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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정수 Oct 19. 2021

INFP인 내가 싫지 않아요

가히 <MZ세대의 명함>이라고 할 만한 MBTI에 관해 확실한 건 두 가지다. 내 주변의 꽤 많은 사람들은 남녀불문 자신의 MBTI를 알고 있으며, 그 어떤 심리테스트나 성격유형검사보다 MBTI 결과에 더 공감했다는 사실이다.


'유사과학의 선봉장'으로 한국과 일본을 휩쓴 혈액형을 MBTI가 넘어서긴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4가지 밖에 없는 유형들을 원색적으로 나눠놓은 혈액형(e.g. B형은 또라이)에 비해, MBTI는 유형이 그 곱절인 16가지나 되는 데다 이름들이 은유적이고 복잡(e.g. 선의의 옹호자)해서다. 그런데 MBTI가 우리를 사로잡은 이유도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친구들과 MBTI 테스트를 할 때에 재미가 생기는 지점은 "너 무슨 유형이야?"에서 멈추지 않는다. 유형별 궁합, 유형별 통계, 유형별로 맞는 그 무언가(음악, 음식, 물건, 취미 등등)로 줄줄이 이어지는 MBTI 유니버스는 참으로 깊고도 넓다. 가장 오래된 친구 한 명과 MBTI 궁합표를 보니 "진짜 궁합 최악! 지구 멸망의 길"이라는 결과가 나와서 빵 터진 적도 있다. 신뢰도를 알 수 없는 <성격 유형별 평균 소득>에 따르면 나는 16개 유형 중 가장 가난하고, 그 친구는 끝에서 두 번째로 가난할 것이라는 통계에 어이가 없기도 했다.


세상 성격 절반과 '지구 멸망의 궁합'이고, 그 모든 유형 중 가장 소득이 낮다는 INFP가 나다. '열정적인 중재자'라는 이름은 알쏭달쏭하지만, 전체 인구의 4%를 차지한다니 그렇게 희귀한 성격은 아니다. "최악의 상황이나 악한 사람에게서도 좋은 면만을 바라보는 이상주의자"라는 한 줄 요약에는 정작 동의하기가 어렵지만, 다른 세부적 묘사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들이 많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본인 자신뿐 아니라 자신이 속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파트너의 독립성을 존중하고, 그들이 더 발전할 수 있도록 지지한다"
"자기를 표현하려는 욕구와 호기심이 많아서 작가가 되기를 꿈꾼다"
"경쟁적이거나 비판적인 환경에서는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움츠러든다"




만들어진지 30년은 다 된 MBTI가 이제 와서 선풍적으로 유형한 건 저 16personalities라는 무료 검사 사이트의 역할이 컸다. 개괄, 장단점, 연애, 친구, 커리어, 가족관계, 결론 등 분야별로 풍성한 설명을 읽을 수 있다. 각 유형에 이름과 색깔, 이미지를 더해놔서 이해하고 기억하기도 쉽다.


@16personalities

사실 이곳이 제공하는 검사는 공식 MBTI (마이어스-브릭스 유형 지표) 검사를 변형하고 다른 분석과 결합해서 16개의 유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현재의 MBTI 열풍을 다룬 수많은 기사 말미에 들어가는 전문가들의 반응은 한결같다. "신뢰도가 낮다. 16개 유형에 사람을 모두 끼워 넣을 수 없다. 너무 의존하면 인간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한 마디로, 이것 역시 일종의 유사과학이니 맹신하지 말라는 것이다.


마케팅에도 각종 유형검사가 남발되다보니 이제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슬슬 생기는 것 같다. @배달의민족




하지만 모든 심리테스트가 그렇듯, 이런 검사의 재미는 "알면서도 과몰입하는" 데에서 오는 것 아닐까? MBTI의 진짜 매력은 사람의 성격을 외향/내향처럼 간단히 양분하는 대신, 구체적이고도 다층적인 캐릭터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비록 다른 묘사들도 있지만, 나조차 또렷하게 설명하지 못했던 내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짜릿함을 느끼게 된다. 


검사 자체도 흥미롭다. 어떤 질문을 받아 들고 뭐라고 답할지 고르는 단계 자체가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니까 말이다. 내가 받은 편지함의 읽지 않은 메일을 죄다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지, 수천 개가 쌓여도 아랑곳하지 않는지처럼 아주 사소한 면면들이 내 성격을 조금씩 보여주는 거울이라는 것은 얼마나 흥미진진한가. 


결과를 받아 든 뒤에는 너무나 평범한 사람인 줄 알았던 내게 의외로 특별한 구석이 있단 걸 깨닫기도 하고, 모나다고 자책했던 내 모습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는 걸 알고 위로를 받기도 한다. "생각했던 이상이 이뤄지지 않으면 갑자기 깊은 나락으로 빠져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한다"라는 단점을 지적받을 때에는 마음이 좋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스스로 회복하는 편"이라는 서술에는 응원을 받은 듯 힘이 난다. 


각종 보완 텍스트나 전문적인 공식 검사를 찾아다니며 적극적으로 '자아탐구'에 더 몰입하는 사람들도 생긴다. 내가 싫어했던 내 모습을 직시하며 보완하고, 부러워만 했던 남들의 적극적인 성격에도 양면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은 결국 자존감을 회복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MBTI 검사는 사람들과의 새로운 대화 주제로 끊임없이 이어진다. 남들에게 "MBTI가 뭐예요?"를 묻는 건 결국 이해하고 싶어서다. "넌 사교적인 사람이니 역시 ESFP일 줄 알았어"라고 규정하거나, "매니저님은 INTJ니까 스몰토크는 싫어할 거야"라고 간단히 넘겨짚고 싶어서가 아니다. 좀 더 편안하게 당신을 대하고, 좀 더 깊게 당신과 관계 맺고 싶어서다. 매일 반복되는 "점심에 뭐 먹을까" "어제 뭐했냐" "내일 뭐할 거냐"같은 질문들보다, MBTI는 깊은 대화로 직행할 수 있는 편리한 입구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MZ세대는 '나 자신'에 대한 인지능력과 관심이 큰 세대라는 분석에 동의한다. MBTI 검사는 완벽하지도 않고 정확하지도 않다. 하지만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어디에 사는지, 얼마나 잘생겼는지를 가지고 사람을 규정하는 것보다는, MBTI를 주제로 이야기하면서 서로를 이해하려 애쓰는 편이 한결 '본질적 대화'에 가깝지 않은가. 한참 높은 부장님도, 한참 어린 사촌동생도, 세계 최고의 갑부도, 아직 일자리를 찾지 못한 친구도,  우린 모두 MBTI로 하나 될 수 있으니까.


초록색 캐릭터인 INFP는 16개 유형들 중에 특히나 MBTI에 관심이 많다고도 한다. @16personalities



참고

   [피플&포커스] “당신의 MBTI는?” MZ세대 홀렸다… 맹신은 금물(천지일보, 2021년 5월 12일)

    MZ세대들 누구를 만나든 MBTI 묻는 이유?(주간조선, 2021년 4월 29일)

   나를 찾아줘 #MBTI](SBS, 2020년 12월)

    16personal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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