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린

남자의 어깨에 몸을 기대었다. 난 모른 체하고 청담대교를 질주했다

by 황규석

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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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 비가 내렸다. 종일 천상의 빗소리 왈츠는 도시를 인간을 적시고 흐느끼게 한다. 그 비가 그칠 무렵인 오늘 새벽 스산한 바람이 귓가를 스친다. 초저녁도 반팔 차림이 더운데 지금 팔뚝에는 새벽 한기로 닭살이 돋아 나오려고 폼 잡는다. 그래서 누구나 움츠리게 될 것 같다. 밤을 새우며 일을 하고 들어가기 전이었다. 콜도 없었다. 가로수 아래서 책을 보던 난 책을 읽던 양손은 책을 덮고 나 스스로 어깨를 감쌌다. 새벽 5시쯤 하루 24시간 중 제일 차가운 북서풍이 불어온다. 이제 누가 뭐래도 여름이지만 이때는 여름이란 놈이 근접하지 못한다. 아주 잠깐이지만 6월의 강남의 새벽 5시 앞뒤로 한 5분간은 봄(1/4), 여(2/4), 가을(3/4)이 아니라 4/4(겨울)도 아니고 0/4, 즉 미절(迷節), 하루 중의 미궁의 계절이 잠시 되는가 싶다.


아마 자정 무렵에 나왔던 혼령(魂靈)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가깝게는 4.19, 5.18 멀게는 3.1절, 임진왜란, 병자호란 그리고 교통사고로 죽은 원혼들, 가까운 성수대교의 학생들, 인천 호프집 화재사건 중학생들, 삼풍백화점 사망자들, 살해당한 사람들,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도 가기 각색의 사연으로 육체에서 이탈한 혼령들이 가기 각색의 모습으로 유희와 활동과 고통을 뼛속 깊이 마치(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인 듯 나는 미루어 생각해 본다. 이때는 그들만의 러시아워인 셈이다.


나는 그 흔적을 종종 보곤 한다. 마시고 남은 박카스 병, 찌그러진 맥주 캔, 빵 봉지, 전단지들이 날아다니기도 한다. 그 증거는 무엇보다도 길 잃은 강아지들이나 도둑고양이들이 그들을 보고 도망가거나 짓기도 하며 간혹 전봇대나 자동차 바퀴로 숨어버리기도 한다. 난 벤치에 앉아있다. 책을 덮고 지하철 역사 입구의 벤치에 잠시 앉아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작동하길 기다린다. 그러나 역으로 내려가지 않는다. 전동 계단을 타지 않는다. 결코. 내 건강한 두 발이 있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 난 제어하길 원한다.


새벽 5시에 반포역에서 걷기 시작하였다. 경부고속도로를 발아래로 제치고 잠시 저 멀리 길게 마치 곧게 자란 녹색 옥수수 대처럼 길게 뻗은 고속도로를 흘겨보다가 걸음을 재촉한다. 골목을 돌아 논현역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차저차 발길 머무는 대로 걸어가니 인디 영화를 만들던 시절 필름의 마그네틱 사운드를 입히는 광학 녹음을 하는 녹음실이 세 들었던 건물을 찾았다.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저기서 꿈을 키우던 시절이 있었지. 그리고 이네 영동시장을 지나 강남역 사거리로 진입한다. 서서히 미물들, 인간들의 활동시간이 오고 있는 것이다. 뒤에서 갑자기 날카로운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쨍그랑!” 고개를 돌려보았다. 파란 작은 가방을 메고 스케이트보드를 허리춤에 들고 가는 멜빵바지를 입은 키 작은 젊은 여자였다.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한 손으로 작은 돌멩이를 상가 앞 화단의 유리병에 던지고 깬 것이다. 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닥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새벽의 강남거리를 걷게 되었다.


내가 따라간, 혹은 나를 따라온 귀신은 나이 22살의 여자 귀신이다. 강남에서 낮엔 레스토랑 써빙, 밤에는 대형 슈퍼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하였던) 인천에 산다(살았다)는 여자 아이다. 내가 그녀를 알게 된 것은 가만히 덮어두었던 책이 바람에 잠시 멈추었던 빗방울이 무성히 자란 플라타너스를 흔들고 이마에 부딪히고 바람과 합쳐져 비바람을 만들어 "마음의 감옥"이라는 책의 중간을 남겨 놓음으로써 알게 되었다. 자유공원이 바라다보이는 인천 앞바다에 스스로 가방에 돌멩이를 메고 뛰어들었다는 여자였다. 그게 작년 겨울 크리스마스 다음 날이었다고 한다. 난 그녀가 자취했던 고시원까지 따라가는 거다. 그녀의 추억과 원혼을 따라서...


아스팔트를 긁는 목이 쉰 바퀴 소리가 난다. 그녀는 이제는 사라진 지 유행이 지난 지 좀 되는 스케이트보드를 엉성하게 타거나 끌면서 나를 이끌었다. 난 기꺼이 외로운 나의 마음과 다리와 발의 가혹한 피로의 연인이 되어준다. 따뜻한 마음이 반갑고 고마워서 그녀의 라일락 향기가 아직 남은 젖은 머리칼을 살며시 쓰다듬어 주고 볼을 꼬집었다. 그녀는 부산의 해양대학 해운학과를 3년 동안 다니다가 휴학하고 강남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이었는데 그 이유를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돈을 벌어 남극기지에 갈려고요." "오... 남극이라 멋진 걸..."

"해마다 남극에 365일을 근무하는 요원을 뽑는데 거기에 가려서 그래서 해운학과에 들어갔어요. 처음엔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싫어졌어요..."

"아.... 그랬구나. 예린아 그런데 왜 싫어졌어?" 그녀는 예. 린. 이란 친구였다.

단발머리에 발그레한 볼이 인상 깊은...

"아무래도 거긴 남자들이 더... 전 요새는 요리가 더 하고 싶어 졌어요. 어쩌죠?"

"음, 그럼 네가 열심히 공부해서 족집게 시험문제를 정리해 봐. 그리고 같은 이유로 세계 제일의 호텔 요리사가 되고 싶어 요리학과를 들어갔지만 프라이팬이나 칼질보다는 해운항법사가 되어 북극에 가길 원하는 학생을 찾는 거야. 그 족집게 문제와 정답을 전해주고 넌 그 애로부터 요리도 시험문제도 알려달라거나 커닝을 하면 되지 않겠니?"라고 금방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예린이, 그녀는 한술 더 떠서 웃으며 말했다.

"그냥 자리를 바꾸어서 시험을 보아도 좋겠네요"라고 방긋 웃는 것이 아닌가.

"맞다, 그것도 번거롭지 않고 참 좋은 생각이네~" "선배는 지금 행복해요?"

"행복? 글쎄... 아저씨는 아니 이 선배는 그냥 나도 그냥 버티고 사는 거야. 하루하루. 요샌 대리운전도 손님이 없네..."


예린이는 걷던 발걸음을 잠시 멈춰 서더니 내 품으로 스르르 안겼다. 이상하게도 기분 좋은 비린 냄새가 내 콧등을 자극했다. 난 그녀를 내 품에서 떼어내고 팔을 살짝 당겨 귀여운 볼은 살짝 만져주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스스로 학비를 벌면서 부지런히 꿈을 희망을 위해 살아가는 어여쁜 소녀다. 작년 가을, 연상으로 15살이나 많은 남자를 사귀었단다. 트럼펫을 부는 의사 아저씨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되었단다. 남들은 말했단다. 사랑에 빠진 예린은 더욱 예뻐졌었고 자기가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아저씨를 만나면서 여기가 살맛 나는 세상이라는 확신을 더 가지게 되었었다. 한동안은 말이다. 그리고 한동안 정말 죽어도 좋을 만큼 행복했다고 말했다.


"꺄아~옹, 꺄옹~~"

목욕을 오랫동안 하지 않았을 것이다. 먼지가 섞인 비를 맞고 구멍 속이나 숲 속 어딘가에서 생활하는 고양이는 그런데 왜 깨끗해 보이는지 모르겠다. 고양이 세수 때문일까. 늘 나와 눈이 마주쳐 놀라지 않은 꺼먹 길고양이. 쓰레기봉투를 물어뜯다가 나를 보고 아니 예진의 영기(靈氣)를 느꼈는지 울어댄다. 난 차마 남극이 아닌 탁한 서해 바닷물에 들어간 그녀가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이곳 강남역, 반포역에 서성이는 이유를 굳이 묻지 않았다. 스스로 죽음에 이르게 된, 또 헤어진 사연은 누구에게나 다 다르게 각인되어 있다. 상처와 아픔은 개집 안의 생후 2개월의 어린 코카스페니얼이나 인큐베이터 안의 생명체, 타인에 의해 수정되고 탯줄이 끊기면서 태어난 갓난아기에게도 태어날 때부터 드리워진 숙명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비련(悲戀)은 한 사람에게 책임을 주기에는 너무 가혹한 형벌이다.


그래서 난 사랑이 아픔의 시작이란 말에 동감하고 행복은 불행의 반쪽이란 말에 수긍하며 아픔과 불행을 동반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 사랑도 '존경(尊敬)'이란 이름으로 위장이 되지는 않을까. 아니면 맹목적인 '따름'과 동일한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개인의 아픔은 스스로 말하지 않을 때는 묻지 않는 것이 때론 예의이자 미덕이다. 찬 여름 바람은 어느새 살며시 돌아가셨다. "프라하의 봄이란 책 알아요? 선배..." 갑자기 예린이는 날 선배라고 날 불렀다. 간밤의 여름 단비와 짠 바닷불에 젖은 검은 줄무늬 면티 옆 허리로 스케이트보드의 -사포 같은 신발이 미끄러지지 말라고 만든 울퉁불퉁한 검은- 표면을 끼워 밀착시키고 내 옆에서 보조를 맞춘다. 우린 사이좋게 앞으로 걸어갔다.


"선배 많이 걷는다면서요? 교대부터 여기까지 쭈욱 이어지거든요. 보세요.... 교대, 강남, 역삼, 선릉, 삼성동쪽이요...” “아 그럼 나도 조금 알지. 어차피 나도 여기서 당분간 일하고 있으니까..." "참!!! 나중에 같이 토스트도 좋고 액세서리도 좋고 하여간 사업해요. 그래서 같이 남극에 가요. 아, 먼저 체코에 가야겠다” “프라하에?...” “네 맞아요. 거길 꼭 가고 싶어요."

그녀는 자수정 빛 눈망울 껌뻑이며 날 보며 헤헤 웃어주었다. 나 역시 주름진 웃음을 날린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본다. 아... 이때의 하늘은 화이트 블루 빛깔이었다. 새벽 6시가 넘은 시간 거의 한 시간을 난 강남대로를 싸돌아 다닌 것이었다. 그건 간밤의 블랙이 달무리 꼬리의 흰색과 별들이 숨거나 도망치며 내는 자색의 역광이 혼재되어 나는 색감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혼(魂)의 합(合) 색(色)의 교합(交合). 내가 '화이트 블루 am 6:15'에 잠시 도취되었다가 상처 입은 그녀 예린을 위로하기 위해 아니 이해하였다는 징표로 그녀의 작은 어깨를 감싸주었다. 그녀 예린이도 나의 어깨에 기대었다.


눈을 떴다. 몸을 틀었다. 이미 그. 녀. 는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고 눈에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찬 미궁의 계절 바람에 실려 간 것이었다. 저 멀리 수락산 바위가 느리게 내 안구에 들어왔다. 어느새 나는 내가 사는 도봉산역에 도착하였다. 몸을 뒤척이니 엉덩이 쪽에 눌린 책이 잡혔다. "프라하의 봄" 이란 책이었다. 역을 나와 보니 다시 여름이었다. 곱사등처럼 지상으로 나오지 못하고 등을 굽혀 엎드린 듯한 반지하 작은 내 방이 보였다. 고개를 살짝 반만 빼꼼히 나온 낡은 창틀이 보였다. 간간히 초여름의 아침 비가 가볍게 날아가듯 떨어지고, 추락하고 있었다. 리듬을 연주하는 듯했다. "토톡톡톡,,, 톡톡,, 투투투.... 토로로로로 츄르르르.........." 누굴 위해 노래하는 것일까 울고 있는 것일까. 아니 웃으며 재잘대고 있는 것이겠지.


이틀간 계속 이어진 비가 그쳤다. 공기가 쾌청했다. 깊은 밤이었지만 밤하늘은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그날은 일이 많았다. 연신 콜이 떴다. 강남역에서 역삼역으로 가는 대로변 호텔 앞에서 손님을 만났다. 갈색 랜드로버 차량이었다. 한 남자가 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자와 포옹을 하고 떨어져 나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 ”괜찮아요. 여기” 차 키를 받았다. 잠시 후 호텔 직원이 검은 가방을 하나 가지고 급히 뛰어왔다. 그는 가방을 받아 자기 옆자리에 놓았다. “가시죠!” “네 알겠습니다” “어디로 갈까요?” “가까운 바다로 갈 수 있을까요?” “네?” “아닙니다. 여기 있습니다.” 그에게서 주소를 받았다. 난 올림픽 대교를 건너며 힐끗 그 남자를 보았다. 그리고 그의 옆에 앉은 그림자를 보았다. 예린이었다. 그녀가 살짝 나에게 윙크했다. 그녀, 예린이 남자의 어깨에 자신의 몸을 기대었다. 난 모른 채 하고 그냥 청담대교를 가로질렀다. 하지만 신경이 쓰인 게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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