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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영어를 공부했을까

『조선시대 영어교재 아학편』, 정약용(원작), 지석영·전용규(지은이)

by 하늘바다

‘수포자’라고 들어봤나. 수학을 포기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면 ‘영포자’는? 수포자와 비슷하다. ‘영어’를 포기한 사람을 일컫는다. 자랑할만한 일은 아니지만, 애석하게도 고등학생 때 나는 둘다였다. 고등학생 때 모의고사 칠 때마다 언어영역(지금의 국어영역)과 사회탐구 영역의 성적은 전국 최상위권을 자랑했으나, 외국어영역(지금의 영어영역)과 수리영역(지금의 수학영역)의 점수는 바닥을 쳤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영수’가 입시에서 제일 중요한 과목임은 변함이 없는데, 주요 과목 세 과목 중 두 과목의 점수가 그 모양이었으니 그 무슨 비극인지.


그나마 대학생이 되면 수학은 이과를 가거나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는다면 그 고통에서는 영원히 해방될 수 있는데, 영어는 그럴 수가 없다. 대학에 들어가면 토익(TOEIC)이라는 더 어려운 관문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기준 토익 점수를 넘겨야 졸업을 시켜주는 대학도 있을 뿐더러, (다행히 나는 간신히 토익시험을 통과해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취업에도 중요한 스펙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취업 후에는 회사의 업종이나 부서에 따라 영어회화까지 공부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혹은 회사에서 요구하지 않더라도 무한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공부하는 이들도 많다. 요즘엔(이라고 하기엔 꽤 오래됐지만) 영어유치원이라는 것도 생겨서, 영어 교육은 우리가 기억도 안 날 유아 때부터 성인이 된 후까지 이어지니, 우리가 평생 영어와 함께 산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영어는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 일상에 자리 잡았을까.


한국과 영어의 동거 기간은 무려 130년을 헤아린다. 아니 근데 그토록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했다면 우리가 영어를 잘해야 하는 거 아닐까. 영어 교육 노하우가 쌓일 만큼 쌓이고도 남을 시간일 텐데 말이다. 그런데 실제로 옛날 한국 사람들은 영어를 잘했단다. 다음 대목은 조선 주재 영국 영사가 본국 정부에 조선인의 영어 능력이 뛰어나다고 보고한 내용이다.


“...... 영국 영사가 재작년에 본국 정부에 보고한 조선 재정 정황 가운데, 조선의 어학교육비에 언급하면서, 조선 사람은 동양에서 가장 뛰어난 어학자로 외국어 학습에 대한 열성은 그 이상의 여지가 없을 정도이며, 한양은 외국인이 들어온 지 불과 14년이 채 못 되지만 영어의 능숙함은 40년간 외국인을 접한 베이징과 비할 바가 아니며, 그 뛰어남은 중국인이나 일본인은 감히 따르지 못할 것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이것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 信夫淳平, 『韓半島』, p127. 박양호 ‘구한말 이후 영어교육에 관한 소고’, ‘동래여자전문대 논문집 6집’, 1987, p 30 재인용.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한국 사람들이 옛날에는 영어를 더 잘했다니.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됐을까. 시간을 거슬러 지금으로부터 약 130 여년 전 이 땅에 영어가 처음 들어왔을 때로 돌아가보자.

때는 1882년, 아직은 나라 이름이 대한제국이 아니라 조선이던 시절에 조선과 미국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이는 조선과 미국의 조약 체결은 조선이 강제로 개항한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 이후 서양 국가와 처음으로 맺은 조약이었다. 이로써 우리와 미국은 처음으로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과 외교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라도 영어를 할 줄 아는 실무자 양성이 시급해졌다. 바로 이듬해에 조선에서는 우리 역사상 첫 영어교육기관인 ‘동문학’을 설립했다가 육영공원이 이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인 선교사들이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을 세우며 기존의 양반 자제들에만 행해지던 영어교육이 일반 백성들은 물론 여성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영어는 조선 사회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좋은 신분을 타고나지 않아도 영어만 잘하면 높은 관직에 오를 수도 있었고, 설령 관직에 오르지 못하더라도 큰돈을 벌 수도 있었다. 영어가 조선에 상륙했던 초창기, 조선인들의 영어습득력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절박함이 배경에 깔려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와 같은 영어 열풍 속에 다양한 영어 서적이 발간되었는데, 그 중 한 예가 바로 《아학편》이다.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쓴 아동용 한자 학습서 《아학편》을 의학자이자 한글학자인 지석영이 외국어에 능통한 전용규의 도움을 받아 새롭게 편찬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영어 열풍은 오래가지 못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로 원어민 교사가 아닌 일본인 교사에 의해 회화 위주 수업이 아니라 문법과 작문 위주의 영어 교육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에 불만을 품은 한국 학생들이 일본인 교사의 발음을 문제삼아 수업을 거부한 사례가 전해지는데, 이때부터 발생한 영어교육의 병폐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해방 후 75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배리북에서 나온 『조선시대 영어교재 아학편』은 당시의 영어학습서 《아학편》 편집본의 본문을 그대로 실었다. 원문에 원래 있던 민병석의 서문(추천사), 편찬자이자 저자인 지석영의 서문, 대한국문, 영국문, 판권도 번역했다. 《아학편》은 영어를 들리는 대로 표기하여 읽기만 해도 원래의 소리를 낼 수 있도록 고안했다. 물론 아무리 한글이 우수하다고 해도 원래의 소리를 완벽히 똑같이 구현하기야 불가능하겠지만, 당시 외국인들도 감탄했던 조선인들의 우수한 영어 습득력을 보면 그러한 방식이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예전에 영어를 소리나는 대로 한글로 표기한 영어 단어장을 본 적이 있는데, 《아학편》에는 한자가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비슷한 방식인 것 같다. 지금보다 더 원음에 가까운 발음 표기가 눈에 띈다.


배리북에서는 《아학편》을 다시 내면서 ‘조선시대 영어교재’라고만 했지만, 정확히는 영어단어장이라고 보는 게 맞다. 다만 한자와 일본어가 함께 들어있다는 점이 현대의 영어단어장과 다를 뿐이다. 원래 한자학습서였으니까 한자가 있는 건 이상할 게 없는데, 일본어까지 함께 들어있는 건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이걸로 영단어 공부를 할 게 아니라면 완독할 필요는 없는 책이다. 100년 전 사람들은 영단어를 이렇게 공부했구나 하는 마음으로 읽으면 된다. 지금과는 다른 한글 표기법을 감상하는 재미도 있다. 영어에 고통받는 이들이라면 동병상련의 마음을 느끼기도 할 것 같다.


서두에서 이야기한 한국사 속의 영어 이야기는 『조선의 영어교재 아학편』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다. 여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은 『영어, 조선을 깨우다』 (전 2권, 김영철, 일리; 2011)를 읽으면 좋을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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