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정수 Oct 17. 2021

온갖 '녹진'하고 '꾸덕'한것

브라우니도 꾸덕, 그릭요거트도 꾸덕, 파운데이션도 꾸덕.

곱창 전골도 녹진, 우니도 녹진, 파스타도 녹진.


요새 유행하는 것들은 8할은 꾸덕하거나 녹진하거나, 둘 중 하나다. 걸쭉하고 되직하고 조밀하고 쫀득하다는 온갖 말들을 제쳐놓고, 젊은 입맛과 마음을 동시에 사로잡은 셈이다.





내 주변 사람들은 꾸덕한 걸 정말로 좋아한다. 어떤 음식이든 꾸덕하면 좋은 것이고, 화장품을 포함한 모든 것에 언제부턴가 '꾸덕하다'라는 말을 붙인다. 사전에는 "물기 있던 것이 마르거나 얼어서 굳은 듯하다"라는,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은 어감으로 설명돼있고 원래도 주로 코다리처럼 말린 해산물에나 쓰이는 북한말이라는 것은 아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중요하지도 않다. 그냥 '꾸덕하다'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식감과 촉감에 열광하는 것이다.


그건 일종의 '에누리 없이 살뜰한 질감'이라거나 '물 타지 않은 느낌'과 비슷한 의미다. '꾸덕한 브라우니'는 푸석푸석한 검은색 밀가루 덩어리가 아니라, 씹는 순간 이빨에 찰싹 들러붙을 정도로 초콜릿을 아낌없이 넣은 브라우니다. '꾸덕한 아이스크림'은 우유에 설탕과 색소만 넣은 딱딱한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쫀득하고도 잘 녹지 않는 밀도 높은 아이스크림이다. '꾸덕한 화장품'은 정제수 99%에 유효성분은 병아리 눈물만큼 첨가한 것이 아니라, 피부에 좋다는 것은 듬뿍듬뿍 넣어서 내 피부를 쫀쫀하게 빛나게 해 줄 것 같다는 뜻이다.




'꾸덕함' 유행의 뒤를 이은 '녹진하다'라는 말도 비슷하다. 흔치 않고 꽤나 고급스러운 단어인 이 '녹진하다'라는 말이 어느 순간부터는 '꾸덕하다'처럼 아무 데나 붙기 시작했다. 아마도 음식 유튜버 '참PD'가 리뷰에서 수시로 쓰면서 대중적으로 퍼진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참PD는 녹진하다는 말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시청자들을 '녹진이'라고 부를 정도니까 말이다. '녹진하다'라는 말은 한 번 듣게 되면, 뜻은 정확히 모르더라도 어감 자체가 멋지고 몽환적이어서 이곳저곳에 자주 활용하고 싶어지는 말이기도 하다.

참PD 정모에 등장한 녹진 캡 @유튜브 애주가참PD 화면 캡처


'녹진하다'라는 말도 "물기가 약간 있다. 끈기가 있다"라는 사전적인 뜻과는 관계없다. 깊고, 진하고, 풍미로 가득하고, 원래의 묽은 것에 무언가가 고급스러운 것이 더해진 느낌을 풍기고 싶을 때 쓰는 것 같다. '녹진한 감자탕'은 대충 미원을 때려 넣은 맑은 국물이 아니라, 끓이고 또 끓여서 녹말과 기름기와 여타의 것들이 가득 우러나온 국물이 있어야 한다. '녹진한 리조또'는 국물에 말아 동동 뜬 밥이 아니라, 보들보들한 밥알이 진득한 크림과 엉겨 붙어 포크로 떠내도 모양이 유지되는 식감이 중요하다.




친구들과 꽤나 오랜만에 모이던 날, 내가 장소를 정한 적이 있었다. 키토제닉이라든지 지중해 식단 같은 온갖 건강한 컨셉의 음식은 죄다 모아놓은, 꽤나 핫한 식당이었다. 회사 선배들과 몇 번 가봤을 땐 맛도 분위기도 화려했던 기억에 나름 자부심(?)을 갖고 친구들을 데려갔는데, 반응은 영 떨떠름했다. 음식이 나오자 사진은 열심히들 찍었지만, 한 젓가락씩 떠서 먹어본 뒤에는 "음, 건강한 맛이네~"라며 ^^;;과 같은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에 꾸덕하고 달디단 디저트가 나오자 그제야 표정이 풀리며 "이제야 좀 자극적인 맛이다. 오늘 너무 건강한 음식만 먹었어!"라고 유쾌하게들 웃었다.

우리의 구원자였던 티라미수 @디라이프스타일키친


꾸덕하고 녹진한 맛이라는 건 크림, 기름, 치즈, 설탕이 있어야 비로소 완성된다. 맑은 국물, 가벼운 식감이 아니라, 묵직하고 풍부한 맛 말이다. '할매니얼' 유행에 편승한 흑임자, 인절미, 밤맛도 나는 비슷한 맥락에서 본다. 요새 애들이 진정 할매 입맛에 빠져있다면, 왜 식혜나 수정과, 강정은 여전히 인기가 없을까? 꾸덕하지도, 녹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재료 중에서도 오직 '꾸덕하고 녹진하게' 만들 수 있는 맛들만 유행한다. 아니, 새로운 '꾸-녹' 재료들을 찾다 보니 거기까지 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더 꾸덕하고 더 녹진한 것을 찾아 헤매는 건, 담백하고 삼삼하기만 한 음식만으론 내 안의 빈 곳이 채워지지 않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돌도 씹어먹을 나이'라는 10대, 20대, 30대는 생각보다 건강에 집착한다. 의지와 관계없이 앞으로 살아야 할 날들이 너무 오래 남았으니까. 몸 관리를 하겠다며 편의점에서 산 차가운 '닭고야(닭가슴살+고구마+야채)'로 식사를 때우기도 하고, 채식을 하겠다며 샐러드와 대체육을 찾기도 한다. 하지만, 건강한 음식들만 가지곤 허전할 때가 있다.


허전함의 이유는 모두 다르다. 일과 공부에 지쳐서일 수도 있고, 관계에 데어서, 주머니가 텅 비어서, 혹은 그저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지루해서일 수도 있다. 그래서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거나 데이트를 할 때, 하다못해 먹방이라도 보며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에는 걸쭉하고 자극적인 것을 내 안에 채워 넣고 싶어 진다. 그래야 더욱 텐션이 올라가고, 그래야 오늘 밤 우리의 만남도 더 진득할 수 있다. 맛이 녹진한 것만으로는 모자라서 분위기까지 녹아나는 노포를 찾아 헤매기도 한다.


건강에 안 좋은 음식들이라고 너무 걱정할 건 없다. 차라리 맛있게 즐기고 확실히 운동하는 편을 택할 사람들이다. 재료 본연의 맛 따위는 모르는 애들이라고 폄하할 것도 없다. 나이가 들면 알아서 그런 자연스러운 음식들로 돌아갈 사람들이다. 그냥 '젊은 것들 입맛이란...' 하고 너무 혀를 끌끌 찰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원래 그런 것만 찾는 애들이 아니라 그럴 때가 있는, 아니 꽤 많은 애들이라서 종종 그런 거니까.   


몇 년 전 일본에서 맛봤던, 제대로 '꾸덕'했던 말차 초콜릿



참고 

    [쇼콜라티에 고영주의 단짠인생] 어른의 아이스크림, 젤라토(매일경제, 2019년 6월 1일) 

    많이 틀리는 음식 명칭 및 표현(네이버 블로그 <레드피쉬의 식도락> 2015년 1월) 

    유튜브 채널 '애주가참PD'

이전 04화 FIRE족과 YOLO족은 결국 같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