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 작가 Jun 10. 2022

6월 10일 고익태의 하루

어떤 노인

익태가 사는 아파트에는 주민들이 쉴 수 있는 벤치가 있었다. 벤치는 아이들이 노는 것을 지켜볼 수 있게 놀이터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몇 달 전 정년퇴임을 한 익태는 매일 아침 아파트 주변을 산책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익태는 예전에는 인사조차 하지 않았던 아파트 주민들과 친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을 하느라 바쁘게 살았던 익태는 갑자기 할 일이 없어졌다는 것에 허무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새로 사귄 아파트 주민들과 수다를 떠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다.

그런 익태에게 호기심을 자극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중절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의지한 체 걸어 다니는 노인으로 나이는 80세를 넘은 듯했다. 그는 항상 벤치에 앉아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동네에서 노인들이 벤치에 멍하니 앉아있는 것이 신기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가 눈에 띄었던 것은 항상 일정한 시간에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익태가 관찰한 결과 그는 매일 아침 9시, 12시, 3시, 6시. 이렇게 일정한 간격으로 벤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놀이터 방향으로 있는 벤치는 3개 정도였는데 노인은 항상 놀이터 방향으로 오른쪽 벤치에만 앉았다. 그가 하도 일정한 시간에 있다 보니 동네 주민들도 그 시간만 되면 일부러 자리를 피해 줬다. 그렇게 자리에 앉은 그는 30분 정도 멍하니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봤다. 특이했던 것은 그가 항상 같은 옷차림으로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익태는 그의 모습을 보고 동네 주민들에게 그가 어떤 사람인지 물었지만 정확한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익태가 듣기로는 1년 전에 이 아파트로 이사 왔고 아내와 조용히 살고 있는 노인이라고 했다. 좀처럼 범접할 수 없는 무언가를 풍기는 노인이라 그에게 말을 거는 사람도 없었다고 했다.

익태는 노인의 정체가 너무나도 궁금해서 그에게 말을 걸려고 몇 번 시도했지만 그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도 노인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익태도 화나서 그에게 말을 걸지 않기로 했다. 익태는 일부러 다른 주민들과 더 친하게 지냈다.

주민들 사이에서 노인에 대해서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노인이 사실 범죄자라서 저러고 있다는 소문부터 굉장히 성공한 사업가라는 소문, 자식이 죽어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다는 소문까지…. 그 어떠한 소문도 평범한 것이 없었다. 익태는 그런 소문을 들을 때마다 괜히 노인을 뒷담화하는 것 같아서 화제를 돌렸다.


오늘 익태는 평소처럼 아파트 주변을 산책하고 있었다. 익태는 벤치에 앉아있는 노인을 보고 지금 시간이 오전 9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벤치에는 노인 혼자 앉아있었다. 익태는 평소처럼 노인을 무시하고 갈 길을 가려고 했지만 갑자기 노인과 다시 대화를 시도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슬그머니 노인의 옆에 앉아 헛기침을 하고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날이 많이 더워졌지요?”


노인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익태는 기분이 상했지만 노인이 듣던 말던 그냥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기로 했다.


“나는 얼마 전에 은퇴했어요. 수십 년 간 열심히 살아오다가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다는 게 뭔지…. 처음에는 적응이 안 되더라고요.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나가는구나….라는 생각도 들고요.”


익태는 말을 멈추고 침을 삼키며 잠시 예전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대부분 젊은 시절의 익태에 대한 기억이었다. 노인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젊었을 때, 승진을 빨리 했어요. 그때는 그게 소중한 줄도 모르고 내가 잘났다!! 라며 의기양양하게 살았는데, 지나고 나니 별 것도 없더라고요.”


“나는 내가 뭘 했는지 몰라….”


노인이 기나긴 침묵을 마치고 익태의 말에 대꾸했다. 익태는 놀라면서도 노인과 대화하고 싶어 더 가까이 다가갔다.


“와 영감님. 말씀하실 줄 아시네요? 반갑습니다. 나는 고익태라고 합니다. 평범한 무역회사에서 영업일 하면서 평생 지냈습니다.”


익태는 웃으면서 노인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노인은 그런 익태를 슬그머니 보더니 악수는 하지 않고 한숨을 쉬었다. 익태는 내민 손을 슬쩍 치우며 민망해 머리를 긁었다.


“나는 이제 기억이 안 나.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일을 아주 크게 벌려 돈도 번 기억은 나는데 내가 결국 뭘 했는지 모르겠어.”


노인은 놀이터를 바라보며 익태에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름은… 기억나지. 소정수. 이름 때문에 어렸을 때, 소장수라고 불렸지…. 실제로 그런 일도 했고..... 아무튼 정말 많은 일을 했지만 그런 것들은 기억이 제대로 안 나. 어제 뭘 먹었는지도 모르겠고….. 며칠 전 일보다 내가 어렸을 때 일이 더 기억나….”


“그렇군요. 영감님. 아니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으시니 제가 형님이라 부르겠습니다. 괜찮죠? 형님! 그런데 형님은 시간을 항상 잘 지키시네요. 매일 같은 시간에 나오는 거 같던데요.”


“…. 형님이라 그런 말도 오랜만에 들어보는 거 같구먼. 매일 아침 9시쯤에 동네 친구들과 놀고 점심에 밥 먹으러 가고, 오후에 또 나오고, 6시 정도에 집에 들어왔어. 그렇게 친구들이랑 놀기만 했는데….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몸이 늙어 있었어. 젊은 시절 기억이 하나도 안 나. 뭐를 했다는 것 같은 느낌은 있는데 기억이 도저히 안 나…. 여전히 나는 어린아이 같은데 정신을 차리면 몸이 늙어 있고….”


“…그래서 형님이 매일 놀이터만 보고 계시는구나. 저기서 노는 아이들이 형님 친구들 같고 그런 거죠?”


“나도 놀고 싶은데…. 못 놀아….”


“우리 다 너무 늙었어요. 형님이나 나나….”


익태는 노인의 말을 듣고 그가 기억을 점차 잃어가는 병에 걸려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노인은 어린 시절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현실도 자각하고 있어 더욱 허무함을 느끼는 그러한 노인이었다. 익태는 그런 노인이 조금 불쌍해졌다. 어쩌면 그의 모습이 먼 미래의 자신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형님. 가끔 저랑 수다나 떱시다. 나도 몸이 안 좋아서 형님이랑 놀이터에서 놀 수는 없는데 내 대화 상대는 돼주리다. 거 다른 사람들이랑 말 좀 하시고요.”


익태가 이렇게 말을 했지만 노인은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노인은 몸을 파르르 떨며 조금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익태는 노인의 손을 잡아주려고 했지만 노인은 괜찮다는 말만 하고 스스로 일어나 지팡이를 지지대 삼아 아파트를 향해 가기 시작했다. 익태는 그런 노인이 혹시나 쓰러질까 봐 걱정하며 그의 뒤를 쫓아갔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운 노인이었기에 걷는 속도는 매우 느렸다. 익태는 혹시나 노인이 사는 동이 놀이터에서 먼 곳이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노인이 사는 곳은 놀이터 바로 앞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익태가 사는 동이기도 했다. 익태는 현관 비밀번호를 눌러 노인이 쉽게 건물로 들어갈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아파트 현관에서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거리도 노인에게는 대장정이었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2분도 안 되는 거리지만 노인에게는 10분이나 걸렸다. 익태는 이렇게 어려운 걸음을 매일 같은 시간에 그것도 하루에 몇 번씩 하는 노인이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익태는 노인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는 모습까지 지켜보고 나서야 겨우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익태는 마치 자신이 노인의 늙은 아들같이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온 익태는 노인의 모습이 계속 눈에 밟혔다. 그리고 시간을 계속 확인했다. 12시에 노인이 다시 벤치로 갈 테니 그 시간을 잘 맞춰서 노인을 배웅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익태는 11시 45분쯤 1층으로 내려가 노인이 등장하기를 기다렸다. 혹시나 노인이 보이지 않는다면 노인에게 변고가 생겼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익태는 매우 긴장하고 있었다.

11시 52분쯤 노인이 등장했다. 익태는 노인을 따라 나갔고 노인과 함께 같은 벤치에 앉아있었다. 이번에는 아무런 말도 걸지 않았다. 그렇게 익태는 오늘 하루 종일 노인의 뒤를 쫓아다녔다. 6시가 되어서야 익태는 노인에게서 해방될 수 있었다. 조금 귀찮기는 했지만 익태는 노인을 이렇게 돌보는 것을 자신의 하루 일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익태는 이 아파트에서 그런 노인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익태는 소정수 노인을 마중 나가고 지켜볼 예정이다.

이전 15화 6월 9일 조윤의 하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