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내 인생에 책이 없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아마 안꼬 없는 찐빵보다 더 밋밋한 삶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50년 가까이 살아온 삶에서 가장 많이 시간을 보낸 것이 책을 읽는 시간이었다. 하루에 1~2권씩, 일 년이면 500권이 넘는 책을, 수십 년간 수만 권의 책을 읽어 왔다. 나를 키운 것은 부모님이셨지만, 나를 나답게 만들어 준 것은 책이었던 것 같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그 당시에는 국민학교라고 불리었다) 1~2학년 때는 내 밑의 어린 남동생의 장난을 피해, 집 옥상에서 조용히 책을 읽곤 했다. 옥상이 평평한 1층 양옥집이었는데, 옥상에 놓여 있던 큰 고무 다리이 속에 반쯤 숨어서 책을 읽었다. 장난꾸러기 동생의 방해를 피하긴 했지만, 그 대가로 옥상의 강한 햇살에 시력이 많이 나빠졌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쯤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어린이 사서를 했다. 그 당시 대통령의 모교란 이름으로 학교에 조그마한 도서관을 하나 지어 주었다. 그 원형의 작은 도서관에서 2~3년간 정말 열심히 책을 보았다. 오후에 학교 수업이 끝나면 해가 어둑어둑 해질 때까지 도서관에 남아 몇 시간이고 책을 읽곤 했다. 내 인생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을 되돌아보면, 나지막한 벽면 가득한 책장에 둘러싸여서 마룻바닥에 수북이 재미있는 책들을 쌓아 놓고 읽고 있었던 그 시절이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책을 열심히 읽은 대가로 시력을 많이 잃어 고도근시가 되었지만, 중학교 첫 시험에서 전교 1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하게 되었다.
중고등학교 때도 열심히 책을 읽었지만, 본격적인 독서의 폭을 넓힌 시기는 대학부터였다. 소도시의 작은 도서관만 보아온 나에게 서울대 도서관은 정말 책이 많았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요즘과 같은 온라인 검색시스템이 잘 되어 있지 않았다. 종이로 된 도서카드에서 원하는 책 청구기호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그냥 000대의 총류부터 시작해 철학, 종교, 사회과학, 자연과학, 기술과학, 예술, 언어, 문학, 900번대의 역사까지 도서관 서고를 계속 걸어 다니면서 재미있어 보이는 책들을 찾아다녔다. 책들이 너무 많은 것도 문제였다. 책이 별로 없으면 주로 베스트셀러나 유명한 책들로 채우게 되어 선택에 어려움이 별로 없다. 책이 너무 많으면 별의별 책들이 다 있어 책 선택이 쉽지 않다. 게다가 오래된 책들은 왜 그리 많은지 지나가다 보면 책 곰팡이 냄새가 났다.
나 자신이 책벌레이기는 했지만, 작은 좀 비슷한 진짜 책벌레가 나오는 낡은 책은 싫었다. 사실 나는 오래된 책보다는 새 책을 좋아했다. 그래서 신간 서적을 사러 교보문고 같은 큰 서점에 자주 갔다. 그 당시의 교보문고는 참 불편했다. 요즘 같은 북카페 분위기는 고사하고 편하게 앉아서 책 볼만한 의자도 제대로 없어서 빡빡한 책꽂이 사이에 아픈 다리를 기대고 서서 책을 읽거나, 그 조차도 힘들면 맨바닥에 주저앉아 책을 보았다. 자세가 불편해도 새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재미에 열심히 그 자리에서 책을 보았고, 다양한 종류의 책들을 한가득 사 오곤 했다.
내가 서점에서 책을 사는 것을 그만둔 계기는 이사였다. 서울에서 7년 정도 살았던 집에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작은 집에 책 나둘 공간이 마땅치가 않아 옥상의 창고 같은 곳에 본 책들을 박스에 넣어서 보관하고 있었다. 이사 가려고 보니까 책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동네 도서관에 기증하려고 했다. 처음에는 한 박스씩 열어서 남길 책과 보낼 책을 분류할 생각이었다. 몇 박스 열다 보니까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그냥 박스를 닫고 트럭을 한 대 불러서 박스채 실어 보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다시 필요해서 찾게 되는 책이 없었다. 그 다음부터는 책을 사지 않고 도서관에서 빌려 보게 되었다.
서른 넘어 회사에 들어가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게 되는 등 인생의 많은 변곡점을 지나왔다. 기쁘고 좋은 날도 많았지만, 지치고 힘든 날도 많았다. 나는 마음이 지치면, 도서관이나 서점에 갔다. 웬만큼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어도,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1~2시간 책을 읽고 있으면 어느 사이 기분이 풀리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곤 했다.
책이 내게 준 것은 커피처럼 따듯한 위안이었다. 내가 가진 삶의 고통이 커 보여도 다른 사람들이 겪은 삶에 비하면 안온하고 좋은 삶이었다. 한발 물러서 나를 객관적으로 보게 하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든 것이 지나간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또, 책은 실질적인 삶의 무기가 되어 주었다.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라는 책이 있는데, 내게는 책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상의 도구였고 무기였다. 어떤 새로운 일을 하거나 새로운 상황이 오면 책에서 답을 찾아 나갔다. 책은 경험의 보고였기 때문에, 어떤 문제이던지 좋은 답을 제시해 주었다. 회사에서 신사업을 기획할 때뿐만 아니라, 육아도 요리도 책에서 배웠다.
사실 나는 50대 언저리이기 때문에 노년이라기보다는 중년이다. 그런데 육체적이거나 심리적인 나이와는 별개로 노안이 진행되는 것이 느껴진다. 낮에는 어느 정도 보이지만, 밤이 되면 글자가 흐릿해지는 것이 책을 보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가끔 '내 인생에서 책이 없어지면 어떻게 살까?' 하는 걱정이 된다. 그 많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이며, 힘들거나 우울할 때 기분을 어떻게 전환할 것이며, 새로운 지식이 필요할 때 어떻게 얻을 것인가? 그런데, 요즘 보면 종이책만 고집하지 않으면 해결책이 있을 것 같다.
요즘은 오디오북을 옛날보다 많이 즐겨 듣고 있다. 옛날보다 다양한 오디오북이 나오고 있어, 듣고 있으면 편안하고 즐겁다. 그래서 낮에는 종이책을 읽고, 밤에는 눈을 감고 편안하게 누어서 오디오북이 안내하는 다양한 세상으로 여행을 떠난다. 꼭 오디오북이 아니더라도 글자 크기를 조절할 수 있는 전자책도 있다. 종이책도 좋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책의 종류는 점점 다양화해지고 있어, 오감을 이용한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사실 사람은 평생에 할 수 있는 경험이 한정되어 있다. 내가 가진 한정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삶을 체험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책이 있다면 비록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이 아니더라도, 전 세계 어디라도 어떤 시간이라도 간접 경험해 볼 수 있다. 요즘 민음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을 읽으면서 1권부터 순서대로 서평을 쓰고 있다. 세계문학전집에 나온 책들은 내가 어린 시절부터 청장년기를 거치면서 계속 읽어 왔던 책들이다. 그런데 어떤 책들은 내가 젊은 날 읽었던 그 책이 맞는가 싶을 만큼 내용이 기억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아마 책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내 이해의 폭이 달라진 것 같다. 책을 쓰는 것은 작가이지만, 책은 결국 독자에 의해서 이해되고 완성된다.
이제는 내가 책을 쓸 시간인 것 같다. 중국의 문인인 구양수는 글을 잘 쓰는 비결로 '다문, 다독, 다상량'이라고, 많이 듣고,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라고 하였다.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만 권의 책을 읽어 왔지만, 독자로서 책을 읽는 즐거움이 주였다. 이제는 내 속의 지식과 생각들을 정리해 글을 써야 하는 시간이 된 것 같다.
돌아보면 나를 나답게 만든 것은 8할은 책이었던 것 같다. 책에서 정보를 얻고, 책에서 위안을 얻고, 책에서 기쁨을 얻었다. 이제 작가로서 책의 유용과 기쁨을 세상에 돌려주어야 할 시간이 온 것 같다.
글 : 이계원(공유경제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