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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려, 조선 후기의 문제적 작가

『글짓기 조심하소』, 김려 씀, 오희복 옮김, 보리(2006)

by 하늘바다

내가 스스로 시작한 한·중 고전 읽기 프로젝트도 어느새 막바지다. 첫 시작은 ‘논어’로 했는데, 마지막은 뭘 써야 할지 도서관에서 고민하다가 두꺼운 양장본 고전 한 권이 내 눈에 들어왔다. 책 제목이 『글짓기 조심하소』인 것을 보고 뜨끔했다. 왠지 나보고 하는 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책 제목을 보고서 내가 그동안 너무 가볍게 글을 써오지 않았을까 하는 반성을 잠깐 했다.


보리 출판사에서 나온 『글짓기 조심하소』는 본래 북한에서 번역해서 출판된 책이다. 북한에서는 ‘조선 고전문학선집’ 시리즈에 포함됐는데, 출간 당시 김일성 종합대학 교수로 있던 오희복이 김려의 글을 편역했다고 한다. 이를 보리 출판사에서 ‘겨레 문학선집’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판했고 덕분에 우리도 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됐다.


이 책의 원저자는 김려(1766-1821)다. 책날개에 실린 설명에 따르면 열다섯 살에 성균관에 들어갔다고 하니, 어릴 때부터 상당히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인물이었던 것 같다. 설명을 계속 읽어보자면 강이천·김조순·이옥들과 어울리며 정통 고문에서 벗어난 패사 소품(稗官小品) 문체를 익혔다고 되어 있다. ‘패사 소품’은 아마도 ‘패관 소품’을 뜻하는 것 같다. 이는 전통적인 고문(古文)을 중시하는 정조의 방침과 정면으로 배치되었다.


그러면 ‘패관 소품‘은 무엇이고, ‘고문’은 또 무엇인가. 본래 조선에서는 도(道)를 담은 문학을 창작하는 것이 주류였다. 따라서 전통적인 유가경전을 전범으로 삼은 고문체가 오랫동안 유행했다. 그러던 것이 18세기 들어 청나라에서 들어온 명·청 시대의 문장과 소설 등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문체가 등장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고전으로 유명한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이 새로운 사조를 이끌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패관문학이다. 앞에서 말했듯 고문체가 ‘공맹의 도’를 주제로 삼았다면, 패관 문체(?)는 소설이나 야담 같은 서사물이나 생활 주변의 소소한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당시의 군주였던 정조는 이를 불순한 문체라고 여겨서 이른바 문체반정(文體反正)을 단행했다. 이 때문에 김려를 비롯하여 새로운 사조를 따르는 이들이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를 지금 한국 문단에 빗대자면, 당시의 패관문학 자리에 지금의 장르문학과 웹소설이 서 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수백 년 전의 역사를 지금 시대의 현실에 그대로 대입하는 것만큼 무리한 일은 드물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순문학이 낡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순문학 작품들도 좋아한다.)


그건 그렇고 다시 패관문학 이야기로 돌아오면, 아무리 집밥이 좋아도 때로는 라면도 먹고, 다른 인스턴트식품도 먹게 되는 게 사람이다. 유가 경전에 아무리 좋은 이야기가 많다 해도 이와 비슷한 이치라 생각한다.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우리가 읽기에는, 고문체로 쓰인 글보다는 이른바 패관문학에 속했던 글이 더 재밌게 읽힌다.


물론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인스턴트식품에 비교하기엔 너무나 뛰어난 작품이지만, 고문체를 중시했던 정조에겐 거의 그 정도 수준으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싶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이번에 소개하려고 하는 책의 원저자 김려도 패관문학을 이끌었던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 유명한 다산 정약용과 동시대에 활동했지만, 지금 이 글을 읽고 이름을 처음 들어본 사람들도 많았을 것 같다. 나도 독후감을 준비하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김려가 쓴 『글짓기 조심하소』는 총 9개의 장(글짓기 조심하소, 방주의 노래, 질 버치엔 정어리가 그득, 다복다복 자라난 저 시금치, 모진 바람 휩쓸더니, 여릉 고향 집이 그리워, 황성에서 부른 노래, 일곱 사람 이야기, 부령으로 귀양 가면서 쓴 일기)과 부록으로 구성되었고 마지막엔 원문을 실어놓았다.


책에는 귀양지에서 겪은 일들과 그곳에서 만난 백성들의 모습, 물고기들의 생태, 농사지은 경험을 담은 이야기들 등 다채로운 이야기가 실려있다. 책의 전체 페이지는 무려 900 여쪽에 달하는데, 운문과 산문이 함께 실려 있으나 운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아 시집에 가깝다. 책의 전체 내용을 훑어가면서 이야기하면 좋겠으나, 워낙 방대한 분량이라 내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 속에서 책을 두루 살피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내가 인상 깊게 읽은 부분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책의 첫 장인 ‘글짓기 조심하소’는 김려가 쓴 시집 《사유 악부(思牖樂府)》에 포함된 작품들이 실렸다. 여기에 실린 시들은 한결 같이 ‘묻노니 너 무엇을 생각하느냐. 북쪽 바닷가를 생각하노라.(問汝何所思 所思北海湄)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말하는 북쪽 바닷가가 무언가 뜻하는 바가 있을 듯도 한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국화, 최 포수, 지난해 단옷날, 옥수수, 고장을 뜨는 어부들, 참외 장사, 어머니 제삿날, 옥련진의 탐관오리 등. 귀양지에서 겪은 일상적인 이야기, 백성들이 사는 모습, 탐욕스러운 고을 수령에 대한 비판 등이 담겨있다. 마지막 장에는 ‘사유악보’에 대한 김려의 해설이 실려있는데, 이는 이 책에서 단 한 편만 포함된 장인 ‘방주의 노래’를 제외한 거의 전편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다음 장인 ‘질 버치에는 정어리가 그득’은 본래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라는 책에 실린 작품들이 실렸다. 앞 장과는 다르게 머리말이 있다. 오늘날로 따지면 저자의 말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은데, 김려가 왜 이 책을 지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이를 읽어보면 김려가 진해로 귀양 온 지 두 해째 되는 해부터 지은 책임을 알 수 있다. 책의 제목에 ‘우해’가 붙은 까닭은 머리말에도 나와있듯이 당시에는 ‘진해’를 우해’로 불렀기 때문이다. 여기에 실린 시 제목들을 살펴보면, ‘바다망둥이’, ‘감송’, ‘볼락’, ‘꽁치’, ‘상어’, ‘정어리’ 등 하나 같이 해산물 이름이다. 하긴 머리말에도 책을 쓴 취지가 나와있을뿐더러 책 제목에 ‘어보(魚譜)’가 들어가는 점만 보아도 정약전의 《자산어보(玆山魚譜)》가 떠오른다.


김려의 《우해이어보》는 정약전의 《자산어보》와 쌍벽을 이루는 어류 연구서로 평가되는데, 《자산어보》보다 11년 먼저 세상에 나왔다고 한다. 다만 여기에 실린 글은 『글짓기 조심하소』에 실린 다른 글과 마찬가지로 모두 시(詩)라는 점이 특징이다. 물고기들을 다뤘음에도 그림이 실려있지 않아 아쉽다. 그림보다 글을 더 높게 쳤다는 당시 사대부 사회의 분위기 때문이리라.


바로 다음 장인 ‘다복다복 자라난 저 시금치’는 본래 ‘만선와잉고(萬蟬窩賸藁)’에 실린 글로 살구, 감, 포도, 석류, 대추, 복숭아 등의 과일과 벼루, 검은 털 천 신, 오동나무 벼룻집 등의 문방사우에 관련한 시들이 실려있다. 나는 조선의 박물학자라고 하면 오직 이덕무밖에는 몰랐는데. 김려의 박물학적 관심 또한 상당하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찾아보니, 김려의 벗 이옥도 박물학자로 《양화소록(養花小錄)》을 쓴 강희안 이후 조선 최고의 식물 전문가라고 한다. ‘양화소록’이라는 책이 있다는 사실도 조금 전에 처음 알았다. 조선 후기의 지식인이라고 하면, 박제가, 홍대용, 정약용, 이덕무, 박지원 정도밖에 몰랐던 나의 협소한 지식이 부끄러워진다. 이래서 사람은 뭐든 많이 읽고 봐야 한다.


그런데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런 글조차도 (물론 산문으로도 많이 썼지만) 운문으로 썼다니, 조선 사대부들의 시 사랑은 대단하다. 조선 선비들은 시(詩)를 일기(日記)처럼 생각했다고 하니 그래서였을까. 여기까지가 내가 책에서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이다.


여담이지만, 나는 (이 책을 포함하여) 옛날 고전을 읽을 때마다 한자의 축약성에 감탄하게 된다. 한글 번역문과 한문 원문을 비교해보면, 분명 같은 내용을 담고 있을 텐데도 한문 원문의 분량이 반으로 줄어든다. 조선 초에 무려 군주가(그것도 당대 사대부들도 성군으로 칭송했던) 글자를 만들었는데도, 양반들이 한글을 거의 쓰지 않았던 점이 단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때문이었을까. 물론 그러한 점도 있겠으나, (인터넷도 없었고) 지금보다 종이가 귀했던 시절에 뛰어난 축약성을 지닌 한자의 장점을 높이 산 점도 있지 않았을까. 물론 어디까지나 내가 혼자 한 생각일 따름이다.


여담은 각설하고 김려의 작품으로 다시 돌아와 보면, 사유악보(이 책에서는 ‘글짓기 조심하소’)에 실린 시 ‘고장을 뜨는 어부들’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보인다.


영북 땅 네 고을엔 어부 가호 많았건만
집이며 배 버리고 이러저리 떠나갔네.
듣자니 올 겨울은 물고기 진상 없었다는데
영문에선 숨겨 두고 이전대로 독촉하네.

-'고장을 뜨는 어부들' 중에서... (88쪽)


오늘날 사람들에게 다산 정약용만큼 유명하지 않았을 뿐이지, 당시 사회의 뛰어난 실학자이자 문인이었던 김려도 지배층의 학정에 고통받는 백성들의 모습을 이처럼 신랄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김려가 백성들의 힘겨운 모습만 그려낸 것은 아니다. 다음 시를 보자.


“청어 사요, 청어요” 외치는 청어 장사
땀 뻘뻘 흘리면서 장거리를 돌아치네.
바닷가에 고깃배를 빼곡히 모이더니
동전 팔백 닢에 한 바리씩 팔린다네.

- '청어 장사' 중에서... (433쪽)


이 작품에서는 땀 흘려 일하는 활기찬 청어 장수의 모습을 그려낸다. 예전에 읽은 다산의 한시(漢詩)에서도 농민들의 활력 있는 모습을 그려낸 작품이 있었던 것 같다. 백성들의 고통이나 생활을 묘사한 작품은 다산과 김려 외의 다른 실학자들의 저작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들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나는 놀랍고 신기하다. 어떻게 그들은 자신과 신분이 다른 이들의 삶에 관심을 갖고 그들의 생활을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을까.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 사회인 지금도 재벌가의 자제가 보통 사람들이나 빈민들의 삶에 공감하기도 어렵다고 하는데 말이다. 하물며 그때는 계급의 상하관계가 법적으로도 당연시되던 시대였다.


지금도 큰 부자들은 그들만이 사는 동네가 따로 있다고 하는데, 당시에도 양반들은 반촌(班村)에 상민들은 상민들은 민촌(民村)에 거주했다. 그런데 아무리 실학자라고 해도 엄연히 지배층에 속했는데, 어떤 이들은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갖고 그들의 이야기를 글로 쓸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민심은 천심이라고 하는 유가적 관념을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학습하기 때문이었을까. 지배층이긴 하지만 지식인이라는 자의식 때문이었을까.


조선 후기에 패관문학이라는 새로운 흐름 속에서 활동했던 김려. 그는 갖은 고초를 당하면서도 자신의 문체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를 비롯한 이들은 이러한 문체로 포수, 의원, 거지, 어부 등 당대 사회의 피지배층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물론이고, 미꾸라지, 도토리, 벼룩 등 이전에는 글쓰기의 소재가 되지 않았던 것들을 대상으로 삼았다. 거대 담론도 중요하지만, 무릇 작가라 하면 작은 것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조선 후기의 문제적 작가라 할만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작가를 꿈꾸는 나, 김려의 작가 정신에 감히 존경의 마음을 표한다. 그와 비슷한 부류의 작가들이 남긴 글을 찾아서 읽고 내 글쓰기의 자양분으로 삼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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