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날보다 디에고는 난민 수용소 천막에서 아침 일찍 일어났다. 해변으로 나가면 쓸 만한 물건을 구할 수 있다고 들었다. 7살 여동생 실비아가 실로 자신의 손을 묶고 있었지만 슬쩍 풀었다. 경비 초소의 경비원에게 걸리지 않게 작은 개구멍에 몸을 눕혔다. 어스름한 작은 길을 걸은 지 20여 분 파도치는 소리가 들렸다. 낮엔 덥다가도 아침, 저녁으로는 무척 쌀쌀했다. 바닷가 모래사장 끝 쪽을 빠르게 따라 걸었다. 바닥을 훑어보면서... 국경 경비대원에게 걸리면 어떤 벌을 받을지 몰랐다. 며칠간 감옥에 갇힌다고 들었다.
또 가족과 헤어져 팔리게 되어 어디론가 팔려갈지도 모른다고 형들의 이야기를 주워듣기도 했다. 안 먹은 통조림 깡통이라도 몇 개 줍거나 쓸 만한 잠바라도 주우면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실제로 바다에 나갔다가 횡재한 아이들도 있었다. 시계를 줍거나 귀금속을 주워 암시장에 팔았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밀물 썰물의 차가 큰 사리에는 경비대의 감시가 뜸하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날을 잡아 수용소를 혼자 몰래 나온 것이다.
반짝이는 물체 몇 개를 보았으나 빈 깡통과 유리병 조각이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없나 보다 하고 왔던 모래사장을 돌아가려는 순간이었다. 커다란 파도 끝이 사라지기 시작하는데 저기서 회색 이불 같은 무엇이 펄럭이며 들썩거렸다. 그냥 갈까 하다가 천천히 그 물체로 주변을 살피며 다가갔다. 물에 젖은 찢어진 때가 탔지만 흰 드레스였다. 뭐지 하고 디에고는 호기심에 그걸 조심스레 들추어보았다. 디에고는 깜짝 놀라 자빠져 젖은 모래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파랗게 언 듯한 여자 아이의 얼굴. 자기 동생 실비아 또래의 퉁퉁 불은 여자아이였다.
잠을 자는 듯 한 얼굴이었으나 배가 부푼 것을 보니 밀입국보트가 뒤집혀 죽은 어린아이의 시체가 확실했다. 어른의 시체는 몇몇을 보았으나 아이 그것도 여자아이의 주검은 처음이었다. 디에고는 다리에 힘이 빠졌다. 그 자리를 서둘러 벗어나려고 일어섰다. 물이 빠지고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돌아서 그 주검에게로 살며시 다가갔다. 여자아이가 손에 갈색곰 인형이 보였다.
동생 실비아가 그렇게 가지고 싶어 했던 곰 인형! 그 이제 그 아이에게 필요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의 손으로 천천히 가서 그 곰인형을 빼려고 하는데 죽은 여자 아이가 어찌나 꽉 지고 있었던지... 디에고는 눈을 감고 두 손으로 온 힘을 다해 그걸 뺐다. 정신없이 그 곰 인형을 쥐고 뒤도 안 보고 달려갔다. 그 여자애가 꼭 쫓아오는 것 같았다. 무서웠다. 다음 날부터 깨끗하게 빤 인형은 실비아의 애착 장난감이 되었다. 실비아는 그 갈색곰 인형을 보자기에 싸서 등에 업기도 하고 아이처럼 대했다. "오빠, 이 곰 인형은 내 아기야. 이름은 실바. 실바! 디에고 삼촌에게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삼촌, 잘했어.
이제 엄마랑 밥 먹자." 아빠가 난민선에서 폭풍우에 사라졌다. 그나마 다행히 엄마와 디에고 실비아는 구조가 되었다. 그리고 엄마가 일자리를 찾아 나간 지 한 달이 넘었다. 연락이 없었다. 배가 고프지만 디에고는 동생에게 더 많이 자신에게 할당된 구호식량을 남겨주곤 하였다.
저녁 난민 수용소 천막 안으로 찬 바람이 불었다. 잠을 청했지만 디에고는 쉽게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인기척에 눈을 뜨니 흰 드레스를 입은 자기 머리맡에 서서 자신을 노려보았다. 소스라치게 놀라 얼어붙은 디에고. 그 여자아이가 슬픈 얼굴로 디에고에게 물었다.
"너 내 곰 인형 왜 가져갔니?" "그게 니거야?" "응 내 거야. 돌려주었으면 좋겠어." "넌 이제 필요 없잖아..." "아니, 내 유일한 가족이야..." "넌 이미 죽... 죽었잖아!" "아니거든, 난 이제 하늘나라에서 사는 거야..." 디에고는 간이침대에서 일어나 달아났다. 막사를 정신없이 달려 나가서 숨어 버렸다. 막다른 곳에서 벽에 가기대 숨을 헐떡이는데 누군가 디에고의 등에 손을 얹었다. "아악! 저리 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여자 아이가 어느새 디에고 앞에 쪼그려 앉아서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 디에고는 잠에서 깨어 식은땀을 흘리고 멍하니 앉았다. 옆에서는 실비아가 곰 인형 실바를 껴안고 자고 곤하게 자고 있었다. 때 국물에 찌든 얼굴이 안쓰러웠다. 디에고는 실바를 조심스레 떼내려 했다. 그런데 역시 굵은 끈으로 자신의 여린 손목에 묶어 놓은 상태였다. 그는 살며시 줄을 풀러 자신의 베개를 실비아의 품에 안겨주었다. "엄마, 나랑 오빠 새 신발 사줄 거지?" 실비아가 잠꼬대를 했다.
디에고는 곰 인형을 들고 주변을 살피며 막사를 나왔다. 시신들이 안치된 수용소 제일 끝의 천막으로 까치발로 몰래 들어갔다. 수건으로 코를 가렸지만 어지러운 냄새가 코를 찔러 쓰러질 거 같았다. 제일 작은 나무관이 있는 곳에 갔다. 디에고는 겁이 나서 손을 덜덜덜 떨었다. 관 뚜껑을 열었다. 아까 자신에게 다가온 그 여자 아이가 맞았다. 평화로운 모습으로 깊은 잠을 자는 듯 보였다. 곰 인형을 그 아이의 가슴에 포개어 주고 뚜껑을 닫았다. 그제야 여자아이는 평온한 모습이었다. 수용소 막사로 돌아온 디에고는 이불을 차고 자고 있는 동생실비아의 얇은 이불을 덮어 주었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자리에 누운 디에고. 엄마 생각도 잊고 이내 누에처럼 쪼그려 누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