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좋아하는 역사인물은 조선의 창업자 삼봉 정도전이지만, 가장 먼저 좋아한 인물을 꼽으라면 나는 다산 정약용을 말하겠다. 정약용은 조선 최고의 실학자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학창 시절에 한국사(국사) 수업을 열심히 들었던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이 익숙할 테다. 전근대의 지식인들이 대체로 그렇듯 그 또한 정치·경제·사회 등 그가 살았던 당대 사회의 거의 전 분야에 폭넓은 식견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가 관여한 분야가 워낙 넓다 보니 『엔지니어 정약용』 (김평원, 다산북스; 2017)인데, 수원 화성 건설과 거중기 개발 등 정약용의 공학 업적에 착안해, 공학자로서 다산의 면모를 강조하는 책도 나왔을 정도다.
하지만 정약용은 본래 사대부 지식인이다. 조선의 사대부는 모두 기본적으로 시와 문장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났다. 정약용 또한 그 분야에서 당대 지식인의 다른 이보다 결코 뒤지지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교과서가 아닌) 다산 정약용을 만난 것도 그의 문학 때문이었다. 다산학을 연구하는 박석무가 쓴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가 내겐 그 입문서였고, 그 이후로도 그의 시와 산문을 다룬 책을 몇 권 더 읽으며 정약용의 문장에 빠져들었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한밤중에 잠 깨어』는 다산이 유배지에서 쓴 한시를 엮은 책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여기에 실린 다산의 작품들은 이른바 ‘유배문학’에 해당한다. 유배문학은 말 그대로 유배지에서 피어난 문학이다. 개인으로는 분명 불행한 일이지만,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유배문학 중에서는 문학적 가치를 크게 인정받는 작품들이 많다. 수험생들에게 악명 높은 송강 정철의 가사문학인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이 그렇고, 윤선도의 〈어부사시사〉가 그랬으며, 문학은 아니지만 정약용에 쓴 《목민심서》도 유배지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현대로 치면 ‘옥중문학’과 비슷한데, 한국에서는 고 신영복 교수가 감옥에서 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외에도 네루 수상이 감옥에서 쓴 『세계사 편력』 등 감옥 속에서 태어난 빼어난 저서들이 많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유배가거나 투옥되는 게 바람직하다는 건 아니다. 다만 객관적 사실이 그렇다는 것일 뿐.
초조한 옷차림이 결국 너를 속여서 십 년을 내달려도 피곤함 뿐이로다. 만물 모두 안다면서 어리석어 답 못 하고 일천 사람 인물 모두 알아 비방이 따라오네. 고운 얼굴 박명탄 말 그대는 못 보았나 예로부터 백안시는 천지에게 달린 것을. 뱀 비늘과 매미 날개 끝내 어이 믿겠는가 우습구나 내 인생 간데없는 바보로다.
-뱀 비늘과 매미날개 전문 (14쪽)
책에 실린 이 시에서는 불운한 현실에 좌절한 다산의 인간적 면모가 보인다. 『한밤중에 잠깨어』에는 이런 주제들이 자주 보이는데, 그러한 점에서 내가 예전에 읽은 다산의 다른 산문집이나 시선집과 구별되는듯하다. 다산의 저작을 다룬 다른 책들에서도 정약용이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여기에선 대다수 작품이 그런듯하다. 그 이유는 이 책이 다산이 유배 가기 전 초창기 작품들을 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인듯하다.
정조가 살아있을 때만 해도 왕의 최측근으로 잘나갔던 그였다. 그러다가 정조 사후 한순간에 유배 가는 처지에 이르니 아무리 위대한 실학자라 하여도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았을 터이다. 형기가 정해져 있는 징역살이라면 미래를 계획해볼 만도 할 텐데,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약 없는 세상과의 단절이었다. 현대로 치자면 무기수와 비슷한 심정일까.
다산은 이에 때때로 절망하고 좌절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유배지에서 세상을 원망하며 술로 외로움을 달래고 싶을 법도 한데, 그는 유배지에서 많은 저작을 남긴다. 숱한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정신. 그것이 내가 어렸을 적 다산에게 반한 이유였지만, 이 책에서 보이는 그의 모습은 다른 점에서 내게 위로와 감동을 준다. (당연하겠지만) 그처럼 위대한 인물도 이렇게 힘들어할 때가 있었구나 하고.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가벼운 위로의 언어들보다 더 큰 위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