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녁

만드는 생활

by 소박하며화려한

오후 다섯 시 너머 시곗바늘이 뭉그적 뭉그적 가고 있으면 오늘은 무얼 해 먹어야 하나 하는 고민으로 나도 조금씩 움직여 본다. 집 앞 슈퍼에 가도 딱히 답이 있는 메뉴가 없고 조금 더 걸어서 마트에 가는 것도 귀찮은 요즘이 냉장고 털어먹기에는 좋은 시기이다. 손이 덜 가는 냉동식품들은 벌써 다 먹어버려서 남아있는 식재료들로 고민해보아야 한다.

냉동칸을 열어보니 몇 가지 건어물들이 착착 쌓여있다. 시간을 들여야 얻을 수 있는 반찬들은 준비성이 필요하기에 얼른 머리를 굴려본다. 황태를 볶으려면 먼저 물에 살짝 불려야 하니 일단 꺼낸다. 불릴 동안 멸치를 볶아 없앤다. 서리태콩도 귀퉁이에 빼꼼히 보인다. 콩도 얼른 불려놓고 얼린 시래기도 녹으라고 꺼내놓는다. 이렇게 보니 벌써 반찬만 네 가지다. 냉장고에 숨어있는 식재료들이 이렇게 많았다니.

예전에 읽었던 냉장고에 관한 책이 떠오른다. 냉장고라는 유용한 문명의 발달과 함께 우리들은 많은 식재료를 곁에 쌓아놓고 살게 되었다고 저자는 말했다. 외국 여러 곳을 돌며 냉장고 없던 시절에 식재료를 보관하던 각국의 방식들을 조사하고 책에 풀어놓았었는데 매우 새로웠던 느낌으로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냉장고가 없이 지하 저장고에 병조림이나 피클 형식으로 보관하고 직접 농사를 지어서 요리를 해 먹던 부부 이야기는 그들이 비건이라 가능한 이야기라고 자기변명도 해가면서 읽었었는데.

한국에 사는, 이제 막 37살 딱지를 달기 시작한 주부인 나는 그런 생활은 못하지만 가끔은 그 책의 내용을 떠올리며 살아간다. 분명 필요해서 사놓고도 잊어버리고 꺼내놓지 못한 식재료들로 넘쳐가는 냉장고 안의 냉기를 헤쳐가며 사각지대를 탐험한다. 없으면 허전하고 있으면 천대받는 식재료들은 반찬으로 바뀌는 과정들이 나름의 교훈으로 다가온다. 세상에 나오는 것들은 어떠한 것도 그냥 오는 것은 없구나. 불위에 올려지면 진정 숨겨진 가치를 내보인다. 그리고 그런 음식들이야말로 돈으로 비교할 수 없는 영양분을 내어준다.

잠시 딴생각에 빠진 사이에 콩자반이 조금 탔다. 오늘의 가장 큰 교훈은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구나. 참회하는 마음으로 다시 저녁상 차리기에 몰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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