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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정수 Mar 01. 2019

접시에 담긴 계절, 핀란드의 파인 다이닝

헬싱키의 레스토랑 Ora

핀란드 음식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다만 제철의 로컬 식재료를 사용해 맛을 극대화한다는 정도로 설명한다면 오라(restaurant Ora)는 아주 완벽한 모던 핀란드 음식을 내놓는다. 2019년에는 미슐랭 가이드(원스타)에도 선정됐으니, 이제는 좀 더 많은 리뷰가 올라오지 않을까 싶다. 


테이블 배치만 봐도 얼마나 셰프들이 음식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마치 메인 스테이지를 향해있는 관객석처럼, 모든 테이블과 의자가 주방을 향해있다. 손님들은 서로를 마주 보는 게 아니라 나란히 앉아 주방(!!)을 바라본다. 이곳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음식이니까.


사실상 저 자리가 정말 VIP 석이다.


하나의 디쉬가 끝날 때마다 셰프들은 친절하게 다음 음식을 가져다주며 너무나 신나는 표정으로 -절반쯤은 음식에 미쳐있는 눈빛으로- 각 메뉴들을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었는지 당신이 원하는 만큼 끝없이 설명해줄 것이다. 심지어 "어느 농장의 어느 농부를 어떻게 알게 되어서 언제 무엇을 얼마나 샀는지"까지 말이다. 아래는 우선 2018년 8월의 예시다.



애피타이저


첫 번째는 작은 품종의 사과 조각을 슬라이스해 식초로 맛을 돋운 것. 꽃은 음식점 한가운데에 있는 꽃병에서 작은 가위로 신중하게 골라 딴 것. 홈스테이 주간에 봤던 한나마이야씨의 가족농장과 같은 농장에서 따온 꽃이라고 한다. 오늘 오는 모든 손님들은 이 꽃병에서 딴 꽃을 맛보게 될 것이다. 담백한 양송이 수프는 시큼한 사과의 맛을 완벽하게 중화시켜준다.


두 번째로 내온 것은 레드, 화이트, 그린 커런트와 완두콩(?)을 작은 볼에 담고 식초와 할라피뇨, 허브를 얹어 맛을 낸 것인데 색색의 동그란 재료들이 어우러져 마치 보석함 같다. 레드커런트는 신 맛이 강한 반면, 화이트와 그린은 달콤한 맛이 좀 더 강하다. 콩은 아주 살짝 달달하면서도 담백하고 아닥아닥한 맛. 배를 채우는 게 아니라, 입맛을 돋우는 역할에 아주 충실한 애피타이저들.


신선한 재료가 풍성한 여름인 만큼, 각 요리마다 해당 음식에 쓴 재료를 활용해 만든 물을 먼저 따라줬다. 때로는 차 같기도, 때로는 차가운 주스 같기도, 때로는 육수 같기도 하다. 재료의 맛을 극대화한, 창의적 연출.



생선을 활용한 음식들

흰 살 생선 타르타르는 독특한 허브와 오이, 꽃으로 장식했다. 생선감자크로켓. 감자와 생선살을 다져 만든 크로켓은 포슬포슬함과 촉촉함을 동시에 담은, 이날의 베스트 디쉬였다. 생선을 다양하게 활용해 만든 핀란드의 음식들은 모두 맛보는 재미가 훌륭하다. 


이어 나온 것은 세 가지 종류의 주키니와 무이꾸 생선. 작고 단단한 주키니와 커다란 주키니를 살짝 부드럽게 익히고, 차갑게 식혔다. 아래 들어있는 것은 커다랗게 토막 내 직화로 구운 주키니와 무이꾸라는 작은 생선이다. 까맣게 그을린 껍질에서 적당하게 불 향이 나는 가운데, 뼈째로 먹는 무이꾸가 잘 어울린다.


중간에는 직접 구운 포카치아와 직접 만든 버터를 곁들여 준다. 너무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적당한 두께의 껍질은 딱딱하지도 바스러지지도 않게 아주 완벽한 칩처럼 바삭했고, 안은 더없이 촉촉했다. 다소 기름기가 많이 느껴졌지만 조금도 느끼하진 않았다. 소금과 세이지로 간한 버터가 신의 한 수. 3주간 먹은 빵 중 가장 맛있었다.


메인 디쉬

결을 그대로 살려 촉촉하고 부드럽게 구운 돼지고기. 개인적으로 소고기보다는 돼지고기를 원래 더 선호하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누가 먹어도 소고기 스테이크보다 맛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스테이크였다. 해바라기 씨로 만든 소스는 재료들의 맛과 향을 덮지 않고 '풍미만 완벽하게 적절히' 살려주는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디저트

코스 음식에서 메인을 먹기 전 입맛을 돋워주는 애피타이저가 있는 것처럼, 메인 디저트(??)를 먹기 전에 준비성으로 주는 프리 디저트가 먼저 나왔다. 차갑게 식힌 베리에 생 초콜릿을 가루 내서 뿌렸다. 가운데는 정확하게 맛이 기억이 나지 않는, 상쾌했던 풍미의 아이스크림. 꽃은 아까 봤던 바로 그 꽃이다. 오른쪽은 아주 작게 꾸덕한 케이크에 배 조각을 꽂은 뒤 역시 꽃으로 장식했다. 지금까지 먹은 음식들의 뒷맛을 청량하고 기분 좋게 정리해준다. 




2019년 11월의 재방문

여름의 점심에 이어, 가을의 저녁에 재방문했다. 새롭고 실험적인 음식들, 재료의 맛을 담뿍 살린 조리법, 여전히 반짝이는 직원들의 눈빛은 '역시'를 연발하게 만들었다. 워낙 디쉬 간에 간격이 길어 식사시간이 3시간이 넘게 걸렸다. 다시 긴 시간에도 지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여름내 저장해둔 노르딕 식재료들의 맛이 혀끝에서 셰프의 의도대로 뛰놀던 것을 실컷 즐겼던 덕분 아닐까? 몇 가지 사진은 찍질 못했다. 


허브와 방울토마토를 얹은 크리스피칩, Carp bream with potato and arctic turnip, Beetroots and currants with tomato

첫 번째 애피타이저는 바삭함이 살아있는 얇은 칩에 허브와 소금,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 흰 디핑을 얹어 토마토와 함께 낸 것. 명랑한 맛이 입맛을 돋우기에 최고였다. 

가운데의 수프에는 북쪽 지방의 순무가 얇게 저며져 들어갔다. 초록색으로 보이는 메리골드 오일과 생선알이 톡톡 터지는 맛이 매력적이었다. 포인트는 베이컨처럼 바삭하게 튀겨낸 감자 껍질. 뒤에 이어질 메뉴에 감자가 들어가니, 조금 다른 부분을 조금 다르게 활용했다는 것이었다. 위트 있는 해석이었다. 

세 번째는 데친 비트루트에 커런트를 얹고 토마토소스를 끼얹은 요리. 지난해 여름 냈었던 초록색의 싱그러운 커런트 애피타이저와 다른 점이 보인다면 당신은 셰프의 머릿속을 읽은 것이다. 이번엔 가을을 맞아 노란색과 붉은색을 그야말로 마음껏 강조한 것이다!


Spagetti squash with sea buckthorn and liquorice/ Goose with mushroom, spicy kale and potato

여기에 앞서  나왔던 것은 Roe deer from Janakkala with root vegetables였다. 사진을 아쉽게도 놓쳤는데, 아주 얇게 저민 사슴고기를 처음 먹어본 기회였다. 스파게티 스쿼시는 정말 스파게티가 아니라, 호박 속을 긁어  마치 면처럼 만든 것이다. 나뭇잎 모양의 바삭한 비스킷과 함께 먹으니 맛 자체가 아주 따뜻했다. 오른쪽은 거위 다리살을 촉촉하게 요리한 뒤 할라피뇨 등으로 칼칼한 맛을 낸 케일, 따뜻한 크림소스와 함께 내준 요리. 양파처럼 보이는 것은 감자를 길고 얇게 썰어서 오랜 시간 동안 설탕에 절여 구운 것인데, 그만큼 조직이 쫀득하고 풍부한 맛이 난다. 


Forest – Scots pine, birch and lingonberry / 견과류로 구운 미니 케이크

대망의 디저트. 초콜릿에는 따뜻한 캐러멜 소스를 붓고, 솔잎이라는 기상천외한 향을 얹었다. 숲이라는 이름이 너무나 적절했다. 마지막은 견과류를 이용해 따뜻하게 구운, 루티한 맛이 나는 미니케이크. 밤의 추위 속으로 돌아가 귀갓길에 나설 손님을 위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싶다. 




와인은 따로 하지 않았지만, 수준급의 와인 페어링도 가능하다. 로컬 재료에 대한 집착, 그 재료들을 활용하는 창의적 레시피에 대한 열망,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재료들이 보여주는 의외의 조화, 한 겹 한 겹 재료의 풍미를 걷어내 보는 이색적 경험을 해보고 싶다면 다시 한번 추천한다. 점심은 더 이상 운영하지 않는다. 6코스에 1인당 89유로, 메뉴는 계절마다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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