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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계원 Oct 08. 2022

나를 위로하는 그림

한동안 그림을 배우러 다녔다. 원래는 초등학생 어린 아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려 미술학원에 데려다 주려 다녔다. 아들은 그림에 별 취미가 없어 곧 관두고, 아들 대신 내가 1년 정도 개인 미술 수업을 받았다. 매달 1점씩 정도 유화 그림을 그렸는데, 나에게 별 재능이 없다는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선천적 재능은 타고나지 못했지만, 그림을 보고 좋아하는 마음은 남았다. 미술관에 가서 직접 그림을 보면 좋겠지만, 주변에 미술관이 별로 없다는 핑계로 그림에 관한 책을 읽는 것으로 대신했다.


우지현 작가가 쓴 <나를 위로하는 그림>이라는 그림 에세이 책에는 많은 그림들이 나온다. 이 중에 내 마음에도 닿았던 그림들을 같이 소개해 보고자 한다.



책이 주는 달콤한 평온


내가 한평생 가장 좋아했던 것은 책이었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는 학교 도서관에서 어린이 사서를 하면서 끊임없이 책을 읽었고, 어른이 되어서도 항상 도서관과 서점을 들락거리며 살았다. 웬만큼 속상한 일이 있어도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1~2시간 있으면 기분이 풀리고 다시 살아갈 기운을 얻곤 했다. 돌아보면 내가 가장 좋아했던 시간들은 도서관에서 10권 가까운 책을 빌려 와서 집 소파 위에 수북이 놔두고 재미있는 책부터 한 권씩 읽어 나가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모든 과한 것들은 결국 그 흔적을 남긴다. 50년 가까이 활자중독처럼 책만 보던 시간들은 결국 고도근시와 노안을 불러일으켰고, 이제는 눈이 아프지 않고 책 한 권 마음 편하게 읽기가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한동안 책을 멀리 하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책이 주는 달콤한 평온을 잊기가 어려웠다.


영국 화가 조지 클라우센의 <등불 옆에서의 독서>를 보면 한 여성이 편안한 소파에 앉아서 등불 옆에서 평온하게 독서에 빠져들고 있다. 이 여성처럼 작은 글씨 책을 더 이상 읽어 나갈 수는 없게 되었지만, 요즘은 소파에 누워서 오디오북을 들으면서 평온하게 꿈나라로 가곤 한다.


조지 클라우센, 등불 옆에서의 독서(1909)


사랑 앞에 부질없는 것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모네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사물의 뚜렷한 형체보다는 빛이 주는 느낌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원래 빛과 함께 시시각각 변화는 자연을 묘사하기는 했지만, 모네의 그림 속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빛과 함께 존재한다. 모네는 카미유라는 가난한 여인을 만나서 사랑을 하고 아이를 얻는다. 집안의 극심한 반대로 경제적 지원도 끊기고, 한동안 힘든 생활을 영위해 갔지만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아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느껴진다. 산책이라는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양산을 든 그의 아름다운 아내는 투명한 햇빛 속에서 곧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찰나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그림이 주는 느낌처럼 그녀는 오래 살지 못하고 젊은 날에 죽었다.


요즘 남편과 열심히 산책을 다니고 있다. 주로 남편이 퇴근한 저녁에 가로등 불빛이 조금씩 비치는 동네를 돌며 밤 산책을 하고 있지만, 주말에는 햇살이 찬란하다 못해 뜨거운 영산강을 몇 시간씩 같이 걷곤 한다. 흐르는 강물은 윤슬처럼 반짝이고, 하얀 구름만 몇 점 떠다니는 파란 하늘은 눈이 시릴 만큼 아름답다. 세월이 지나고 나면 내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었다는 생각이 들 것 같다.


클로드 모네, 산책, 양산을 쓴 여인(1875)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사물들 같은데, 자세히 보면 뭔가 현실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었는 초현실적인 구성이 있다. 예를 들어 낮과 밤이 한 그림 안에서 공존한다든지, 사과가 얼굴 한복판에 있는 남자라던지, 중절모를 쓴 남자들이 하늘에서 비처럼 내리고 있는 그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는 파이프 그림 같은 것이다.


이미지의 반란이라고도 하는데, 우리가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사물들에 대해서 정말로 그러한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우리 눈으로 본 것은 사실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물론 우리 눈으로 직접 보고 들은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지만, 100% 사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과거 우리가 받았던 교육과 관습과 가치관에 따라서 동일한 사물도 다르게 보고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제인 오스틴의 유명한 소설인 <오만과 편견>을 보면 사람이 편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얼마나 오해할 수 있는지 나온다. 동일한 사람도 내가 그 사람을 선의를 가지고 보고 있을 때와, 악의를 가지고 보고 있을 때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가 객관적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사실은 주관적으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결국 나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진짜가 보일 수도 있다.


르네 마그리트, 사람의 아들(1964)


안개 속 세상을 달리는 기차


20년 전쯤 미국 대륙을 기차를 타고 반 정도 횡단한 적이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대륙 횡단 기차를 타고 3일쯤 달려서 시카고에서 내렸다. 한국 직장에서의 삶이 너무 힘들어 회사에 휴직계를 내고 미국에서 잠깐 어학연수를 받고 있을 때였다.  안개 낀 것처럼 한 치 앞도 잘 안 보여, 삶이 참 막막하던 때였다.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시카고에 있는 친척들을 보고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기 위해 가는 길이었다. 보통 때 같았으면 비행기를 타고 2~3시간 안에 갔겠지만 그때는 왠지 기차를 타고 가고 싶었다. 시카고에서 수십 년을 사셨던 삼촌은 나를 마중하기 위해 시카고 기차역을 처음 와 보았다고 하셨다. 미국인들도 대부분 먼 거리를 기차를 타고 다니지는 않고, 비행기나 자기 차를 가지고 다녔다.


암트랙이라는 미국 기차의 풍경은 조금 독특했다. 침대칸도 있었지만, 나는 베개 하나와 음식 바스켓 하나를 들고 일반실을 타고 기차 좌석에서 자면서 계속 갔다. 창 밖으로 초원 위에 하얀 집과 같은 그림 같은 풍경들이 계속해서 지나갔고, 해가 떠오르고 지는 것을 보았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풍경들을 보면서 세상이 이렇게 넓은데, 내가 가진 고민은 참 작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드워드 호퍼의 <293호 열차 C칸>이라는 그림을 보면 기차 안에 고독해 보이는 여인이 혼자서 책을 보고 있다. 창밖으로 그림 같은 풍광이 있지만 이 여인은 창이 있는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책만 보고 있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은 대부분 도시 속에서 외로운 사람들을 많이 그리고 있지만, 이 그림 속의 여인도 기차 안에서 견고하게 고독해 보인다. 기차 안에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책만 보고 있는데, 책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에드워드 호퍼, 293호 열차 C칸(1938)


갑자기 피는 꽃은 없다.


10년 전쯤 프랑스의 프로방스를 여행한 적이 있었다. 프로방스의 눈부신 햇살 아래 신선한 과일과 꽃들, 반짝이는 분수의 이미지가 강렬했다. 그렇지만 시각적 이미지보다 더 오래 남은 것은 향기였다. 프로방스를 여행하면서 그 지역의 기념품으로 작은 포푸리를 사 온 것이 있었다. 라벤더 말린 것을 라벤더를 닮은 작은 꽃들이 그려진 연보라색 작은 천주머니에 담아 놓은 것이었는데, 내가 있는 방 옷장 속에 걸어 두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옷장 문을 열면 희미한 라벤더 향이 남아 있어 프로방스의 여름을 추억하게 만들어 준다.


포푸리 만드는 여인을 그린 허버트 제임스 드레이퍼의 <포푸리>라는 그림을 보면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장미로 포푸리를 만들고 있다. 붉고 하얗고 핑크 색의 화사한 장미를 보다가 포푸리를 만들고 있는 여인을 보면 왠지 어둡고 창백해 보이는 게 슬픔이 어려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결국 포푸리를 만드는 과정은 가장 싱싱하고 아름다운 꽃의 순간을 박제하여 오래 동안 남을 향기로 만드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가끔씩 내 인생에서 절정의 순간은 언제일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젊고 희망에 차 있을 20대와 30대가 가장 빛나는 시절이었여야 할 것 같은데, 그때는 그때 나름의 고민이 많아서 힘들었다. 스무 살에는 대학은 갈 수 있을까? 서른 살쯤에는 취직은 할 수 있을까? 그다음에는 결혼은 할 수 있을까? 등 그때그때 다르기는 했지만 막연히 불안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뒤돌아 보니까, 왜 막연한 미래를 고민하느라고 반짝이는 현재를 누리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꽃씨를 뿌리지 않았는데, 갑자기 꽃이 필수는 없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려면 미리 씨를 뿌려야 하고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끊임없이 신경 써 주어야 한다. 그런데 화사한 꽃이 피는 절정의 순간은 짧고 한순간에 지나가 버린다. 내가 즐겁게 누려야 할 시간은 꽃이 피는 순간만이 아니다. 봄에 씨를 뿌려서 새싹이 돋아 나고, 여름에 꽃이 피고 지고, 가을에 낙엽이 물들고, 결국 겨울이 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그 모든 시간들이다.


허버트 제임스 드레이퍼, 포푸리(1807)

글 : 이계원(공유경제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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