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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 작가 Feb 18. 2022

2월 18일 윤상필의 하루

아마란스의 대표

“상필님, 아마란스라는 회사 알아요?”


점심에 밥을 먹는 도중, 대표가 나에게 물었다. 아마란스라…. 아! 며칠 전 뉴스에서 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하는 일이랑 많이 비슷한 분야의 서비스를 준비 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란스요? 저도 며칠 전 뉴스에서 봤습니다. 되게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가진 회사 같더라고요.”


“그 아마란스 쪽이랑 미팅 한 번 주선해봐요. 우리가 진출하려는 분야랑 비슷하면서 다른 곳이야. 미리 협업을 맺어두면 좋을 것 같아요.”


“네 그러면 밥 먹고 한번 컨택 포인트를 알아보겠습니다.”


호기롭게 대답한 나는 밥을 얼른 먹고 사무실로 복귀해 아마란스에 대해서 조사했다. 아마란스는 스마트팜을 하는 회사 중 하나로 최근에 주목을 받고 있던 회사였다. 우리 회사도 작년부터 스마트팜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기존의 회사들과 경쟁하기보다는 같이 상생하며 산업 속에서 함께 성장하는 모델을 그리고 있었다. 나도 사실 회사가 가려는 방향은 알 수 없었다. 입에 발린 말만 하는 것 같았고 원래 하던 일이랑도 살짝 다른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표는 스마트팜에 대해 진심인 것 같았다. 

아무튼 나는 아마란스의 대표에 대해서도 알아봤다. 젊고 열려있는 CEO, 기존의 농부들과 상생하는 구조를 만든 젊은 인재, 투자자들이 좋아할 만한 모든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다 보니 어쩐지 낯이 익었다. 나는 어디서 이 얼굴을 봤었나 잠시 생각해봤다. 근데 얼굴만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이름 역시 내가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그래, 천명진…. 이 이름이 흔한 이름은 아니지….’


나는 천명진 대표에 대해서 더 찾아봤다. 언론 인터뷰를 즐기는 타입이라 그런지 천명진 대표의 신상을 조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가 어느 대학교를 나왔는지 알 수 있었고 이를 역으로 추적해 그의 SNS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팔로워 중에는 내 중학교 시절 친구가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정확히 기억났다.. 천명진…. 너구나.’


나는 좀 더 확실히 하기 위해 천명진과 함께 알던 친구에게 천명진의 근황을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친구의 입에서는 아마라스의 이름이 나왔다.


“걔 요새 사업해, 아마라스인지 뭔지 하는 회사하고 있다는데?”


친구의 말에 나는 이제야 모든 것이 기억났다. 천명진 대표…. 그는 나의 중학교 동창이었다.



중학교 시절, 천명진은 학교에서 가장 유명한 남자아이 중 하나였다. 어릴 때부터 키가 굉장히 컸고 이목구비가 또렷한 잘생긴 얼굴이라 같은 학교 여학생은 물론 근처 학교의 여학생들이 교문 앞에서 하교하는 그를 기다리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때도 연애를 많이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하루는 천명진에게 차인 어떤 애가 하루 종일 앉아서 우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또 어떤 애는 천명진을 증오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천명진은 바람기가 있던 것 같았다. 

동창이라고는 하지만 친구는 아니었다. 아마 천명진은 내 이름을 모를 수도 있다. 같은 반이었던 적도 없고 같이 이야기를 해본 적도 없었다. 아니구나…. 몇 번 급식 먹으러 갈 때 마주친 적도 있었고 같이 축구를 한적도 있던 것 같다. 하지만 여러 무리와 어울리다가 만난 정도라 천명진과 단독으로 대화한 적은 내 기억에 없었다. 

그러나 천명진의 소식을 듣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학교에 있으면 천명진의 연애사를 알고 싶지 않아도 들을 수 있었고 천명진이 누구와 싸웠다는 소식도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주먹도 잘 쓰고 연애도 많이 하는 잘생긴 아이…. 그게 천명진이었다. 주먹을 잘 쓴다고 하지만 흔히 말하는 양아치는 아니었다. 하도 잘난 녀석이다 보니 학교에서 힘 좀 쓴다고 하는 애들이 어설프게 덤빌 때 응징하는 정도였다. 내 주위에는 천명진과 친한 애들일 몇 명 있었는데 그들에게 듣기로는 천명진처럼 착한 애도 없다고 했다. 흔히 말하는 의리도 있는 타입이었던 것이었다. 다만 공부는 그리 잘 못 했던 것 같았다. 학교 선생님들은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애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중학교 3학년 때, 천명진은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유명 기획사에서 천명진을 길거리 캐스팅했다는 말도 들렸고 천명진이 많이 고민했다는 소식도 들렸지만  천명진은 부모님을 따라 결국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니 천명진은 동창이라기보다는 TV에 나오는 드라마 주인공 같은 사람이었다. 실제로 나랑 대화해보지는 않았지만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이리 자세히 알 수 있던 것을 보면 말이다.  아무튼 그 이후로는 천명진의 소식을 들을 수는 없었다.



나는 친구에게 천명진의 연락처를 물었다. 친구는 천명진의 연락처를 알고 있었고 나에게 공유했다. 우리 대표는 회사의 컨택 포인트를 알아봐 달라고만 했을 뿐인데 이제 아마라스의 대표가 된 천명진에게 직접 연락할 수 있는 포인트를 얻은 것이다. 

막상 연락을 하려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냥 일적으로만 접근할까? 아니면 친한척할까? 친한척한다면 나를 뭐라고 소개해야 할까? 얘가 내 이름을 알까? 친구로 접근하는 것이 맞을까? 일로 접근할까?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니 천명진은 분명히 나를 모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현신중학교 나온 천명진 맞지?’라고 말하는 건 예의가 아닐 수 있다. 그래, 이건 일이다. 사적인 추억은 나만 알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그래 비즈니스로 접근하자. 그리고 미팅을 하게 되면, 미팅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자…. 이게 내 계획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천명진의 개인 전화번호로 연락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이 번호를 어떻게 알았냐고 천명진이 묻는다면 나는 또 중학교 이야기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회사 홈페이지를 다시 보니 회사 멤버를 소개하는 곳이 있었다. 그리고 이곳엔 개개인의 회사 이메일이 함께 있었다. 그리고 천명진의 이메일 주소까지도…. 그의 컨택 포인트를 알아내는 건 애초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 대표 성격에 홈페이지를 꼼꼼하게 봤을 리도 만무하고.

명진이, 아니 아마란스의 천명진 대표를 위한 제안 내용을 작성하고 미팅을 하자는 메일을 보냈다. 이런 메일을 보내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지만 오늘만큼 떨리는 날이 없었다. 내가 아는 사람, 그것도 같은 나이, 같은 또래, 동창에게 메일을 보내는 것은 기묘한 일이었다. 

메일을 보내고 다른 업무를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천명진의 전화였다. 메일 하단에 있는 내 번호를 보고 연락을 한 것 같았다. 이렇게 메일을 빨리 보고 전화까지 하다니? 나는 놀랐지만 이내 진정하고 차분하게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리얼빈의 윤상필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아마란스의 천명진이라고 합니다. 메일 너무 잘 봤고요. 저희에게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도 리얼빈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고 항상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이렇게 먼저 연락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몇 년 만에 듣는 천명진의 목소리를 위엄이 있으면서도 친절했다. 그러면서 주도권을 묘하게 자기 쪽으로 끌고 가고 싶어 하는 뉘앙스의 목소리 톤이 섞여 있었다.


“아이고 저희야 말로 감사하죠. 괜찮으시면 다음 주에 한 번 미팅이 가능하실까요?”


“다음 주 좋습니다. 잠시만요……. 다음 주 화요일 15시 어떠세요? 괜찮으시면 저희 회사로 방문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마란스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명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네 좋습니다. 아…. 저희 대표님도 가실 것이라서요. 제가 스케줄만 마지막으로 체크하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대표님도 오시는군요? 너무 좋습니다. 그러면 시간 보고 말씀해 주세요. 다음 주 화요일이면 15시 이후면 다 괜찮습니다. 제가 오시는 곳 위치 문자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네!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짧은 통화가 끝났다. 천명진과 대화를 해본 것은 이게 처음인 것 같다. 묘한 기분이었다. 굉장히 친절하고 예의 바른 말투, 그러면서 은근히 자신을 높이는 미묘한 심리를 보여주는 짧은 대화였다. 사람을 다루는 능력이 꽤나 뛰어날 것 같았다. 미팅에서도 주도권을 빼앗기려 하지는 않을 것 같다.

통화를 마치고 대표에게 가서 시간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천명진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2시간 정도 지난 후, 천명진은 회사 위치와 함께 주차를 할 수 있는 곳을 나에게 보내줬다. 

내심 내가 동창이라는 것을 눈치채 주기를 바라기도 했는데 그에게는 아마 아무런 힌트가 없을 것이고 그러기엔 내가 너무 학교를 조용히 다녀 존재감도 없었을 것이다. 따지면 결국 같은 학교를 나왔을 뿐, 남이나 마찬가지인데 내가 괜히 오버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냥 미팅 때도 티 내지 말고 업무로만 대할까라는 생각도 든다. 월요일에는 천명진, 아니 아마란스에게서 우리가 무엇을 얻어올 수 있을지나 고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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