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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 작가 Feb 17. 2022

2월 17일 임혜영의 하루

까칠한 상사

우리 팀의 팀장은 조금 까칠한 사람이었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일을 할 때 칭찬보다 지적을 많이 했다. 오탈자에 특히 민감했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해오라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그의 취향이 확고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취향은 항상 바뀌었고 지시하는 내용도 그때그때 달랐다. 그래서 결재받을 것이 있는 날이면 팀장의 기분을 살피는 날이 많았다. 그리고 팀장이 최근 관심 있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계속 알아내려고 했다. 그래야 팀장이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사적인 대화도 거의 한 적이 없다. 그나마 운동을 워낙 좋아하는 사람이라 운동 이야기가 나오면 저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나게 자기 이야기를 했다. 그 외에는 점심을 먹을 때나 카페에 있을 때도 가만히 팀원들의 이야기만 듣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실 팀장의 기분과 취향을 아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정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팀원들과의 면담 시간에도 묵묵히 이야기를 듣는 편이었는데 나중에 그때 했던 이야기를 다 기억하고 은근슬쩍 팀원들을 챙겨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우리 팀에서 팀장을 그렇게 싫어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다만 일을 할 때 지나치게 예민하게 받아들여서 조금 힘들 뿐이었다. 아니, 꽤 힘들었다. 

팀장에 대한 나의 감정은 그리 좋지는 않았다. 기껏 한 업무 내용을 뒤엎는 경우가 많았고 팀장의 깐깐한 기준을 통과하기 위해 마음고생을 많이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엄청 싫은 것은 아니었다. 업무 외에는 터치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꼰대스러운 면모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직장인 중 상사에게 불만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딱 그 정도의 사람이었다. 



지난주, 팀장은 우리 팀원들에게 점심 회식을 하자고 했다. 팀장은 은근히 미식가였는데 그래서 다양한 맛집을 알고 있었다. 그날은 정말 괜찮은 파스타집을 추천하며 우리를 데려갔다. 그 파스타집은 예약이 없으면 이용할 수 없을 정도로 꽤 유명한 곳이었는데 팀장은 우리를 위해 예약까지 했었다. 우리는 팀장이 무슨 바람이 불었나?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에 바로 자리에 앉아 메뉴를 골랐다. 어떤 파스타를 먹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같이 메뉴를 보던 팀장은 스테이크도 먹자고 제안했다. 나는 팀 회식비가 뻔한데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고 팀장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저렇게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 나는 의아했지만 그래도 시켜준다고 하니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잠시 후, 기다리던 음식들이 나왔다. 음식의 향과 풍미 모두 훌륭했다. 역시 요새 인기 있는 식당다웠다. 맛있게 먹고 있는데 갑자기 나는 오늘따라 팀장이 말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음식은 잘 먹지도 않으면서 팀장은 자기 이야기를 계속했다. 본인이 예전에 살았던 이야기, 지금 회사에 들어온 계기, 그리고 팀원들을 이끌면서 했던 프로젝트들…. 하지만 듣기 싫을 정도로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았다. 팀장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고 왜 저 사람이 그리 까칠한 사람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자기 이야기를 마친 팀장은 갑자기 팀원들 한 명, 한 명 칭찬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워 당황스러웠다. 팀장이 누군가를 칭찬하는 모습 자체를 회사에 와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팀장은 나를 보면서 내가 일을 꼼꼼하게 챙겨주고 새로운 시야를 제공해줄 수 있어서 고맙다고 말했다. 또한 지난 프로젝트에서 내가 했던 일을 하나하나 말하면서 ‘혜영 씨 덕분에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라고 말하는 팀장을 보며 나는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른 팀원들 역시 갑자기 달라진 팀장의 모습이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너무 맛있는 음식이었는데 이 날 너무 당황해서 음식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식사를 마친 팀장은 법인카드가 아닌 자신의 카드를 꺼내 음식값을 지불했다. 우리는 놀라서 팀장을 말리려고 했지만 팀장은 괜찮다고 말했다. 그리고 팀장은 근처에 카페에서 잠시 커피 마시자고 말했다. 커피는 우리가 사겠다고 말했지만 그마저도 거절당했다. 너무 달라진 팀장의 모습은 익숙하지 않았다.

잠시 후, 카페에 가고 나서야 우리는 팀장이 달라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팀장이 퇴사 선언을 한 것이었다. 충격의 연속인 하루였다. 회사에서만 살고, 회사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 하던 팀장이 퇴사를 한다는 것은 조금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팀장에게 퇴사 이유를 물어보니 그저 쉬고 싶어서였다고 말했다. 더 많은 것을 물어봤지만 다시 예전의 말이 없던 팀장의 모습으로 돌아간 그는 대답을 안 하고 우리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팀장은 우리에게 정말 고맙다고 말했다. 



며칠 후, 회사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팀장이 윗사람과 계속해서 갈등이 있었고 결국 크게 싸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눈밖에 났고 몇 달간 힘들어하다가 이번에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는 소문이었다. 팀장의 성격이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겠다 싶기도 했지만 그런 소문을 듣고 자의 아닌 자의로 나가는 팀장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팀장은 내색하지 않았고 퇴사를 하기 몇 주전까지 여전히 까칠한 모습으로 업무에 임했다. 나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업무에 집중하는 팀장의 모습이 신기했고 어쩌면 이야기가 잘 되어서 떠나지 않는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고 인사팀과 계속 이야기하는 팀장을 보며 이제야 그가 떠난다는 것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퇴사 직전의 팀장은 예전만큼의 까칠함은 없어졌고 그저 온화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다시 며칠 후, 팀장의 후임이 왔다. 외부 경력직인 그는 팀장과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우리에게 친근하게 대했고 회사의 다른 사람들과도 계속 이야기를 주고받는 붙임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며칠 동안 팀장은 새로운 팀장에게 업무를 인수인계했다. 그의 인수인계 자료는 꽤나 완벽했고 새로운 팀장도 이해가 빨랐기 때문에 업무 인수인계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팀장은 퇴사를 했다. 아침 일찍 출근한 팀장은 인사팀으로 가 필요한 서류들을 제출하고 새로운 팀장과 잠시 커피를 마시러 갔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난 후, 팀장이 돌아왔고 팀원들 한 명, 한 명을 찾아와 인사를 나눴다. 평소에 팀장에 대한 불만이 있고 인간적으로 그리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었는데 요 며칠 사이의 팀장을 보니 어쩐지 짠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내 자리를 찾아온 팀장에게 그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업무적으로 그에게 배운 것은 많았다. 팀장은 나를 한참 보더니 가볍게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회사에서 열심히 하면 더 많은 기회가 올 것이라 말했다. 

모든 것을 마친 팀장은 이제 회사를 떠났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를 마중 나갔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맨날 팀장을 욕하던 고대리도 따라 나왔고 몇몇 직원들도 팀장의 마지막 모습을 함께 하려고 했다. 팀장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바쁜데 빨리 자리로 돌아가 일하라면서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떠나는 마지막 엘리베이터를 끝까지 지켜봤다. 가볍게 목례를 하는 팀장의 모습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닫혔다. 

팀장이 떠나니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항상 예민하고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라 일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가 많았는데 막상 이렇게 되니 기분이 참 묘했다. 마냥 좋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끔 기억이 나는 상사 중 한 명이었던 사람인 것 같다. 그가 가는 다른 길에 앞으로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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