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 작가 Apr 27. 2022

4월 27일 김수현의 하루

하루 종일 굶었다

오늘은 지나치게 바쁜 하루였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물 한잔 마시지 못하게 급하게 회사로 갔다. 오후에 있을 IR 자료를 보강해달라는 지시가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출근하자마자 화장실에서 볼일만 보고 바로 자리에 앉았다.  수정 요청 내용이 제법 많았다. 오늘 4시에 IR인데 이걸 지금 수정하라고? 미친 소리 같았지만 그래도 까라면 까야지 별 수 있겠나? 시간이 너무 없었기 때문에 커피를 내릴 겨를도 없었다. 나는 빠르게 자료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1시간 정도 지나자 갑자기 IR 관련한 회의를 하겠다고 대표가 메시지를 보냈다. 아니 이런 걸 할 시간이 없다고요 대표님.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까라면 까야지. 나는 깊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로 갔다.

회의 내용은 별 것도 없었다. 왜 모이는 것인가 싶은 자리였다. 그저 오늘이 중요한 날이니 IR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IR 자리에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저 자료만 잘 수정해서 대표에게 바치면 되었다.

회의를 끝내고 나는 탕비실로 갔다. 이제야 물을 마실 생각이 든 것이었다. 냉수를 떠서 벌컥벌컥 마셨다. 커피를 내릴까 잠시 고민했지만 아직 자료를 정리할 것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다시 자리에 돌아가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오전 내내 IR 자료를 정리하고 수정하는 일만 했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밥 생각이 없었다. 마침 대표는 IR 자료를 수정한 내용을 보고 싶다고 했다. 보아하니 또 마지막으로 수정하려는 것 같았다. 대표는 점심시간인데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애초에 오늘 점심은 패스할 생각이었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대표에게 자료를 보여주니 역시나 수정할 부분이 있었다. 나는 IR 2시간 전까지 자료만 수정하느라 모든 시간을 보냈다. 문제는 내가 오늘 해야 할 일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IR 업무가 내 일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자료를 잘 만든다는 이유로 지금의 TF에 차출되어서 일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내 원래 업무도 하면서 밤새워서 IR을 준비했다. 지난 몇 주간은 정말 죽을 것 같은 날이었다. 처음 IR을 하는 작은 스타트업이라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겨우 겨우 자료를 완성시키고 대표에게 넘겼다. 대표는 흡족해했고 드디어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의 절반이 끝나게 되었다.


일이 끝나기 무섭게 우리 팀의 부서장이 나를 불렀다. IR 준비를 하느라 고생했지만 오늘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빨리 회의를 하고 정리하자고 했다. 팀장은 미안한척했지만 나에게는 조금도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이제야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지만 나는 점심 먹고 오겠다는 말 자체를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물만 부서장에게 물만 마시고 오겠다고 했다.

그래도 오후의 업무는 오전처럼 긴박하지는 않았기에 조금 여유롭게 할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배고프다는 생각마저 사라졌다. 조금 많이 피곤하고 집중력이 흐트러졌지만 그래도 나는 최대한 업무에 몰두하려고 했다. 다행인 것은 우리 회사는 유연 근무제라 오늘처럼 일찍 온 날에는 퇴근을 빨리 할 수 있었다. ‘열심히 일하고 오늘 저녁에 맛있는 것을 먹자!’ 이런 생각으로 나는 바쁘게 타이핑을 했다. 


어느덧 오후 6시 30분이 되었다. 오늘 내가 퇴근 가능한 시간은 원래 오후 5시 30분이었다. 1시간 정도 연장 근무를 한 셈인데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우리 회사는 보통 7시에 퇴근을 하니까 30분 일찍 퇴근할 수 있는 것이었다. 오늘 할 일을 다 마친 나는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IR을 마친 대표가 갑자기 나를 찾았다. 나는 깊은 한숨을 쉬고 대표가 있는 회의실로 갔다. 대표는 오늘 IR 분위기가 어땠는지 나에게 말했고 그동안 수고했다고 격려했다. 나는 너무 배가 고프고 피곤해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대표가 내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말을 했다. 다음번 IR이 금요일에 있는데 이런저런 점을 자료 보강해줬으면 좋겠다고 한 것이었다. 물론 보강할 내용은 적지 않았다. 오늘이 수요일이니 물리적인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오늘 또 야근을 해야 했지만 나는 그냥 퇴근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대표의 말을 아직 끝나지 않아서 나는 한참 동안 회의실에서 나오지 못했다.

회의실을 나오니 어느덧 오후 8시가 되어있었다. 미칠 것 같았다. 이미 야근인 상황이지만 더 이상 일 때문에 야근을 하기는 싫었다. 내일 또 달려야 하지만 그건 내일의 내가 해결해주기를 바라며 짐을 챙기고 퇴근했다. 

집에 가는 길에 무엇을 먹을까 한참 배달앱을 살폈다. 먹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막상 다양한 종류의 메뉴를 보니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그냥 귀찮았다. 물도 얼마 못 마셔서 입술은 바짝 마르고 한 끼도 먹지 못해 비몽사몽 한 상태에다가 머리까지 아팠지만 그냥 자고 싶은 기분이었다. 

집에 도착한 나는 1.5리터짜리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물 배라도 채울 생각이었다. 갑자기 물을 마셔 배가 아픈 것 같았다. 나는 샤워도 하지 않고 옷만 대충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기진맥진했다. 오늘 뜻하지 않게 하루 동안 강제 다이어트를 한 꼴이 되었다. 배가 고프다는 차원을 넘어서 모든 것이 고통스러운 단계에 이르렀다. 나는 핸드폰 알람을 아침 5시로 맞췄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집에 있는 밥을 천천히 먹고 출근할 생각이다. 진짜 내일은 아무리 바빠도 4끼라도 챙겨 먹을 것이다. 반드시 그럴 것이다. 

이전 29화 4월 26일 정병진의 하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