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평소와 다를 것이 없는 하루에도 괜히 마음이 헛헛해 집까지 남은 세 정거장을 걷는 중이었다. 고막 가까이까지 들어찬 음악에 기대 멍하게,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어떤 생각이든 하며 발을 옮겼다. 딱 내 몸만큼 보장된 고요한 세상을 깬 것은 음악을 멈추고 날카롭게 꽂힌 벨소리였다. 핸드폰에 뜬 번호에 걸음까지 잠깐 멈추었다 이기지 못하고 받았다.
“밥 먹었어?” 엄마다.
“응, 먹었지. 엄마는?”
“엄마도 먹었지.”
매번 같은 인사로 시작하는 통화에는 어떤 말을 이을지 모르겠다. 인사와 인사 사이 벌어지는 틈에 숨이 가빠지는 것 같다. 방금까지는 관심도 없던 손 끝에 시선이 머물렀다. 손톱 끝을 궁굴리듯 만진다. 그저께 붉은 살이 올라오도록 바투 깎았더니 힘을 줄 때마다 아프다.
“잘 먹고 다녀야지.”
진공을 깬 것은 다시 엄마 목소리다. 응, 잘 먹고 다니지.
“끼니 잘 챙겨 먹고.. 반찬 좀 보내줄까?”
“아니, 집에서 밥 먹을 일이 없다니까. 보내지 마.”
평일엔 일하느라, 주말엔 쉬느라 상을 차리지 않는 걸 뻔히 알면서도 엄마는 또 묻는다. 뭐라도 보내려는 마음과 곰팡이 핀 음식을 버려야 하는 나 사이 줄다리기는 스무 살에 시작해 서른이 될 때까지 이어지고 있다.
“맨날 시켜 먹지 말고 밥이랑 반찬이랑..”
백 번도 더 들었을 레퍼토리에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쉬어버렸는지 엄마가 잠깐 말을 멈춘다.
“엄마들은 왜 이렇게 잔소리가 많을까, 그치? 원래 엄마들은 그런 거야.”
내 눈치를 보는 것이 분명한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반사작용처럼 목이 울멍해진다. 거절이 일인 딸을 자처하는 것이 나도 편치 않다. 가라앉는 마음을 따라 시선이 신발 앞 코로 내려가고 걸음이 늘어진다. 손에 쥔 핸드폰을 슬쩍 보면 통화한 지 이제 1분이다. 내가 1분 만에도 분위기를 가라앉히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란 걸 엄마와 전화할 때마다 깨닫는다.
“그렇게 엄마한테 할 말이 없어? 다른 집 딸들은 오늘은 이랬어요, 저랬어요. 잘만 그러던데..”
결국 엄마 입에서 서운함이 터진다. 의젓하지 못하게 서러운 마음이 들이 찬다. 아주 조용히 숨을 쉰다. 엄마에게 들키지 않게 조용하고 큰 숨을 쉬고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낸다.
“그냥, 평소랑 똑같지 뭐. 야근하고, 밥 먹고…”
그래, 푹 쉬고. 몸 챙기고. 더 할 말을 찾지 못한 엄마가 통화를 정리하면 나도 얼른 대답한다. 응, 엄마도요. 왠지 마지막 인사만큼은 늘 존댓말이다. 그렇게 3초간 무거운 정적이 지나면 먼저 끊긴 통화에 마음이 툭, 내려앉는다. 잠깐 걸음을 끊어 숨을 크게 쉰다. 왼쪽 갈비뼈 아래 바나나 모양 빵이 얹힌 상상을 한다. 길에 서 있을 수는 없으므로 다시 걷는다. 집까지는 5분이 남았다.
엄마와 전화 후에는 늘 그랬듯 정해진 상념이 시작된다. 방금 어떤 대화를 나눴으면 좋았을까. 엄마는 내게 무슨 말이 듣고 싶었을까. 글쎄.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야근을 했고,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퇴근을 했고. 약간은 벅찬 하루가 어쩐지 서러워서 어서 침대에 파묻히고 싶었고.. 별 다를 것 없는 하루를 보냈어 엄마. 이 중에 어떤 말을 해야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