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정수 Oct 20. 2021

'갬성'과 '취향' 찾아 삼만리

취향은 사실 '개인주의자 선언'이다. 남들의 취향은 존중하고, 내 취향도 존중받고 싶다는 선언.


취미 생활로 △음악 듣기 △영화감상 △운동 중 하나를 골라야 했던 옛 시절엔 답답해서 다들 어떻게 살았을까? 솔직하게 "난 사실 이런 걸 좋아해요"라고 고백하면 △"다 큰 어른이?" △"남자/여자가 무슨..." △"그렇게 할 게 없냐"처럼 핀잔 섞인 반응들이 돌아오던 그 시절 말이다.


무난하지 못한 것이 문제로 여겨졌던 시절을 지나, 우리는 '오직 나만의 취향'과 '요즘 핫하다는 갬성'을 찾아 매일 헤매고 있다.





취향은 '고마운 방패'이기도 하다. 존중하고 존중받는다는 건 적정선을 긋는 일이다. "그냥 그게 내 취향저격이라서"라는 말은 맥락에 따라 경고일 수도 있다. 내가 무엇을 왜 어떤 포인트에서 좋아하는 건지 정말 궁금해서 묻는 열린 질문에는 얼마든지 답해줄 수 있다. 하지만 내 취향의 이유와 배경을 당신 멋대로 해석하지는 말라는 뜻이다.


어른들에게는 이런 태도가 싸가지없고 무례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취(개인의 취향)'라는 방패가 없던 시절에 쏟아지던 질문들이야말로 진짜 창이었다. 악의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이런 '막말들'을 무심코 던지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니까.


    "머리를 갑자기 왜 그렇게 잘랐어? 실연당했어? 아니면 '페미'니?"

    ―아니, 그냥 이 스타일이 시원해 보여서 잘라봤어. 그러는 네 머린 왜 그런데?

    "30대 아저씨가 무슨 레고를 그렇게 사 모으냐? 애들도 아니고"

    ―아니, 재미있잖아. 레고 만든 사람도 다 애들 아니었어. 그리고 애들 무시하니?

    "술 좋아한다는 얘기 좀 하고 다니지 마. 여자가 그러면 싸 보여."

    ―아니, 난 주정뱅이가 아니라 미식가일 뿐인데? 왜 당신 맘대로 평가해?


이젠 수많은 편견으로 겹겹이 싸인 질문 세례에 일일이 해명할 의무가 없다. "남들에겐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는데, 난 이런 거 좋아하는 사람이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시대라 다행스럽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골라서, 추구하고, 실행하고, 그게 내 안의 일부로 자리 잡는다. 문자 그대로 '주체성'을 이룩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우리에겐 "조크든요" 선배가 있다 @1994년 MBC 뉴스데스크




'취향의 시대'엔 과거 핍박받던 마이너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나 혼자가 아니었구나!"를 깨닫기도 한다. 주류에 대항하는 소수자로서의 연대감과 단일 정체성을 공유할 수 있게 됐으니 신이 날 수밖에 없다. "치약을 왜 돈 주고 사 먹냐"는 비아냥을 샀던 민트 초코맛은 이젠 '민초단'의 수호를 받고 있다. 아직은 논란의 영역인 파인애플 피자도 민초단의 부흥에 자극받는 듯하다. (참고로 난 민초는 별로고 파인애플 피자는 너무 좋다) 예전에는 한쪽이 당연했고, 한쪽은 유난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쪽이든 저쪽이든, 자신의 취향을 얼마든지 내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각종 '갬성'들도 취향에서 이어진다. '갬성'은 내가 좋아하고 또 멋지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똑 부러지게 말로 표현하긴 어렵지만 애정을 드러내고 싶을 때 쓰는 말이다. #루프탑갬성 #시골갬성 #오션뷰갬성 등 무엇이든 상관없다. 한편으로는 개성 넘치고 특색 있는 분위기를 아우르기도 한다. #갬성카페 #갬성숙소 #갬성글 처럼.


누군가는 요새들 열광하는 '갬성'이 "알맹이는 고만고만한데 포장만 번지르르한 것"이라 비웃기도 한다. 하지만 MZ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포장은 다르지만 내용물이 비슷한 걸 못 알아보진 않는다. 중요한 건, 그건 '포장만 다른'게 아니라 실제로 '다른' 것이란 사실이다. 재미와 의미를 굳이 어렵고 복잡한 데에서 찾아야 하나? 그 색다른 콘셉트가 바로 재미있고 독특한 것인데!

포장이 달라서 인기가 폭발한 대표 사례. 레트로갬성의 곰표 밀맥주 @세븐브로이




사실 취향이 지배하는 분위기는 누군가에겐 때로 폭력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한때는 "혼자 툭 튀어나오지 말고, 남들 하는 대로만 해"라는 압박이 세상을 지배했었는데, 이제는 반대로 "남들이 하라는 대로 하지 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가 너무 강력한 압박이 된 나머지,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으면 모자란 놈이 되는 기분마저 든다. "넌 뭘 좋아해?"라는 질문에 "글쎄... 난 잘 모르겠어" 밖에 할 말이 없을 때 부끄럽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또렷한 취향이 없는 사람을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없다거나, 뒤처지는 사람 취급한다면 몹시도 무례한 일이다. 도드라지는 개인으로서 사는 건, 여러 사람들 중 한 명으로 존재하는 것보다 훨씬 큰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라서다. 어떤 사람들은 꽤 많은 투자가 필요한 취미들을 쇼핑하듯 시도하고 또 갈아치우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럴 여력이 없는 채로 살아가기도 한다.




다만 취향을 그저 사치스럽거나 '할 일 없고 돈은 남는 한량들의 전유물'로 생각해서, 그래서 '나와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절대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고 싶다. 취향을 가진 사람을 만나고 몰랐던 취향을 찾아 나서는 건, 그 자체로 나를 확장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워라밸을 지킬 수 있는 일을 한다면 내 시간에 내 취향을 반영하는 건 더 중요하다. 일이 점유하지 않는 시간을 나 자신을 풍요롭게 하는 것들로 채우고 싶다면 말이다.


아직 내 취향을 잘 모르겠다면 찾아 나서면 된다. 가만히 앉아있다가 갑자기 무언가를 좋아하게 될리는 없다. 주변 사람들과 대화해보고, 그들이 좋다는 수많은 것들 중 괜찮아 보이는 걸 형편에 맞게 하나씩 시도해보면 된다. 내가 커피를 좋아하는 것 같다면 주말마다 전국의 로스터리를 찾아다닐 수도 있고, 마트에서 파는 인스턴트(동결건조) 커피를 종류별로 테이스팅 해볼 수도 있다.

유튜버 '남자커피'의 '알커피를 를 핵맛있게 먹는 꿀 레시피 3가지'. 이거 보고 정말 오랜만에 알커피 샀다.


혼자만 몰래 즐겨서는 제맛이 다 살지 않는다. 그럴듯하게 사진을 찍고, 같이 즐길 벗을 찾고, 나아가 더 '갬성'있는 곳을 찾아 나서는 과정은 취향의 형성과정에 감칠맛을 더해줄 것이다.



참고

    [ESC] 갬성(한겨레, 2018년 9월 13일)

    취향저격(중앙일보, 2021년 7월 28일)

이전 07화 INFP인 내가 싫지 않아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