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달 동안 평소보다 책을 많이 샀다. 전자책으로 2권, 종이책으로 13권 이렇게 해서 총 열다섯 권이나 샀다. 물론 한 달에 도서구입비로만 수십 만원 이상을 쓰는 독서가들과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지만, 이 정도면 일반 독자치고는 책 사는 데에 돈을 많이 쓰는 편이 아닐까. 새해를 앞두고 시집 읽기에 꽂혀서 새로 산 책 중 여덟 권이 시집이다. 그래서일까. 새로 독후감을 쓸 책을 도서관에서 고르는데 고전 시집이 눈에 띄었다. 꽃나무가 예쁘게 그려진 시집이었다.
저자는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의 누이이자 시인이었던 허난설현(이하 난설현)이고, 책을 번역한 이는 오늘날 아름다운 서정시로 잘 알려진 나태주 시인이다. 책은 총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마지막 장에는 한시 원문이 실려있다. 난설현이 쓴 시집의 본래 제목은 《난설헌집》으로, 난설현이 27살로 요절한 후, 동생인 허균이 자신이 외우고 있던 시와 난설헌의 친정에 남아있던 작품을 엮어 책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알에이치코리아에서 나온 책 『그대 만나려고 물 너머로 연밥을 던졌다가』는 나태주 시인이 현대식으로 새롭게 엮으면서 새롭게 구성한듯 보인다.
난설현이 살았던 시기는 조선 선조 때로 1563년에서 임진왜란이 터지기 3년 전인 1589년까지 살았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430 여년 전의 인물이다. 그렇지만 편역자의 유려한 번역 덕분인지 현대 서정시집처럼 부드럽게 읽혔다. 가끔 설명이 필요한 부분도 있으나 본문 하단에 달린 주석만 읽고도 이해하는 데에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가을날 깨끗한 긴 호수는 푸른 옥이 흐르는 듯 흘러 연꽃 수북한 곳에 작은 배를 매두었지요. 그대 만나려고 물 너머로 연밥을 던졌다가 멀리서 남에게 들켜 반나절이 부끄러웠답니다.
-「연밥 따기 노래」 전문 (27쪽)
물 너머로 연밥을 던졌다라… 옛날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정인(情人)에게 자신이 사모(思慕)하는 마음을 표현했나 보다. 이토록 적극적인 구애 행동이라니. 나는 이런 내용이 담긴 고전시가는 고려시대의 노래인 ‘고려가요’ 이후로는 볼 수 없을 줄 알았다. 아무래도 그때는 적어도 조선시대보다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연애를 할 수 있었을 테니까. 이 책에는 그외에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작품, 오라버니를 그리워하는 작품, 자식을 여의고 슬퍼하는 작품, 부지런히 일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노래한 작품이 실려있다.
이 책을 이야기하는데 그외에 어떤 설명이 더 필요할까. 이런 재능을 가지고도 평생을 규방에 갇혀 살아야만 했던 난설헌의 삶이 서글프다. 난설현을 아꼈던 친정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죽음과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자식들, 난설현을 박대했던 남편과 시어머니… 별다른 병이 없었음에도 스물일곱이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 이해된다. 없던 병도 생길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의도한 바는 아니었는데 최근에 내가 사거나 읽은 시집이나 산문집의 상당수는 여성 작가들이 쓴 책이다. 아주 최근은 아니고 근 1년간 내가 산 책들이 대체로 그런 것 같다. 일부러 여성 작가들이 쓴 책을 고른 적은 없었는데, (물론 남성들이 쓴 책들도 그런 책들이 많지만) 요즘 들어 섬세하고 감성적인 글을 많이 찾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만약 난설현이 지금 활동하고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작품을 사서 읽고 마침내 난설헌의 팬이 되지 않았을까.
한편, 시선을 출판시장에서 연예 분야로 돌려보면 약진하고 있는 여성 예능인들이 돋보인다. 2018년 KBS와 MBC 연예대상을 거머진 방송인 이영자에 이어 2019년 MBC 연예대상에는 방송인 박나래가, 2020년에는 방송인 김숙이 KBS에서 연예대상을 수상했다. 손녀와 함께 유튜브를 운영하고 있는 박막례 할머니는 무려 백만에 달하는 구독자가 있다.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뜻을 펼칠 수 없었던 시대에 살았던 난설헌, 그가 이 모습을 보았다면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