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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 유길준, 서양과 통(通)하다

『서유견문』, 유길준 지음, 허경진 옮김, 서해문집(2004)

by 하늘바다


유길준의 저서 『서유견문』을 읽었다. 내 기억으로는 분명히 대학 시절에 읽었던 것 같은데, 책의 분위기와 구성이 내가 생각하는 바와 다른 것으로 보아 그땐 제대로 읽지 않았던 것 같다.


『서유견문』은 구한말의 개화사상가 유길준이 집필한 저서다. 유길준은 1881년 고종이 파견한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했고, 후쿠자와 유키치가 경영하던 게이오 의숙에 입학해 한국 최초로 일본 유학생이 되었다. 28세에는 보빙사 수행원의 자격으로 미국에 가서 한국 최초로 미국 유학생이 되었고, 미국 유학 중 갑신정변(1884) 소식을 듣고 귀국했다가 체포되어 우포장 한규설의 집에 연금됐다.


말은 연금이지만, 수구파의 박해로부터 유길준을 보호하려는 한규설의 배려였다. 유길준이 그동안 준비해온 상당수 자료가 없어진 상태였으나, 유길준은 4년 동안 『서유견문』을 집필했다. 연금 상태라 밖에 나갈 수 없었던 그는 한규설을 통해 『서유견문』 초고를 바쳤다. 1892년에 연금에서 풀려난 유길준은 1894년에 갑오개혁이 단행되고, 일본에 보빙사 수행원으로 갔다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설립한 출판사를 통해 『서유견문』을 출판했다.


『서유견문』의 한자 이름은 ‘西遊見聞’이다. 여기서 ‘견문(見聞)’은 우리가 ‘견문’을 넓혀야 한다고 할 때 그 ‘견문’과 같은 한자를 쓴다. 한자 뜻을 대강 해석하자면, ‘서양을 유람하고 보고 들은 것’ 정도가 될 테다. 한자 뜻으로만 봐서는 마치 기행문일 것 같다. 나도 이 책을 읽기 전엔 그런 줄 알았는데 기행문보다는 일종의 백과사전에 가까웠다. 서유견문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서유견문』의 1편과 2편에서는 지구과학과 세계 지리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위도, 경도, 적도, 산맥, 대서양, 오세아니아주 등, 우리가 고등학생 때 지구과학 시간과 세계지리 시간에 배운 익숙한 내용이 담겨있다. 고등학교 때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과목이라 난 그냥 대충 보고 넘겼다. 3편과 4편에서는 국민과 나라의 권리를, 5편~ 18편은 정치 제도, 사법, 교육, 사회보장 제도, 공공기관, 종교와 학문, 풍속, 기계와 발명품, 제19편~제20편은 서양의 도시를 다룬다. 『서유견문』은 이처럼 방대하고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인터넷도 없고 서양 세계를 경험한 이가 거의 없던 시절에 이와 같은 서적은 상당히 유용했을 것 같다.


그 덕분에 『서유견문』은 당대 최고의 서양 입문서로 꼽힌다. 유길준은 어떻게 이런 책을 혼자서 집필할 수 있었을까. 일본과 미국에 몇 년 다녀온다고 이런 책을 쓴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물론 그건 아니었다. 『서유견문』에 실린 저자의 서문에 따르면, 유길준이 직접 듣고 본 바에 따라 서술한 내용도 있지만, 다른 사람의 책의 참고하여 번역한 것도 있다고 되어있다. 이 책을 옮긴 허경진은 『서유견문』의 많은 내용이 후쿠자와 유키치가 쓴 『서양 사정』을 번역한 것이며, 일본 국제법의 기원이 되었다고 알려진 헨리 휘튼의 『만국공법』, 데니의 『청한론』, 헨리 포셋의 『국부책』 등을 참조하고 인용했다고 말한다.


그 덕분에 『서유견문』의 내용이 풍부해지긴 하였으나, 책 본문의 상당수가 다른 책의 번역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무척 아쉽다. 만일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나 박제가의 『북학의』처럼 유길준이 직접 보고 듣고 느낀 점을 바탕으로 썼다면 좀 더 좋지 않았을까. 당대 사람들은 이 책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겠지만, 나로선 그 점이 참으로 아쉽다.


역자는 『서유견문』의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문명’의 이념이 제시하는 세계상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준다. 문명이라는 이념을 수용한다는 것은 법과 과학이 지배하는 패러다임에 입각하여 조선 사회 전체를 재구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명의 이념과 더불어 만국공법과 세계지도가 수용되었으며, 이러한 지식과 더불어 서양에서 만들어진 근대적 정치체인 ‘국가’가 받아들여지고 내면화되었다. 근대 정치의 주체인 국가는 근대 과학의 주체와 마찬가지로 보편적·객관적 위치를 표방하며 보편적·객관적 위치를 발한다. 그것이 곧 법의 담론이다. 유길준은 법률에 근거하여 국가의 대내외적 권리를 주장하고 또 국민의 권리를 주장한다. 법 안에서 모든 국가,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이런 점에서 법은 ‘이성’이고 나아가 그러한 법적 담론을 발하는 국가는 이성이다. (607쪽)


분명히 ‘해설’에 있는 글을 읽었는데 무슨 글을 이렇게 어렵게 썼나 모르겠다. 내 방식으로 좀 더 쉽게 풀어서 요약하자면, 유길준은 서양 사회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조선이 법과 과학이 지배하는 이성적인 국가가 되기를 꿈꾸었고, 이를 『서유견문』을 통해 역설했다는 이야기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유길준의 이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고종은 『서유견문』이 세상에 나온 뒤 3년 뒤인 1897년에 대한제국을 수립하며 황제권을 강화하는 복고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만일 비록 친일·친러라는 한계는 있으나 의회 설립 운동을 했던 독립협회 운동이 성공했다면, 유길준의 꿈에 조금은 다가갔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독립협회 운동은 실패했고, 그나마 대한제국이 추진했던 근대화 정책마저 1905년 을사조약에 이어 1910년 경술국치를 맞이하며 실패하고 말았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유길준의 꿈이 이루어졌다면 우리의 근대는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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