올린 물건에 연락이 줄지어 오면 그만큼 아쉬운 마음이 커진다. 나는 흡사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로 결심한 사람의 심정으로 택(Tag)도 떼지 않은 반스 스니커즈와 낡은 청바지 5벌과 최근 꺼낸 적 없는 우쿨렐레, 스타벅스 머그컵, 그리고 미개봉 프린터 토너도 하루만에 팔아치웠다.
나는 종종 유튜브 영상 여러 개를 재생목록에 추가해놓고 화장실 청소를 하는데. 한 번은 머니 트레이더라고 불리는 김경필 씨가 뼈 때리는 말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왜 당근 온도가 올라가느냐. 이건 알뜰해서가 아니에요. 왜냐면 비싼 물건 제값 주고 다 산 다음에, 필요 없으니까 싸게 팔고. (손뼉 치면서) ‘감사합니다’ 이러고. 그러면 막 온도가 올라가. 기부 천사지.”
‘지금 어떤 자식이 내 얘기를 하는 거지?’
내 욕을 듣고 있는 것만 같아 청소를 잠시 멈추고 영상 앞부분을 돌려보았다. 그러자 연타가 날아온다.
“내가 지금 벌고 있는 돈? 나한테 다 쓰라고 주어진 돈일까? 생각을 해보면. 이게 지금보다 나이 먹은 나. 20년 후의 나와 30년 후의 나는. 지금보다 능력도 없고 젊지도 않고 어떻게 보면 경제력을 잃었을 수도 있는 미래의 내가 있죠. 그들하고 같이 써야 되는 돈을 내가 지금 맡아서 오늘 관리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책임감 있게 공금처럼 관리해야 되는데. 그냥 편하게. 내가 번 돈 내 돈인데 뭐! 이렇게 돈을 바라보면 관리가 당연히 안 되죠.”
대한민국의 60세 이상 고령자 빈곤율이 유일하게 40%대로 OECD 국가들 중 압도적 1위라는 사실이 생각이 났다. 노인 빈곤율의 %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질 않고, 30년 뒤에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면 나와 같은 노인들 투성이겠지. 미국 전 대통령 링컨은 ‘40세가 지나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는데 과연 중년이 되어 책임져야 할 것은 얼굴(인상)뿐일까.
2055년에 20대 청년이 지하철에 타면 수많은 노인들이 동물원에서 신기한 동물이라도 발견한 것 마냥 시선을 거두지 않고 쳐다볼 것이다. 나는 추한 노인으로 살아가고 싶지는 않다. 젊을 때의 가난은 부끄럽지 않지만 노인이 돼서도 젊은 날의 가난을 핑계댄다면 그것은 퍽 부끄러운 일이다. 내 나이 31살.(2023년 기준) 현재의 가난이 부모님의 가난 때문이라는 핑계는 대서는 안 될 시기가 10년도 채 안 남은 것이다. 20대에는 부모님의 가난을 방패처럼 내세울 수 있지만 대학 졸업 후 수십 년이 지난 뒤의 가난은 온전히 내가 책임져야 할 나의 경제 성적표니까. 그러니까 성공해야지. 여동생과 부모님이 백화점 명품관에서 주눅들지 않고 떳떳하게 가방 하나 살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나와 내 글을 사랑해주는 사람들도 부디 운이 좋기를 바란다.
‘딱 1년만 미니멀리스트로 살아보자.’
카드값이 빠져나간 후, 카카오뱅크 비상금 통장 잔액이 –185만 원이 된 것을 보고 든 생각이었다. 어차피 임용고시 준비하느라 1년은 놀지도 못하는데. 지금 가진 옷도 충분히 많아 1년 정도는 옷을 사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며칠 뒤에 날라온 카카오뱅크 알림은 이러한 생각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이영관님 청년 전월세보증금 대출의 이자금액 160,376원이 2022.10.12.에 정상적으로 납입되었습니다. 잔액 –2,010,376원.’
1인 가구의 생활습관을 단편적으로 엿볼 수 있는 옷방을 둘러보았다. 구매해놓고 입지 않는 옷들 투성이다. 정말 필요해서 산 게 아니라 너무 싸서 구매해버린 물건들. 비닐도 뜯지 않은 유행 지난 옷들이 장롱 구석에 널브러져 있었다. 시험 합격 전까지는 여기 남아있는 옷들로 잘 생활해봐야지.
당근마켓 프로필에서 내 매너온도는 56.8도다. 재거래 희망률 100%. 116명 중 116명이 거래에 만족했다는 프로필을 볼 때 자부심마저 느꼈는데. 유튜브 영상을 다 보고 나니까 엄청 창피해졌다. 뼈 때리는 말이 많아 내 몸이 순살치킨이 된 것 같은 기분. 가격이 싸면 일단 구매해버리는 습관은 돈 없는 청년들 대부분 가지고 있는 습관 아닐까. 할인의 유혹은 그만큼 참기 힘들다. 사면 40% 할인이지만 안 사면 100% 할인인데. 우울한 기분을 소소한 쇼핑으로 해소해보려 한 시도는 당근마켓 온도만 높여줄 뿐이다.
그래도 유튜브 영상에 좋은 이야기가 많았던 것 같아 김경필 씨가 쓴 신간 도서를 구매하다 순간 멈칫했다. 맞다. 이 아저씨가 불필요한 물건 사지 말라고 했는데. 미리보기로 책 내용을 훑어보았다. 겉표지에도 ‘마음 놓고 플렉스할 때가 아니다’라고 적혀 있다. 책을 구매하는 것 자체가 딜레마인 상황. 결제를 급하게 취소했다. 학교 도서관을 검색해 보니 누가 먼저 빌려 간 상태. 다행히 예약자는 없었다. 예약 버튼을 누르자 예약자 1순위가 된다.
냉동실에는 (한국에서는) 돼지고기 부위 중 가장 싸게 필리는 뒷다리살이 2kg 조금 넘게 있고 마켓컬리에서 4천 원 정도 주고 구매한 도시락 5개와 대패삼겹살 1kg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냉동 김치볶음밥 7팩. 거기다 부엌 서랍장에도 오뚜기 컵밥 10여 개가 남아있다. 계란도 아직 많이 있고, 또 햇반도 20개 넘게 남아있으니까. 이 정도면 무지출 챌린지에 도전해도 한 달 가까이 버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루미큐브와 브루마블. 포장도 뜯지 않은 린넨 반팔 셔츠 여러 벌. 그리고 대학생 때 산 전공서적들. 쓰지 않는 텀블러와 에코백 여러 개를 당근마켓에 올렸다.
내가 보던 경제 유튜버 영상 끝부분에서 김경필 씨는 돈을 사랑하냐고 묻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단어 찾아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몹시 아끼고 소중히 여김’. 이게 사랑이에요. 사랑한다, 아낀다는 같은 의미예요. 돈을 사랑하신다 하면 그거를 아껴야죠. 함부로 하시면 안 되죠. 근데 지금 여러분들은 돈을 사랑한 게 아니야. 나는 돈을 미워하는 거야. 그러니까 돈을 자꾸 없애버리잖아. 진짜 돈을 사랑하면 돈을 아끼게 됩니다.”
‘돈을 막 쓰는 것은 돈을 미워하는 태도구나.’
가난해도 돈을 진심을 다해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