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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록 Jul 21. 2022

17.  끝인 줄 알았던 인연

끝이란 게 있기는 할까

나는 집에서는 하루 종일 화장실도 가지 않았다. 혹시 오며 가며 누군가와 마주칠까봐 방에만 있다가 다들 각자 방으로 자러 들어가는 시각에 나와서 볼일을 보거나 씻곤 했다. 제대로 먹지도 않으니 별 불편함은 없었다.

그러다 드디어 두어 달 만에 방 문을 열고 나갔다. 여느 평범한 오후, 방문을 열면 보이는 나선형 계단을 한 발 한 발 내려갔다. 시끌시끌하게 오가던 대화가 순식간에 멈춰지고 모든 시선이 나로 향했다. 1초, 2초, 짧지만 긴 것 같은 시간이 흘렀고 그 적막 끝에 찰리가 여느 때보다 쾌활하게 물었다.


“Want some coke?!” (콜라 마실래?!)


“…끄덕끄덕...”


“All drinks are here. Anything in the house is yours. Not the booze, of course.” (음료수는 다 여기 있어. 집에 있는 건 다 먹어도 돼. 술은 안되고, 당연히.)


나는 뚱뚱한 콜라 한 캔을 받아 들고 소파 한 켠으로 갔다. 서로가 앞다투어 할 이야기가 있다는 듯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는 이 집의 분위기에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기분 좋은 어색함이었다. 어쩌면 그때의 감정은 설렘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하교 후의 시간이 흐르다 보면 모든 대화의 끝은 항상 같았다.


“So what do you want for dinner?” (그래서 저녁으로 뭐 먹고 싶은데?)


너무나도 평범하고 일상적이지만 먹고사는 것은 세계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중요한 의미가 있었나 보다. 이 가족에게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진지한 질문이었다. 다들 연구주제를 받은 듯이 심각하게 고민을 했고 누군가가 피자! 를 외쳤고 다들 가벼운 마음으로 준비를 시작했다.


엘렌은 언제나 요리를 직접 했는데, 몇 달에 한번 정도는 금요일이나 주말에 간단한 피자, 중국음식 등을 먹기도 했다. 가끔 맥도널드나 초밥집, 중국집 등에서 외식을 할 때도 있었지만 배달 피자만큼은 잘 먹지 않았다. 피자를 먹는다고 하면, 이 집에서는 각자 냉동피자를 하나씩 맡아서 그 위에 원하는 토핑을 직접 올린 뒤 오븐에 구워서 먹는 것이었다. 세상에, 피자를 먹을 때조차도 개성을 존중해준다니.


피자를 먹으면서도 이야기는 끝이 나질 않았다. 누가 주제를 던져주는 것도 아닌데 한 명이 시작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What d’you think?” (네 생각은 어때?) 질문이 계속 오갔다. 일상적인 대화는 줄곳 문화, 역사, 정치 등으로 뻗어나가 때로는 말다툼으로 번지기도 했다. 특히 중국 출신인 모니카는 (엘렌 말에 따르면) 자국의 역사를 왜곡되게 배운 부분이 있어서 얼굴이 붉어지도록 말다툼이 오갈 때도 있었다.


일상적인 것이 일상일 수 없었던 이전의 생활과는 달리 평범한 가족의 모습을 갖춘 집. 모두가 다그치지 않고 기다려준 결과로 끝끝내 전달되지 않을 것 같았던 내 마음의 소리는 두꺼운 벽을 뚫고 나왔다. 체중이 급격하게 줄었던 당시부터 생긴 이유 없는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도 하루에도 몇 번씩 나타나곤 했었는데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주말이 되면 나는 동생을 만나러 갔다. 전도사님 댁까지는 차마 가지 못했고 동생이 버스를 타고 씨티(시내)로 나오거나 근처 쇼핑몰에서 만나 같이 밥을 먹고 필요한 것을 사서 손에 들려 보냈다. 엄마는 여전히 내게 따뜻하게 말하는 법이 없었다. 일찍 일찍 들어가라, 아무나 만나지 마라, 공부 열심히 해라, 너는 거기 놀러 간 게 아니다 등등 노파심에 하는 잔소리 밑바닥엔 엄마와 동생을 버리고 간, 이기적인 딸이라는 전제가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엄마가 동생도 홈스테이를 옮기게 됐다고 했다. 동생은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는데, 호주에 와서도 한국인 피아노 선생님에게 수업을 받고 있었다(그래야 엄마가 직접 피드백을 받을 수 있어서). 전도사님과 얽힌 모든 이야기를 들은 피아노 선생님께서 혼자 남은 동생의 상황이 안타까우셨는지 본인이 데려가서 돌보겠다고 제안했던 모양이었다.


직접 만나보기도 했고, 음악가인 엄마 본인이 직접 고른 선생님에 대한 신뢰는 생각보다 두터웠고 동생은 피아노 선생님 댁으로 옮기게 되었다. 피아노 선생님도 기러기 부부로 혼자서 초등학생 남매 두 명을 키우는 상황이었는데, 다 큰 성인들만 사는 집보다는 또래가 있어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 안타깝게도 내 나이도 마지노선이었던 엘렌&찰리의 집에서는 동생을 받아줄 수가 없었고 무엇보다 엄마는 아직 동생을 호주 홈스테이에 맡길 준비가 안되어있었다.


그렇게 전도사님과의 인연은 끝이 났다. 아니, 나는 그게 끝이길 바랬다.


그런데 동생이 집을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전도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여보세..."


야!!!!! 죽고 싶어서 환장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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