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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스카 Jan 22. 2019

무제

파랗게 멍든 시간들.36

어느덧 달콤했던 순간이 지나가고 지루해진 일상속에서 매번 같은 식당, 같은 영화관, 같은 잠자리. 우리도 뻔한, 안타까운 연인이 되어가는건가 싶은 순간들이 찾아오더라. 싫었어 그런 것들이. 우리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잠만 자는 사이가 되어버리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너와 내가 가여워지더라.

너의 게으름에 지치고, 배려없는 말들과 생각지도 못한 네 친구들의 행동들. 받아주고 참아주고. 내가 준 만큼 받지 못한다는건 알아도 최소한 예의는 지켰어야지. 왜 나와의 약속에 자느라 나오질 못했어? 피곤했을거란거 알아. 그래도 오랜만에 나가서 외식한번 하자고, 보고싶어서 그렇게 애썼는데. 나의 기대가 무너지는 만큼 네가 편하면 되는거였을까. 아니, 어쩌면 내가 귀찮았던걸까.

핸드폰 잘 안보는거 알아. 그래서 나만 남겨놓는 메세지가 많았던 것도 알아. ‘나 지금 뭐 하고 있어.’ ‘나 지금 네 생각이나.’ ‘너 왜 이렇게 예뻐서 날 못살게 굴어.’ 같은. 나의 사랑방식과 너의 사랑방식이 다른거겠지만 어쩌면 그저 섬세함의 정도가 달랐던 걸까? 내가 애쓰느라 힘들면, 너는 어디까지 무딤을 고쳐야 하는지가 힘들었던거야? 그렇다면 우리의 섬세함은 얼마나 달랐을까.

친구가 그랬어. 그렇게 좋아죽고, 시간이 지나면서 무덤덤해지고. 그러다가 한쪽만 좋아하는 일방적인 짝사랑같은 연애가 되면서 간절한 사람이 더 울게 된다고. 그러다가 헤어지면 아련하게 피어오르던 감정들이 어느순간 ‘그래도 사랑이었다.’라며 자위질을 해대고,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왜 그런 사람 때문에 나의 감정이 닳아버려야 했을까.’라며 증오하게 된다고. 무슨말인지 알게 되버린 내가 안쓰러워.

설레이던 두 사람이 ‘우리’가 되는 일 보다, 애틋했던 ‘우리’가 ‘너’와 ‘나’라는 별개의 매개체로 나뉘는 일이 사과 반쪽 내기보다 쉽다는 사실을 깨달은 봄이었어. 물론 이 깨달음은 모든 만남과 이별에서 매번 깨닫고 또 망각하고. 내가 아닌 누구나가 그럴거야. 우린 절대 헤어지지 않는다고, 계속해서 사랑할거라고. 그리고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버리지. 사실 지금은 그게 무서워서 누굴 만나는게 꺼려지기도 해.

그런데 그걸 또 잊을만큼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나는 이 감정들을 망각하겠지. 인간은 같은걸 반복하는 동물이잖아. 안온함을 추구하는 동물이잖아. 나는 정말 그랬는걸. 분명 너와 그랬듯이 다시 누군가가 나의 볼을 만지면 화끈하게 열이 오르며 크게 울려대는 심장소리를 죽이려 조심스레 말을 걸꺼야. 기쁘겠지. 차가운 손이라면 더욱 그럴 것 같아.

전하고 싶어서 수십시간을 고치고 고쳐 다듬은 그 고백들이 무색해지는 시간속에, 나눈다는 것을 이해 못하는 네가 조금 안타까워. 물론 내가 이런 말을 했다 하면 너는 내가 뭔데 안타까워 하냐며 역정을 내겠지. 싸우고 나서 화가났을 때 혼자 시간이 지나면 풀린다며 가만히 내버려 두라는 너의 태도는 무책임이며, 부족한 공감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고 너의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두서없음이기도 해. 그러면 네가 풀리는 그 시간 동안 나는 어떻게 해야하는데. 나와 이야기 하며 중간을 찾아가는 과정이 감정소모라며 질색하는 너에게 내가 어떤 이야길 해야 할까.

나는 이제 네가 아닌 다른 이를 찾기 시작했어. 감정선이 비슷한 사람. 그 사람이 허락 한다면 내 기쁨의 반을 잘라 선물할거야. 아픔을 갈라 내가 질거야. 옆에 있는다면 기쁨은 곱이되고 슬픔은 반이 되니 아쉬울게 없어. 그러니 나는 이제 절반의 슬픔만 갖고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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