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리가 기억하는 전근대의 역사인물들은 대개 지배층들이다.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가끔 박물관에 가거나 유적지에 갈 때 한번 지배층들은 영원히 호사를 누리는구나 하고 느낄 때가 종종 있다. 한번 생각해보라. 오늘날 우리가 귀중한 문화재로 여기는 것들 중에 지배층의 유산이 얼마나 많은지. 가야나 신라 왕릉도 그렇고 조선시대 양반들이 쓴 수많은 책도 그렇고… 그 외에도 셀 수 없이 많다. 가야왕릉이나 신라 왕릉을 건설한 사람들은 일반 민중이었을 테고, 임진왜란에 혁혁한 공을 세운 판옥선과 거북선도, 해인사 팔만대장경도 민초들의 헌신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텐데 오늘날 우리는 그 이름을 단 한 명도 기억하지 못한다.
기층 민중에서도 가끔 역사에 남는 이들이 있다. 고려시대 최충헌의 노비로 노비해방운동을 일으킨 만적이 그렇다. 물론 아주 특수한 사례에 불과하다. 조선 후기에는 만적처럼 정사(국가의 공식 기록)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지배층이 아니면서도 문헌 기록에 남는 사례가 조금은 많아졌다.
한문학의 한 갈래인 ‘전傳’이라는 덕분이다. 사마천이 쓴 역사서 《사기》에서 비롯된 양식으로 한 사람의 평생을 기록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전傳’에는 지배층이라고 할 수 있는 사대부뿐만 아니라 평범한 백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해서 오늘날에도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추재기이』도 거기에 속하는 책으로 조수삼(1762-1849)이라는 사람이 쓴 책이다. 번역자의 말에 따르면, 28살에 처음 중국의 강남 지역에 가서 수레를 타고 가는 동안 중국어를 배울 정도로 외국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역관(오늘날의 통역사)은 아니었다. 과시(科詩: 과거시험을 볼 때 쓰는 시)를 잘 짓는 재주가 있었지만, 중인 신분이라 그의 나이가 83세가 되어서야 진사시에 합격했다고 한다 (지금도 아니고 그 당시에 83살에 과거시험을 봤다니, 조수삼은 무척 건강한 사람이었나 보다). 그가 쓴 책 제목인 『추재기이』는 호가 추재(秋齎)인 조수삼이 기이한 이야기를 썼다는 뜻이다.
조수삼이 쓴 책에는 양반도 등장하지만, 그보다는 중인 이하에 속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많다. 이를 테면, 소금장수, 노비, 장님 악사, 고소설 낭독꾼 전기수, 해금을 잘 켜는 해금수 등이다. 다른 이들은 산문 형식으로 전(傳)을 지었으나, 조수삼은 독특하게도 운문 형식으로 책을 지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조선의 뒷골목 사람들 71명의 이야기를 71편의 한시로 표현했다. 물론 허경진 교수가 친절히 해설도 달아두었다.
여기서 문득 예전에 직접 사서 읽은 책 『연장전』 (박점규·노순택, 한겨레출판; 2017)이 떠오른다. 여기서 연장전은 스포츠 경기할 때 그 ‘연장전’이 아니라 망치 같은 연장이고, ‘전’은 ‘싸울 전’ 자 아니라 위인전 할 때 그 ‘전’이다. 미용사, 굴삭기 기사, 조경사, 청소노동자, 간호사 등 자기만의 연장을 갖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쓴 이야기다. 『추재기이』를 쓴 조수삼이 현시대에 환생했다면, 그와 비슷하게 작업하고 있지 않을까.
오늘날에는 이처럼 타인이 기록해주기도 하지만, 우리는 지금도 우리 자신의 기록을 계속해서 남기고 있다. 과거에는 기껏해야 일기밖에 없었지만, 요즘엔 SNS로 우리의 일상을 기록한다. 조금 더 적극적인 이는 직접 책을 내기도 한다. 에세이가 붐을 이루는 이 시대엔 평범한 개인의 이야기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도 한다. 기성 출판사의 벽을 넘지 못한 사람들은 비록 안 팔리더라도 독립출판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 한다. 나도 그런 욕구를 가진 사람들 중 하나다.
하지만 『추재기이』가 쓰였던 시대는 지금과는 다르게, 지배층이 아닌 일반 민중은 직접 기록을 남길 수 없는 시대였다. 추재 조수삼은 그런 시대에도 민중들의 이야기를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책에 그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책에 실린 인물들은 대부분 익명이지만, 그러한 조수삼의 노력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그 당시 보통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추재기이』를 읽으며 주류에 편입되지 못한 조선의 보통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 조수삼과 비슷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역사를 전공했던 대학생 시절에 잠깐 민중사에 빠졌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추재기이』처럼 당대 평민들의 삶을 다룬 고전이 도서관이나 서점에 있는지, 나중에 한번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