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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의 윤슬 Jun 12. 2024

수희 (상)




"하룻밤에 너무 많은 꿈을 꿔서 어디까지가 좋은 꿈이고 어디까지가 나쁜 꿈인지 구분이 안 가."

어깨 위로 흘러내리는 까만 머리카락을 가늘고 긴 손가락이 쓸어 올린다.

"하루는 너무 길고 한 달은 너무 짧지."

텅 빈 거리를 바라보는 쌍꺼풀 없는 커다란 두 눈. 옅고 가는 눈썹 사이를 나른하게 찌푸린다.

"일 년은 말이 안 되게 순식간이고."

하얀 얼굴과 도톰한 입술, 그 입술을 더 돋보이게 칠한 붉은 립스틱.

얽매이는 걸 싫어해 화장에 무심한 그녀였지만 입술만은 붉게 칠했다. 붉게 도드라진 입술 탓에 얼굴이 창백해 보인다는 말을 듣고나서부터다. 기분과 상황에 따라 옷차림이 바뀌었지만 입술은 언제나 붉은 계열로 칠했다. 조금씩 다른 그 붉은색들을 그녀는 '어쩔 건데' 색으로 통칭했다.

"작년이 벌써 작년이라니."

쪽 어깨를 드러낸 까만 오프숄더 셔츠. 허리가 밴드로 마감된 헐렁한 회색바지. 손목엔 미키마우스 그림이 있는 노란색 시계를, 발엔 파인 그린과 바시티 메이즈가 조합된 덩크 로우를 착용하고 있었다. '브라질'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신발이다.

귀고리는 물론 반지하나 끼지 않은 모습이 눈처럼 하얀 피부와 어우러져 중성미와 관능미를 동시에 풍겼다.

멋을 부린 듯도 아닌 듯도 하다. 규칙이 있는 듯도 내키는 대로 입은 듯도 하다. 남 시선을 의식하는 듯도 멋대로 판단하라고 말하는 듯도 하다. 하지만 졸린 얼굴로 하품하며 집어 입은듯한 옷차림도 근사하게 느끼도록 하는 재능이 그녀에겐 있었다. 필요한 만큼은 반드시 투덜대는 태도도, 느닷없이 들여다보는 시선도, 경계를 해제한 채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시선을 확 끄는 타입은 아니지만 한 번이라도 대면했던 사람이라면 반드시 마음속에 떠올리도록 하는 마력을 간직했다. 한때는 그게 과연 뭘까, 고민해보기도 했지만(나 역시 그랬으므로) 이제와선 그런 감정은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붉은 입술, 하얀 피부, 쌍꺼풀 없는 커다란 두 눈처럼 그런 마력 역시 그녀를 구성하는 특징 중 하나라고 여기면 마음이 편하다.

"지루하지만 착실하게 쌓아가는 하루하루네."

"하는 것도 없이 짧게 짧게 쌓아가는 한 달 한 달이지."  쓸어 넘기던 머리카락을 부스스하게 흐트러뜨리는 그녀.

"돌아보면 순식간에 무너지고 흩어져버리는 일 년 일 년이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한다.

본격적인 여름이 다가와 해가 길어졌음에도 초저녁 하늘이 어둡다. 금방이라도 소나기를 쏟아낼 듯 구름이 두텁다. 묵직한 공기가 몇 블록 떨어진 바다에서 흘러온 해무와 섞여 들었다. 물속에 잠겨 있는 기분이다.

"여전히 그 바보 같은 술을 마시네."

내가 마시는 술은 고량주에 탄산수를 섞고 레몬으로 가니시해 상큼한 향을 증폭시킨, 이 펍을 대표하는 인기메뉴였지만 그녀는 언제나 이 녀석을 '그 바보 같은 술'로 칭했다.

"나의 순결한 연태구냥에 설탕물을 섞다니, 야만도 정도껏이지."

 나는 빙그레 웃는다.

"맛있잖아."

쩝.

입맛을 다신 그녀는 고개를 낮추더니 "자기야, 일루 와봐요."라며 손짓했다.

"꿀벌이"

그녀는 말했다.

"꿀벌이 꽃 속에서 꽃가루 목욕하는 것 같아 자길 보면."

쩝.

이번엔 내가 입맛을 다신다.

"아무리 마셔도 안 취한단 말이지, 맛있는 술이건 맛없는 술이건. 어차피 취하지도 않을 거면 바보 같은 술을 마시고 있는 게 나아."

붕어를 관찰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던 그녀는 어항대신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있지, 자기가 싫어하는 걸 하나하나 걸러내고 좋아하는 것만 남겨두는 심플한 삶은 좋은 거야, 그렇지?"

내 삶은 그렇게 심플하지 않다고 말하려다 나는 "... 그렇지"라고 답한다.

"뭘 싫어하는지 분명히 아니까 선택이 쉬워지고 삶이 간단하고 분명해지는 거지, 꽃가루를 찾아가는 꿀벌처럼.

저기 꽃이 있다. 꽃을 향해 날아가자. 꽃은 달달하니까.

저기 커피가 있다. 커피를 향해서는 날아가지 말자. 커피는 쓰니까.

이 간단하고 분명한 원칙 덕에 꿀벌은 토실토실한 엉덩이에 꽃가루를 잔뜩 묻힌 채 행복하게 살아갈 거야. 쓸데없는 호기심 때문에 커피잔에 빠져 죽지 않고 말이야, 그렇지?"

내 삶은 그렇게 심플하지 않다고 말하려다 나는 "... 그렇지"라고 답한다.

"그게 부러워 나는. 그렇지 못할 때가 많거든 나는."

그녀는 왼손과 오른손을 탁자 위에 올려두고 번갈아 내려다본다.

"싫어하는 걸 분명히 알고 있어도 나는 그걸 반복해. 반대방향으로 가야 좋아질 거라는 걸 잘 알면서도 그쪽으로 날아가질 못해."

참 이상하지... 그녀에게 들리지 않게 중얼거린다.

"참 이상하지..."

한숨 같은 말이 '어쩔 건데' 색으로 물든 입술에서 흘러나온다.


KTX역과 무역항.

시와 외지를 이어주는 관문이 두 개나 있음에도 '송정'은 유력지의 지위를 잃고 구도심이 되었다.

해가 지면 흐릿하게 유지되던 활기마저 잃고 거리엔 외국인 몇몇과 그들을 상대하는 술집만 불을 밝혔다. 좋은 목을 차지했던 한글 간판은 차츰 줄어들고 <내국인 출입금지> 경고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색이 바래 조도가 낮아진 러시아어 간판 아래로 차들만 무심히 지나다녔다. 기차나 무역선을 타고 도착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송정은 목적지가 아니라 지나치는 곳이었다.

차이니즈 펍 <수희>를 처음 발견했을 때 나는 고요한 논길 한가운데에 버티고 앉아 우렁차게 울어대는 개구리를 대면한 듯한 인상을 받았다.

블록 하나가 통째로 불이 꺼진 어두운 거리 한가운데를 수희는 천연덕스레 차지하고 있었다.

떡하니 <수희>라고 적어 놓은 한글 간판과 적막한 거리를 홀로 빛내는 싱싱한 조명은 이세계로 향하는 작은 문이라도 발견한 듯 묘한 감동마저 불러일으켰다.

다가오지도 도망가지도 않는 커다란 고양이도, 좁은 화장실도, 축축한 거리마저 친근했다. 처음 발견했던 그날부터 나는 이곳, 수희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지겨워 죽겠어. 이번에도 판박이처럼 똑같아. 어디 매뉴얼 같은 게 있어서 그대로 따라 하지 않으면 현관문을 벌컥 열고 호랑이가 들이닥치기라도 하나 봐. '저, 이런 식은 싫어', '좀 더 진지해지고 싶어', '날 중요하게 대해 줘' 아이구 진짜!"

그녀는 양 손바닥을 탁. 하고 부딪쳤다.

"웃기지도 않아. 목소리를 잔뜩 깔고 저런 소리들을 해. 운명의 상대라도 되는 줄 아는 걸까. 술 마시다 심심해서 말 걸어온 여자가?"

나는 잠자코 이어지는 말을 들었다.

"과정이랄 것도 없어. 테이블로 걸어가서 말을 걸고 이야기를 나누고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들고 재밌는 사람이다 싶으면 연락처를 주고받고 또 만났는데 저번에 내가 너무 취했나? 오늘 보니까 재미없는 사람이었네 싶으면 슬그머니 연락처를 지우려다가 아니야 생각해 보니 저번엔 내 컨디션이 별로였어 그래서 다시 만나보니 역시나 재밌는 사람이 맞았구나 그럼 이야기를 나누고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들고."

나는 잠자코 이어지는 말을 들었다.

"지겨워. 일상이 지겨워서 하는 행동조차 지겨워졌어. 무해해 보여 말을 건 사람들도 몇 번만 만나면 태도가 달라져. 내가 먼저 말을 걸었으니 멋대로 굴어도 된다고 여기는 거지. 김이 삐이이이 빠진다니까. 그러다 상황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거만한 눈으로 말하는 거야. '너 좀 이상한 것 같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라던가 전화기에 '나 보자는 사람 많아', '여자들 많은 술집이나 가야겠다' 따위의 메시지를 남기는 거지. 여기까진 다 똑같아.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답장 안 하면 다양한 반응이 돌아와. 술에 잔뜩 취해서 전화한다던가 무턱대고 집 앞에 찾아온다던가 횡설수설하는 문자메시지를 보낸다던가 하면서. 하지만 내용은 같아. 자기한테 이러면 안 된다는 거지. 뭘 이러면 안 된다는 걸까? 누가 말 걸었다는 사실이 특별한 대접을 받을 업적이라도 되는 거야? 난 말이지, 그런 식으로 시작한 관계가 진지하게 발전할 거라고 생각하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돼. 저기요, 제가 좀 심심해서 그러는데 그쪽 테이블에서 같이 놀아도 될까요? 얼마가 나오든 제가 절반을 낼게요. 이렇게 시작하는 관계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로 가는 거야 대체. 뭐, 인정은 해. 이건 내 입장일 뿐이고 상대방은 오해할 수도 있다는 거. 그치만 반대로 생각해 봐. 남자들은 여자한테 말 걸 때, 거기 있는 여자들 '아, 마침내 이날이 왔구나. 아직은 혼자가 좋지만 이젠 어쩔 수 없겠지.' 하는 마음으로 합석을 수락할 거라고 생각해? 좋아, 세상은 넓어.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넓어도 술집에서 말 걸어놓고 왜 진지하게 대하지 않냐고 따지는 경우는 없다구. 있지, 나는 그렇게 알게 된 사람들과 연락할 때 직간접적으로 끝없이 표현해. 나는 이 관계에 무게를 더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고. 태도를 글자로 치환할 수 있다면 내 글자는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새긴 고딕체일걸? 내 테이블에서 그 테이블로 걸어갔던 몇 걸음. 고작 몇 걸음에 의미를 부여해서 누구는 좌절하고 누구는 분노하는 거야. 세상이 어쩌다 이 모양이 되어버렸을까. 어쨌거나 문제는."

그녀는 손을 들어 주인을 불렀다.

"여기 한병 더 주시고요 자기는? 계속 '그거' 마실 거야?"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이 사람은 '이거' 하나 더 주세요"라고 말했다.

이 술을 얼마나 싫어하길래 이름조차 불러주지 않는 걸까. 내 일행 때문에 이름을 상실한 내 술에게 측은한 감정이 들었다.

"어디까지 했었지?"

"어쨌거나 문제는."

"어쨌거나 문제는, 내가 그걸 반복한다는 거야."

그녀는 새로 도착한 술을 잔에 가득 따른 뒤 깨끗하게 비웠다.

"일이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반복해 나는. 정말 한심해 죽겠다니까. 테이블로 걸어가서 같이 놀고 연락처를 주고받고 어쩌고 저쩌고 웃고 떠들고 블라블라 연락처를 지워버리고 어쩌고 저쩌고 그러다 갑자기 자길 갖고 놀았냐느니, 너 원래 이런 여자냐느니 블라블라블라블라. 그런저런 소리를 듣다 말고 만사가 귀찮아지면 '너에게 말을 걸었던 건 맞지만'이라는 '사실' 뒤에 버티고 있는 '딱히 너라서 말을 건건 아니다'라는 '진실'을 알려주는 거지. 그럼 이놈도 펑 저놈도 펑 여기저기서 펑펑 터져나가는 거야. 폭죽처럼. 걔들한텐 미안하지만 축제 때 터뜨리는 폭죽 맞아. 머리 아픈 일들이 한방에 해결되거든."

그녀는 빈 잔을 손에 들고 빙글빙글 돌린다.

"그리고 한동안 고요해지는 거야. 바람 한 모금 불지 않는 들판에 누워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듯. 평화롭고 행복하지."

빈 잔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느릿느릿 채운다.

"평화롭고 평화롭고 평화롭고 행복하고 행복하고 행복하지..."

가득 채운 잔을 멍하니 바라본다.

"그러다 마침내 지겨워지고."

스피커에서 밴드 혁오의 Paul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후렴구를 흥얼흥얼 따라 부르며 그녀는 술잔 테두리를 집게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의미 없이 반복되는 거야. 말을 걸고, 귀찮아지고, 폭죽을 터뜨리고, 자기혐오에 빠지고."  

"의미도 없는데 왜 반복해."

"지겨워서." 그녀는 눈을 들어 나를 보고 눈을 내려 술잔을 보았다. "지겨워서..."

처음 듣는 순간 단숨에 매료되었음에도 가사를 찾아보지 않는 곡들이 있다. 완성한 이야기가 아니라 모호한 느낌으로 간직하고 싶기 때문이다. 감정, 인상, 색감, 온도.

Paul은 공기를 가득 채워 내 피부를 물들이는 느낌이었다. 생각이 흩어지는 자리  며드는 노래였다. 가사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 관계가 수치심과 후회만 남긴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걸 반복해. 나는 왜 이모양이지? 대체 어디가 고장 난 걸까?"

처음 Pual을 들었었던 곳이 수희였기 때문에, 나는 다른 곳에서 Paul을 들을 때도 수희를 떠올렸다.

"결국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이놈을 만나기 전에도 알았고, 저놈을 만나기 전에도 알았고, 그놈을 만나기 전에도 알았어. 결국 이렇게 되어 자기혐오에 봉착하리라는 걸. 정말 한심하다니까. 이놈도 저놈도 싫어서 혼자서만 지내다 어느 순간이 되면 만사가 지겨워져서 '그래, 아무렴 어떠냐. 이래도 지겹고 저래도 지겨운 건 마찬가지인 걸'이라며 누군가에게 말을 걸겠지. 그 말을 할 때 내 앞에 누가 앉아 있을지 짐작도 안 가지만 틀림없이 그럴 거야. 난 그렇게 살도록 설계되어 있으니까."

술잔을 보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나는 다른 곳을 보는 그녀를 보는 걸 좋아했다. 정교하게 조형된 오브제를 보는 듯도 했고 멋대로 가지를 뻗친 나무를 보는 듯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나를 바라보면 나는 다른 곳을 바라봤다. 다른 곳을 보는 나를 보며 그녀는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했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속 편하게 대충 지내는 관계만 원하는데도 늘 일이 멋대로 흘러가."

이 사람도 언젠간 주변인에게 '나이 든 사람'으로 특정될 날이 올까.

"특징도 개성도 없어서 '아, 이 사람이라면 진전도 퇴보도 없이 딱 등속의 관계를 가질 수 있겠구나' 싶어서 말을 걸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지."

나는 우아하면서도 편안한 옷을 입은 할머니가 '브라질'을 신고 미키마우스 시계를 손목에 감은 채 툇마루에 앉아 담배 피우는 뒷모습을 상상했다. 이 세상에 평화라는 게 있다면 그런 모습이 아닐까.

"잘난 척하는 건 아냐. 특징도 개성도 없는 줄 알았던 인간에게 푹 빠져버리는 바람에 처참하게 버림받은 적도 있으니까. 그리고 네 번째 양은 초록색이야. 저기, 자기야."

그녀는 집게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응."

"내 말 듣고 있어?"

"응."

"두 번째 양이 무슨 색이지?"

"두 번째는 모르겠고 네 번째 양은 초록색이야."

흠.

그녀는 입술을 오므리고 찡그렸다.

"신기하단 말이야."

팔짱을 끼고 소파에 몸을 묻으며 그녀는 말했다.

"자기는 내 손짓 눈빛 기분 옷차림 컨디션까지 세세하게 파악해. 행동이나 호흡 같은 걸 보면 알 수 있거든. 이 사람이 평소와 다른 헤어스타일에 감탄하고 있구나. 내 신발을 보는 시간이 잦네. 내 손톱에 머무는 시선이 기네. 그러는 동시에 철저하게 무심해. 내 말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아. 다리를 훤히 드러낸 치마는 거들떠도 안 봐. 자길 만날 때만 입는 셔츠에 대해선 관심도 없어. 그토록 유심히 보던 팔찌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대체 어쩌면 그럴 수가 있어?"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 나는 잠자코 있었다.

"앞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집중하는 동시에 무관심해. 어떻게 그러는 거야? 날 보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데를 보며 신경은 나한테 쏟는 거잖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시각 정보와 연산 정보를 어긋나게 하는 거지. 널 보면서 너에게 집중하면 사랑에 빠지니까."

"나한텐 그런 수작 안 통해. 말 돌리고 싶을 때 하는 소리잖아."

"예리하긴." 나는 웃었다. "처음 하는 얘기가 아니잖아."

그녀는 눈을 내려 술잔을 바라봤다. "그렇긴 하지."

"진짜 하고 싶은 얘기가 따로 있을 때 하는 얘기. 지금 하는 얘기, 적어도 두 번은 들었어."

"세 번." 그녀가 말했다.

"세 번이야. 자기 고물 차 폐차하던 날, 십오 년 넘게 살던 동네에서 이사하던 날, 그리고 사월이가 죽었던 날."

데려왔을 때가 4월이라 지은 이름이었다. 화장실 앞에서 낑낑 소리 내다 문을 열어주면 안에 들어가 자기 머리통만 한 똥을 누는 녀석이었다. 하루종일 뛰어다니다 내키면 아무 곳에나 드러누워 코를 골며 잠들었었다. 잠자면서도 뛰는 시늉을 할 정도로 기운이 넘쳤음에도 목욕할 때는 젖은 수건으로 변신하는 재주도 가졌었다. 나는 사월이가 죽어버린 이후 두 번 다시 동물을 키우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그녀는 손을 뻗어 내 '바보 같은 술'을 가져가 한 모금 마시고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맛있단 말이야... 그래서 더 용서를 못하겠어."

그녀는 그 '세 번'이 올 때마다 내 앞에 앉아 흘러왔다 흘러가는 만남과 이별 이야기를 했었다. 그 행동에 깃든 의미를 나는 사랑하면서도 무관심했다. 오늘처럼.

"한잔 시켜줄까?"

내가 물었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닫아놓은 유리문 앞을 고양이가 지키고 있었다. 어두운 갈색과 흐릿한 흰색이 제멋대로 섞인 녀석이었다. 고양이는 빛이 가득한 가게를 등지고 앉아 차 한 대 지나가지 않는 어두운 밤거리를 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자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고양이라는 생명체는 궁둥이를 보여주는 행동으로도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 수가 있구나, 나는 탄복했다.

"헤어졌다며, 어떻게 된 거야?"

배려를 가득 담은, 사무적인 말투였다.

스피커에서 윤숭의 Sumner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처럼 들리는 노래는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을 충동하기도 한다. 나는 Sumner를 처음 듣던 날 차오르는 안개와 밀려오는 파도에 대한, 누군가에게 보여줄 일도 없는 시를 썼었다.

"똑같. 나 역시 반복되는 패턴."

"안타깝네." 그녀는 말했다. "정착하고 싶어 한다는 말이 들리길래 어떤 여자인지 궁금했는데."

고양이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킁킁 냄새 맡는 시늉을 하더니 어디론가 어슬렁 사라졌다. 나는 손을 들어 양하대곡을 한 병 주문했다.

"많이 마시지 마."

"남길 거야. 내 건강을 걱정하는 건 아니겠지만."

"취하고 싶으면 그 술 마시잖아. 자기 취하는 거 싫어."

"나한텐 그런 수작 안 통해. 이 술 냄새 싫어서 그러는 거잖아."

"예리하긴." 그녀는 웃었다. "누가 와서 뺨을 때리는 것 같아, 그 술 냄새."

"확실히 그렇지." 나도 그녀를 보며 웃었다.

Sumner가 끝난 뒤 Glen Hansard의 Say It To Me Now가 흘러갔다. 일레인의 Running Time과 양동근의 거울이 흘러가고 Jennel Garcia가 커버한 버전의 Torn, 윤아의 바람이 불면이 흘러갔다. 인사를 하듯 나는 한곡이 끝날 때마다 한잔을 마셨다.

위기감이 들 정도로 도수가 높은 술은 잠시 동안 각성효과를 주기도 한다. 어디로 향하는 각성인지는 모르겠다. 흘러나오는 노래가 느려지고 가사 한 자 한 자가 눈에 보이듯 선명하게 들렸다. 멜로디가 호흡에 스며들었다. 노래하는 이 너머로 곡을 만든 이의 심정마저 느낄 수 있었다. 마법 같은 순간이 나를 휘감은 뒤 여운을 남기며 천천히 사라졌다.

Max Richter의 On the Nature of Daylight가 끝났을 때 남기겠다고 했던 양하대곡이 바닥을 드러냈다. 그녀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불평하지는 않았다. 취하고 싶은데 그마저도 잘 안 되는 날이 있다.

"어떻게 된 건데."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손톱으로 눈썹 끝을 갉작거렸다.

"나는 만나는 그 순간부터 이별을 생각해. 이 멋진 사람이랑 헤어진다면 어떤 식이겠구나. 이 매력적인 사람이랑 헤어진다면 어떤 모습이겠구나, 하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꾹 다문 볼 안쪽을 혀끝으로 더듬었다.

"그런 예상은 마음 깊은 곳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다가 어느 날 실현되는 거지. 딱 내가 생각했던 그 모습 그대로. 그 생각 때문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어. 그냥... 만나다 보면 그렇게 되더라고. 이 사람하고는 얼마쯤 만나다가 어떤 형태로 헤어지겠네, 같은 게 대충 보여. 저주받은 재능이야."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고 또박또박 말했다.

"자기랑 있으면 왜 좋은 줄 알아? 이렇게 지루한 세상에서 주변 물살과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헤엄치는 물고기를 보는 것만 같아. 위안이 된달까. 위로가 된달까. 사람을 기분 좋게 해 준단 말이야. 하지만 그런 '어긋난' 분위기는 혼란도 불러일으켜. 나처럼 자길 좋아하는 사람에게조차.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이제 수영 같은 건 지겨워' 하고는 훌쩍 떠날 것 같거든. 있지, 만나는 순간부터 이별을 생각하는 태도는 저주도 재능도 뭣도 아니야. 비겁함이지. 상처받는 게 겁나서 벽을 세워둔 채 사람을 만나는 거니까. 우리 처음 만났던 날 기억해?"

"기억해."

"잊을 수가 없는 날이었지."

잊을 수가 없는 날이었다.







수희 (하)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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