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심장 <사회학적 파상력>
꿈에 대해서, 무너져버린 꿈에 대해서, 마음에 대해서, 부서져버린 마음에 대해서, 아픔에 대해서, 크게 도려내어진 아픔에 대해서, 사회학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을까요? 사회학은 그런 사적인 것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라고요? 아니오, 그 시대의 헐벗은 파편들 속에서 실낱같은 미래를, 씨앗 같은 빛을 발견해내는 데에서 학문의 새로운 소명을 찾으려는 기이한 사회학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 책의 저자처럼요.
“태어날 사람들에 대한 아름다운 희망이 불가능해질 때, 인간은 과연 무엇을 위해 살 수 있을까?” 너무 많은 비극들 속에서 겨우 남은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어쨌든 살아내야 하고, 사회학자로서 어쨌든 직시해야 한다면, 통감의 능력으로 그렇게 물어야 한다고 저자는 제안합니다. 논리로 무장한 이성이 아닌, 고통으로 깨져서 새로이 열리는 마음에 어쩌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정치적 힘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몽상가라고요? 그런데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사회는, 상식은, 세계는, 모든 삶의 방식의 기원에는 꿈과 마음이 있는 것 아닌가요? 저자는 베버의 행위이론을 언급하며, 역사상 가장 냉정해 보이는 자본주의 체제조차 경제적 이해관계를 향한 욕망이 아닌 “종교적 구원을 향한 강렬한 꿈과 그로부터 발생한 독특한 실천양식들”로 지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시대가 처한 꿈과 희망의 불평등,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상상력과 그 상상을 실천할 수 있는 마음의 불평등이야말로 가장 처참한 파국이라고요. 그러니까 “꿈을 생산하지 못하는 사회가 어떤 의미에서 사회라 불릴 수 있는가?”라고 우리, 살아남은 인간들은 묻고 또 물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핵문명은 우리로부터 시간을 앗아간다. 우리에게 시간은 증여되지 않는다. 시간이 없다. 시간이 없어지고 있다. 시간의 정체가 모호해지고 있다. 살고, 사랑하고, 희망하고, 계획하는 인간적 시간이, 물질의 해독과 정화에 걸리는 천문학적 시간 속으로 녹아 사라지고 있다. 장구한 시간 동안 변함없이 푸를 것으로 상상되는 하늘, 숲, 바다를 주재하는 자연의 영원성에 대한 기대의 자명성 또한 소실되고 있다. 현 상태의 세계와 소위 종말 이후로 상상되는 세계의 풍경 사이가 급박하게 좁아지고 있다는, 불길한 감각이 부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던져지는 가장 중대한 질문은 ‘최종 파국의 도래를 저지할 수 있는 시간을 우리가 창출할 수 있는가’이다. 문제가 성숙하여 처리할 수 없는 지경으로 가는 시간보다 더 빨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시간이 우리에게 있는가?(42)
희망이라는 것이 빛의 형태를 띤다면, 그것은 태양광이나 샹들리에의 불빛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눈을 멀게 하는 빛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반딧불 같은 불빛일 것이다. 그것은 어둠이 있어야만 태어날 수 있는 빛이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빛이다. 허망하고 덧없는 빛. 세상을 바꿀 수 없을 것 같은 빛. 밤의 빛. 우리가 희망 속에서 희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천국인가? 혁명인가? 이 세계의 전변인가? 아니다. 우리가 희망 속에서 희망하는 것은, 어둠 속에서 희망하는 것은, 빛이 있다는 사실의, 마음으로부터의 확인이다. 희망은 (사태가 아니라) 희망을 희망한다. 거기에 희망의 미스터리가 있다. 빛이 저기에, 그저 나타나서 춤춘다는 사실, 빛이라는 것을 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 빛은 망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 작은 순간의 창조이다. 그 작은 순간에 들어 있는 씨앗 같은 것이 품고 있는, 알 수 없는 미래로 움직여가는, 반딧불이의 깜박거리는 위태로운 운동을 닮은, 우연하고 흔들리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그것은 삶을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영원한 잔존하는 능력이다.(63~64)
우리는 일상적 직관과 관찰로부터, 사회적 세계와 사회적 인간의 구성에 있어 ‘꿈’이 차지하는 심대한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눈에 보이는 세계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세계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소급하여 거슬러올라가면, 거기에는 누군가의 꿈의 씨앗이 있고, 개화가 있고, 그 꿈의 전염, 모방, 전파가 있으며, 그와 대립하는 다른 꿈의 파동들이 있고,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격돌, 에너지의 상쇄, 혹은 시너지, 그런 과정에서 생성되는 특정 꿈의 잔존이나 영광스런 실현이 있을 것이다. 수많은 행위자들의 생활세계와 마음의 움직임을 좀더 깊이 탐구해보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그들이 사색인이나 행위자이기 이전에 ‘몽상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람들은 은밀하게 꿈을 키우고 그 영향과 자장하에 삶을 영위한다. 장애에 부딪혀 꿈을 포기하기도 하고, 새로운 꿈을 다시 육성하기도 한다. 그들은 꿈과 현실 사이에서 복잡다단한 조율을 수행한다. 하나의 생명이 탄생할 때, 건물이 세워질 때, 단체와 조직이 만들어지고 한 권의 책이나 작품이 생성될 때, 어떤 사건이 시작될 때, 사회운동의 흐름이 형성되어 퍼져나갈 때, 우리는 그것을 일으킨 행위와 논리와 이념과 생각의 저변에서, 훗날의 현실을 씨앗처럼 품고 있는 ‘꿈’을 발견할 수 있다. 사회적인 것은, 사회과학이 일반적으로 그렇게 판단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유기적인 방식으로 ‘몽상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다.(199~200)
동시대의 몽상구성체들 사이에는 기본적으로 상징권력을 둘러싸나 항상적 투쟁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계급, 젠더, 인종, 세대, 지역, 종교간의 투쟁이란 결국 꿈의 투쟁이 아닐까? 문화란 다수 몽상구성체들의 전쟁공간이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20세기 중반 이후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여러 꿈들의 역사를 벤야민의 시각으로 탐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국사회를 조형한 작용인으로서 특정 사회그룹의 생각이나 이념이나 조직이나 네트워크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꿈, 그들의 꿈의 시스템이 무엇이었는가를 묻는 것이다. 그 꿈의 모델이 된 원형적 꿈을 찾아내고 그것을 분석하는 것이다. 우리가 박정희의 꿈, 전태일의 꿈, 윤상원의 꿈, 민초의 꿈, 정주영의 꿈, 순복음교회의 꿈, 중산층의 꿈, 강남 엄마의 꿈, 여공이나 식모의 꿈, 사회운동가의 꿈, 노인들의 꿈, 자살한 청소년들의 꿈, 탈북자들의 꿈, 꿈을 상실한 자들의 꿈, 촛불소녀의 꿈, 세월호 유족의 꿈, 그리고 가능한 모든 인간 집단들의 꿈을 질문하는 것이 이런 관점에서 새롭게 열리는 사회학적 비전이다. 이는 지배하는 자들의 꿈, 승자들의 꿈, 상승하는 꿈과 몰락하는 꿈, 사라진 꿈, 짓밟힌 꿈, 침묵에 갇힌 꿈, 파괴된 꿈, 악몽들과 절망들을 찾아내고 드러내는 작업이다.(240~241)
*이 매거진에서 소개하는 책은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 위치한 동네 카페 '다-용도실'@da_yongdosil 내 공유 서가 '멈포드의 서재'@mumford_salon 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11월부터 멈포드의 서재는 동네 서점 '니은서점'@book_shop_nieun과 함께 엽니다. 3개월간 진행하는 시즌 1의 주제는 '타인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