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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몽양 Nov 22. 2020

1. 임신 계획을 세우다

자궁근종과 임신의 상관관계

평소와 다름없이 의무적으로 받은 회사 건강검진에서 의외의 사실을 듣게 되었다. 내 자궁 안에 근종이 무려 5~6개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껏 큰 불편함 없이 살아온 나는 모르는 새에 내 몸속 여기저기 혹이 생겼다는 사실에 굉장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기관에 생긴 작은 혹들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의사 선생님은 원래 30대 여성에게 흔히 발생하는 것이 자궁근종이고, 굳이 수술할 필요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다만 임신을 준비할 생각이라면, 근종이 더 커지거나 확산되기 전에 아이를 갖는 게 좋겠다며 임신 계획을 확인했다. 


나와 남편은 결혼한 지 2년 가까이 되도록 아이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결혼 후 둘이 살게 되면서 연애 때와 다른 색다른 즐거움에 조금 더 자유롭고 싶었다. 금요일이면 퇴근 후 맛집을 돌아다녔고, 주말이면 여행을 떠났다. 둘이 함께 일하니 경제적으로 여유로웠고 자유로웠다. 둘이 사는 게 재미있어서 잠시 아이에 대한 계획을 보류해 놓자는 마음이 컸다. 병원을 나서면서, 그런데 이제 우리가 임신을 더는 미룰 수 없겠다는 생각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날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 바로 남편에게 물었다.


“우리도 아이를 가져야겠지?”

“그럼. 당연하지. 나는 나와 당신 닮은 아이를 꼭 보고 싶거든”

“요즘 같이 힘들기만 한 세상에 태어난다는 일이 행복한 건지 모르겠어. 어릴 때는 공부에 시달리고, 크면 취업에 시달리고, 회사 다니면 직장에 시달리는 삶이잖아”

“그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행복하지 않아? 나랑 사는 거 행복하지 않아?”

“그럼~행복하지”


남편의 말에 장난스레 웃으며 답했다. 

하지만 아이를 낳는 일에 대해 스스로 ‘왜’라는 질문을 해볼 때 타당한 이유를 대기가 조금 어려웠다. 특별한 이유 없이 엄마와 아빠가 나를 낳아 줬듯이 내가 나의 아이를 낳는 일도 당연히 해야 할 일처럼 느껴졌던 것 같기도 했다. 왠지 안 낳으면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아이를 갖는 일은 의문스러우면서, 당연한 과정이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우리 아이를 서둘러 갖는 게 좋을 것 같아”

“무슨 문제 있어?”

“자궁에 근종이 좀 많대. 크기가 커지면 나중에 임신이 더욱 어려워진다고 하더라. 아이를 낳을 생각이 있다면 현 상태에서 빨리 낳는 것이 좋겠다고 병원에서 얘기하더라고”

“어차피 올해는 가지려고 생각했으니까 시도해보자.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 마. 우린 건강하잖아”


남편과 임신을 결정한 뒤 바로 피임 없는 관계를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첫 달이 지나고 테스트기를 해봐도 소식이 없었다. 생각보다 임신이 쉽지 않다고 들었는데, 정말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알고 보니 임신에 성공하려면 ‘배란일’을 잘 맞추는 것이 중요했다. 


배란일은 난소에서 난자가 배출되는 날을 말한다. 난자는 배출된 직후 보통 12~24시간 정도 생존하는 데, 이 시기에 관계를 갖는다면 수정될 확률이 높아진다. 다만 정자의 생존기간이 평균 3일 정도 된다고 가정할 경우, 배란일 하루 이틀 전 관계를 갖는 것이 가장 성공 가능성이 크다. 이렇듯 나는 서른이 넘도록 배란일과 수정, 착상의 단계마저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막연히 피임을 안 하면 임신이 되는 건가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 임신은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음 달, 우리는 배란일에 맞춰 잘 관계를 가졌고 평소 생리주기가 굉장히 규칙적인 편인 나는 그 달 바로 임신에 성공했다. 친구들 통해 피임 없는 관계를 하더라도 당장 임신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화장실 앞에서 임신테스트기를 들고 얼마나 좋아했던 지 우리는 둘 다 건강해서 금방 임신이 되는 것 같다며 신나게 자축했다. 빨리 병원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너무 일찍 가봐야 확인할 수가 없다는 친구의 말에 꾹 참고 5주 차에 방문하기로 생각했다. 그때까지는 너무 이른 감이 있어 가장 친한 친구에게만 말을 하고 부모님에게도 비밀로 하고 있었다. 


기다리던 5주 차가 되자, 남편과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병원에 방문했다. 임신을 확인하러 왔다며 진료를 받았고 검은 초음파 화면 속 작은 아기집을 확인하게 되어 그날 임신확인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임신 극초기인 5주 차에는 질 초음파를 통해 자궁 내 자리 잡은 아기집만 보일 뿐 아직 ‘난황’과 ‘배아’ 모두 볼 수 없었다. 의사 선생님은 2주 뒤 방문하면 아기를 확인할 수 있을 것 이라며 안심시켜 주고는 첫 진료를 마쳤다. 


그런데 진료를 보고 나온 후에도 나의 불안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맘 카페를 통해 알아보니 임신 초기 아기에게 영양분을 준다는 동그란 도넛같이 생긴 ‘난황’을 먼저 봤다는 산모들이 많았는데, 아기집만 확인한 것이 너무 아쉬웠다. 그냥 첫 임신이라 너무 설레고, 걱정이 많은가 보다 생각하고 그날 집으로 돌아와 친정과 시댁 모두에 임신 사실을 알렸다. 


다들 얼마나 좋아하시던 지, 시아버님은 기뻐서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셨다. 아직 특별한 변화는 없던 터라 딱히 임신을 체감하기는 어려웠지만, 임신 확인 후 출근 날부터 그 전과 다른 책임감 같은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출근길 지하철 수많은 인파 속에서 내 아이를 지켜줘야 한다는 마음에 두 손으로 배를 감싸 안게 되었고, 평소 같았다면 열심히 뛰었을 상황에도 느긋하게 걸어 다녔다. 


임신 후 처음 느낀 점은 워킹맘의 고충이었다. 진료를 보고자 해도 산부인과는 평일과 달리 주말엔 예약이 안된다. 주말밖에 시간이 나지 않는 나는 무조건 2~3시간 대기해야 진료를 볼 수 있었다. 아직 임산부 배지도 없어 대중교통 전용 좌석에 앉기도 힘들었다. 회사는 6시에 끝나고 보건소도 6시에 끝나기 때문에 보건소에 배지를 받으러 갈 시간이 없었다. 결국 나는 임산부 친구가 받아 놓은 배지를 당분간 빌려 쓰기로 했다. 


그렇지만 임산부 배지가 있다고 해서 지하철에서 앉아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임산부 배려석은 항상 누군가 있기 때문에 운이 좋을 때나 앉아 갈 수 있었다. 한 번은 벽에 기대어 서 있는데 식은땀이 나고, 어지러움이 밀려와 잠시 중간에 내려 의자에 앉아 쉬었다 가야 했던 적도 있다. 어찌나 서러운 기분이 들던지 우리 아가가 나에게 오느라 고생이 많구나 생각에 집으로 걸어가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임신 극초기는 회사에 알리기도 애매한 시점이라, 배려를 받지 못하고 있었고 전쟁터 같은 사무실에서 하루를 보내는 일은 정말 쉽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주는 직장 상사를 보며, 숨 막히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 나는 우리 아이가 이런 환경에서 자라야 한다는 사실이 슬프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발 디딜 틈 없이 꽉 찬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있다 보면 아이를 낳는 게 과연 누구를 위한 일인지 헷갈렸다. 출산이 과연 아이를 위한 건지, 나를 위한 건지 고민되면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 시기쯤, 왜 내가 아이를 낳기로 했던 건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단순히 내 몸 안에 자궁근종이 자라고 있기 때문에 나중에 아기를 못 낳을 까 봐 낳는 거라면 아기에게 미안한 일이 아닐까. 그런데 남편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 임산부가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면 핀잔을 주기 일쑤였다. 항상 긍정적인 생각만 해야 한다며 이상한 생각은 넣어두라고 조언해 줬다. 우리에게 아이가 생기면 행복한 일들만 가득할 것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삶이 힘들고, 우리 아이가 살아갈 세상도 다를 것 같지 않은 데 뭣 하러 아이를 가지려 하는 건지 자꾸만 의문이 들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힘들고 우울한 생각들로 가득 찬 2주를 보냈다. 내 아이가 이렇게 치열한 세상 속에 왜 나를 낳았냐고 물어보면 어떡하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다음 진료를 보러 가기로 예약해놓은 날, 나는 다시 남편과 함께 병원에 방문했다. 임신 7주 차, 진료를 시작한 의사 선생님의 얼굴이 점점 굳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순간 뭔가 심상치 않은 조짐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렇게 뚫어져라 초음파 기계만 바라보던 선생님은 내게 ‘고사난자’가 의심된다고 진단을 내렸다. 


“고사난자가 뭔가요?”

“고사난자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어떠한 원인으로 임신은 되었지만 태아가 생기지 않는 거예요. 혹은 생겼다가 유전자적 결함으로 사라졌을 수도 있겠죠. 이런 경우 보통은 수술을 해서 아기집을 제거해야 해요”

“아직 7주라…그런 게 아닐까요? 아이가 갑자기 보일 가능성은 없나요?”

“보통 7주면 난황이라도 보여야 하는데, 지금 보시다시피 아기집이 텅 비어있어요. 아기집 크기는 계속 커지고 있어서 수술을 하셔야 할 듯하네요”


선생님 말 그대로였다. 초음파 모니터에서 보이는 나의 아기집은 검은 공간으로 꽉 찬 빈집이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임신은 되었지만,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나는 아마도 수술을 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상황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왜 이런 일이 저에게 생긴 걸까요?”

“산모나 남편 분에게 문제가 있기보다는 유전자 결함이 있었을 확률이 크고, 사실 정확한 원인을 알기는 어려워요. 보통 초산의 경우, 자주 발생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지금은 힘드시겠지만,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수술 마치면 금방 다시 임신할 수 있어요”


선생님은 1주일의 경과를 본 후 수술을 하자고 했다. 그날 바로 7일 뒤 주말로 수술 날짜를 잡았고, 당일 재 확인 후 변동 없으면 바로 수술을 하게 되는 일정이었다. 진료실 문을 닫고 나와 잠시 대기실에 있는 산모들 얼굴을 쭉 바라보며 앉았다. 각기 다른 표정이지만, 행복하고 설레는 얼굴들이었다. 그런데 나는 가까스로 터질 것 같은 울음을 참고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곳의 산모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중한 아이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지만, 누군가는 떠나보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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