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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읽는가

by 하늘바다


장장 9주를 달려온 글쓰기 프로젝트(고전 읽기 프로젝트). ‘나는 왜 쓰는가’로 그 문을 열었으니, 이제는 ‘나는 왜 읽는가 문을 닫으려 한다. 새삼스러울 정도로 당연한 말이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세상에 존재했거나 존재하는 (그리고 앞으로도 존재할) 모든 작가의 쓰기란 모두 읽기에서 태어났다. 아무리 천재적인 작가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읽기’는 ‘쓰기’의 어머니이고 세상의 모든 ‘쓰기’는 ‘읽기’의 자녀들이다.


‘읽기’란 곧 독서와 다르지 않은 말인데, 독서의 위대함이란 장정일 작가를 보면 안다. 장정일은 자타가 공인하는 독서왕(?)이다. 장정일은 소설가이자 시인이지만 그의 문학 작품보다 더 유명한 것은 ‘독서일기’다. 『장정일의 독서일기』 1권부터 (범우사;1994) 가장 최근에 나온 서평집인 『장정일의 악서총람』(책세상; 2015)에 이르기까지 그가 쓴 서평집은 무려 열 한 권에 달하는데, 거기에 소개된 책을 합하면 못해도 수백 권에 이를 터이다. 장정일의 공식 학력은 중학교 중퇴에 불과하지만, 그의 학력이 낮다고 해서 그를 무시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한국에서 장정일보다 학력이 높은 이들이 무수히 많지만 그만한 지성을 갖춘 이들이 얼마나 될까 하는 점을 생각해보면, ‘읽기’의 중요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런데 나는 언제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을까. 엄마랑 같이 읽었던 것도 독서는 독서가 맞겠지만, 어차피 그건 기억도 안 나니까 스스로 읽은 나이부터 치자. 실은 내가 언제부터 스스로 책을 읽기 시작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갓 일곱 살이 된 조카가 대여섯 살 때부터는 직접 책을 읽었던 것 같으니까, 나도 대충 여섯 살 때부터 혼자 책을 읽은 거로 치자. 그러고 보면 삼십 년 가까운 시간 동안 독서를 해왔던 것 같다. 여지껏 살면서 아무리 바빠도 쓰지 않았던 적은 많았어도, 읽지 않았던 시기는 없었다.


내 기억을 떠올려 보면, 어렸을 때는 지금보다 더 많은 책을 읽었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하루에 서너 권에서 대여섯 권 정도의 책을 읽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하면, 그때는 정말 하루종일 책만 읽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서 버스를 타고 간 곳은 공공도서관이었고, 주말엔 아침부터 저녁까지 책 읽는 걸로 하루를 지새울 때가 많았다.


물론 집에서 책을 읽을 때도 많았는데, 그때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나 집에 있는 책을 뒹굴거리면서 읽곤 했다. 그때는 문제집을 풀다가 딴짓을 하고 싶을 땐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었다. (그 책은 만화책이 아니었다.) 아마 지금 같은 시대였으면 나도 스마트폰으로 SNS를 하거나 유튜브를 봤을 텐데 말이다. 아직 인터넷이 대중화되지 않던 시절에, 게임이나 운동에도 흥미가 없었고 유달리 내향적인 성격에 내게 맞는 것이라곤 책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우리 집에서도 인터넷이라는 걸 하게 됐지만, 워낙 어릴 때부터 독서에 습관을 들여온 터라 그 후에도 계속 책을 많이 읽게 되었다.


이처럼 독서라는 것이 워낙 자연스럽게 스며들다 보니 ‘왜 읽는가’라고 스스로 질문을 던졌는데도 대답이 퍽 난감하다.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왜 산에 오르냐고 할 때, ‘산이 거기에 있어서’랑 비슷한 이치일까. 그렇지만 이유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시작은 분명 그랬지만 그동안 독서를 해오면서 굳이 책 읽는 목적을 말하라면, ‘세상을 알고 싶은 욕구’. ‘쓰고 싶은 욕구’랄까. 보통 어릴 때부터 독서를 한다고 하면은 문학을 좋아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와 같은 경우는 문학보다는 역사와 인문 서적을 주로 읽었다.


중학생 때와 고등학생 초반에는 (역사를 전공했던 대학 시절보다도) 역사를 정말 좋아해서 그런 분야의 책을 중심으로 읽었고, 그 이후에는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책을 많이 읽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내 가치관도 그에 맞춰 형성되어갔다. 책을 통해 세상을 좀 더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통찰하는 눈을 키우고 싶었다. 그런 욕구는 지금도 여전하지만, 20대 후반부터는 나도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감성적인 글에도 이전보다 눈길이 많이 갔다. 보통은 청소년기에 감성이 꽃을 피운다는데 나는 특이하게도 그때부터 감성적인 글에 감명받고 그런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전에도 감성적인 글을 읽거나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예전에는 어쩐지 감성적인 글보다는 이성적인 글이 좋았다. 사람이란 이처럼 변화하는 모양이다.


지금은 읽는 것 자체가 좋아서 읽는 것도 있지만 쓰고 싶어서, 더 좋은 글을 쓰고 싶어서 읽는 목적이 더 큰 것 같다. 세상을 통찰하는 글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쓰고 싶다. 좋은 글은 좋은 삶에서 나온다고 한다. 좋은 책을 많이 읽으면 좋은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되니, 결국 좋은 책을 열심히 읽으면 나도 그런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두서 없이 이야기했지만, ‘이것이 왜 읽는가’에 대한 나의 답이다. 고전 읽기 프로젝트가 끝나도, 나는 계속 쉼없이 읽고 쓸 생각이다. 더 이상 읽지 못하는 날이 올 때까지, 더 이상 쓰지 못하는 날이 올 때까지 나는 쉼없이 갈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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