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을 포기하고 싶은 진짜 이유

사람, 사랑 앞에서 후회왕으로 살아왔던 한 사람의 이야기.

by 기록하는 슬기


6월 말, 나른했던 어느 평일 낮이었다. 친한 동생 K에게 전화가 왔다. 그리고 그녀는 "여보세요"라는 말은 생략한 채 대뜸 이렇게 말했다.


"언니! 7월 초에 언니 바빠? 나 제주도 가도 돼?"


별일 없을 것 같다는 내 한 마디를 듣고 K는 곧장 비행기 표를 샀다. 그리고 7월 초, K는 2박 3일 일정으로 제주도에 왔었다. 그녀의 제주도행의 목적은 단순했다. 그녀에게 제주도의 멋진 자연환경, 예쁜 카페, 유명한 맛집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K가 제주도를 찾은 이유는 오직 나를 보러 오기 위해서였다. K와는 근 2년 만의 만남이었다. 육지에서도 서로 먼 거리에 살기도 했고, 지난 시간 동안 휴무 없이 바쁜 스케줄로 일하고 있는 K였다. 회사 사정 상 갑작스럽게 4일간의 휴가가 주어졌다며 내가 있는 제주도로 날아온 것이다.


2년 만의 만남이었지만 한 달에 한 번은 전화로 서로의 안부를 진하게 묻고 답하는 사이라 그런지 어제 본 것처럼 편안했다. K와 내가 친해지고 이렇게 오랫동안 이런 관계가 유지될 수 있는 점 중에 하나는 우리 둘 다 '술과 대화'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번 제주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저 집에서 그동안 미뤄왔던 술과 대화를 하자고 약속했다.


우리 대화의 주된 내용은 30대 초반인 두 명에게 닥친 현실 속 고민들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것이 있었다. 현재 짝사랑 중인 K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K의 짝사랑남에 대한 이야기였다. K는 이번 연도 봄부터 지금까지 홀로 짝사랑을 해오고 있다. 술기운이 돌자 K는 짝사랑남의 마음을 당최 이해할 수 없다며 내게 그와 주고받은 문자 메시지 일부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사람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은지 속없이 '헤헤헤~' 웃으면서 궁금하지도 않은 그 사람의 사진을 여러 장 보여줬다. 실제로 본 K는 전화로 들었을 때 보다 이미 그 사람에게 이미 푹 빠진 상태였다.






그리고 일주일 전, K와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새벽 4시까지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원래는 요즘 말동무가 없는 나를 위해 K가 전화를 한 거였지만 통화 도중 뜬금없는 K의 고백 때문에 우리의 대화는 새벽 내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서로의 일상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K에게 물었다.

"요즘 그 짝사랑남이랑은 어때? 만나진 못했지? 연락은?"


K는 깊고 느린 한숨을 푸욱 쉬고는 내게 말했다.

"언니. 나 근데 이제 그 남자 안 좋아할라고.

그리고 그런 말 있잖아. 진짜 인연이면 언제든 다시 만나게 된다고. 그냥 나 그렇게 생각할래."


누가 봐도 그 남자도 K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지만, 여러 상황 때문이든 어떤 이유에서든 K에게 선을 긋고 있는 이 상황 속에서 K의 지친 마음이 이해가 갔다. 하지만 나는 K가 여기서 끝낸다고 하니 뭔가 아쉬웠다. K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전에 그녀가 내게 해 준 말이 떠올랐다.


몇 개월 전, K는 내게 그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었다.

"언니. 요즘 내가 신기한 게 뭔지 알아? 그 사람을 좋아하는 내 모습을 보면 내가 이렇게도 사람을 좋아할 수 있구나 느껴져. 이전에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감정이 거짓이라기보다는 지금 이 사람에 대한 감정이 너무 새롭고 소중해. 나 이 사람, 이렇게 몇 년이고 오랫동안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아."


사실 K의 짝사랑남의 감정 보다도 일단 나는 K의 감정이 중요했다. K가 이 사람에게 얼마나 진심이었고, 지금도 진심인지 알기에 나는 안타까웠다. 만약 K의 마음이 이제는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거라면 중간에 끝을 내든 말든 아무런 상관은 없다. 하지만 K는 그 이유보다도 이 상황이 힘들어서 그 사람을 포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K는 내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도 그 사람을 포기해야 하는 이유들을 하나둘씩 늘어놓기 시작했다.


K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는 K에게 물어봤다.

"네가 저번에 그랬잖아. 그 사람의 마음에 상관없이 혼자서도 오래 좋아하고 싶다고. 그런 사람이라고.

아주 만약에 지금 네가 그 사람을 포기했어. 근데 나중에 그 사람이 너를 좋아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러면 너 어떨 것 같아?"


감정이입을 잘하는 K는 그 상황 속에 이미 들어간 듯 말했다.

"아오.. 그러면 미치지..! 나 진짜 하... 엄청 후회하겠지..!! 잠도 못 잘 것 같은데?! 그 사실 알면.."


벌써부터 뼈저린 후회를 하는 듯한 K에게 나는 답했다.

"네가 좋아한다는 표현을 그 사람한테 했긴 했어도 한 번도 제대로 둘이 만나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본 것도 아니라며. 게다가 예전에는 오히려 그 사람이 너를 좋아했었잖아. 근데 그때도 그 사람이 너한테 확실하게 표현 안 해서 너는 몰랐었잖아. 그래서 이렇게 너네 둘이 엇갈린 거 아냐.

그 사람을 좋아하고 말고는 네 결정이고 네 마음인데, 옆에서 내가 보면 지금 관두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나 싶어. 그런 감정을 갖게 해주는 사람, 일생을 살면서 만나기 힘들잖아.

한 번 잘 생각해봤으면 좋겠어.

이게 진짜 너의 진심이 다해서 그만두는 건지, 아니면 지금 당장 네가 이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 이 사람을 포기하고 싶은 건지."




지금 솔직해지지 않으면, 결국 언젠가 '후회'라는 감정이 너를 찾아가게 될 거야. 내가 겪었듯이. <사진 : 2021. 05. 제주 서귀포>




K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조금은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 그 사람 엄청 좋아. 지금도 너무 보고 싶어.

진짜 언니 말 들어보니까 내가 가볍게 좋아한다고는 말했어도, 둘이서만 만나서 진지하게 대화 나눠본 적이 한 번도 없네..

그냥 그만두고 싶었던 것 같아 나는. 이 감정, 이 상황 때문에 이 사람을 포기하고 싶었던 거지.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그리고 나는 K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진짜 이유를 말했다.

"나도 네 마음 이해해. 인연이라면 1년 뒤든 몇 년 뒤든 어떻게든 어디서든 만나게 된다는 그런 말. 예전에 나도 그 말을 믿었어. 아니, 믿고 싶었지. 그런데 그것도 그 당시에 후회 없이 내 마음에 솔직했고, 끝까지 노력했던 사람들이나 쓸 수 있는 말이더라. 조금 해보다가 힘들 것 같으니까 포기하고, 상처 받을 것 같으니까 미리 겁먹고 뒤돌아서는 사람들이 해서는 안 되는 말 같더라고.


내가 이런 말 하는 이유는.. 너도 알지? 지금까지 내가 그렇게 사람을 만났고 대했잖아. 늘 겁먹은 채로, 상처 받을 준비를 미리 한 채로. 그래서 항상 먼저 떠날 궁리만 했고 실제로 먼저 손 놓았던 것도 다 나야.


근데 내가 이렇게 살면서 내가 뭘 깨달았냐면, 내가 가만히 보니까 이게 내가 꼭 사람을 대할 때만 이러는 게 아니었더라고. 나는 이런 식으로 '삶'을 대해왔더라고. 어떤 일이든 사람이든 작은 행동이든 뭐든 늘 그렇게 도망갈 준비부터 하고 시작했어. 그리고는 중간에 포기하고 싶을 때는 매번 '나를 위한 척' 그럴듯한 이유들을 만들면서 포기했어.


그러고 나서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는 것들 있잖아. 그때 내가 조금만 더 했었으면 잘 됐을 수도 있던 상황이었고, 그런 사람이었다는 거. 그런 사실들을 나중에 알게 됐는데.. 나한테 돌아오는 건 너무 깊고 날카로운 후회라는 감정밖에 없더라. 그게 너무 오래가는 거 있지.

그래서 나도 이 습관은 정말 고치고 싶어서 노력 중이야.

나를 속이면서 포기하는 습관, 나를 속이면서 어떤 것이든 먼저 손 놓는 습관.

지금 너랑 통화하는데 잠깐이지만 내 모습이 보였던 것 같아서, 그래서 왜 그만두는 건지 물어봤던 거야.


네가 말했듯이 너무 좋고, 지금도 보고 싶다면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게 잘 될지 안 될지는 모르잖아.

산다는 게, 세상이라는 게 그렇잖아. 앞으로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아무도 모르잖아.

사랑도 똑같은 것 같아. 그 상대방의 마음도 이 세상 같아서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아무도 몰라.

함부로 예측할 수 없어.


그러니까 나는..

지금 네가 진심이라면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사실은 이 말은 K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이제는 제법 내가 원하는 일, 행동에 있어서는 쉽게 포기하지 않는 끈기 같은 것이 생겼다.

하지만 나는 '사랑' 앞에서는 여전히 겁쟁이 중에 최고 겁쟁이다.

여기저기 "우리 후회 없이 사랑해요!"라고 말하고,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이면서,

누구보다 나는 사랑 앞에서는 '후회왕'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K에게 나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K의 사랑을 응원하는 마음도 물론 진심이었지만

그 안에는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는 나의 사랑과 그에 대한 나의 용기를 응원하는 그 마음'을 남몰래 숨겨놨다.


K는 우리의 기나긴 대화가 끝날 무렵,

'자신의 진심을 속이려고 했었다고, 이렇게 진심을 안 이상 자신은 여기서 포기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리고는 앞으로도 그 사람을 지금처럼 사랑할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런 K에게 농담을 섞은 듯, 하지만 진심 100%를 담아 이렇게 말했다.

"너! 무조건 그 사람이 잘 될 거야! 진짜 달콤한 사랑을 하게 될 거야!

왜냐고? 내가 너의 사랑을 끝가지 응원할 거니까!"


그러고 보니 이 말 또한 K에게만 하는 말인지, 나에게도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안녕하세요.

오늘 글은 제가 자체적으로 연재 중인 메일 구독 서비스 '슬기 드림 8월 호'에 실렸던 이야기 중에 하나입니다.


이번 연도 1월 흰 눈이 펑펑 내리던 제주 서귀포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처음으로 연재를 시작했던, '슬기 드림 메일 구독 서비스'였습니다. 한 달, 한 달 무사히 연재를 마칠 때마다 뿌듯한 감정보다는 신기한 감정이 더욱 컸습니다. 사실은 이 메일 구독 서비스를 시작하고 싶었던 건 오래전이었거든요.

'내가 이 구독 서비스를 시작하면 구독자가 있을까..?'

'내가 매일매일 정해진 시간에 글을 써서 보낼 수 있을까..?'

이런 두려움과 의심들이 자꾸만 저를 망설이게 만들고, 해보고 싶은 일을 미루게 만들었어요.


작년 11월, 용기 내어서 온 제주라는 장소 때문이었을까요.

'그래도 이왕 제주도까지 내려와서 매일 글 쓰기로 마음먹은 거, 한 번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2021년 1월부터 슬기 드림 구독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물론 중간에 '한 번 쉬었다가 가야 하는 건 아닐까, 이대로 쭉 연재를 하는 게 맞는 걸까'하는 고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고민들이 한 번 찾아올 때면 꽤 무겁게 다가왔지만, 그럼에도 항상 그 고민에 끝에는 '그래도! 내 글을 쓰자. 나와 나의 이야기를 기다려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나라는 사람과 나의 꿈을 지켜봐 주고 응원해주는 그 누군가가 있다면 일단 해보자. 내 이야기와 나의 행동, 내 삶으로 보답하자.'라는 결론이 저에게 남아있었습니다.


2021년, 한 여름의 절정을 달리고 있는 8월.

어떤 것이든 절정에 다 달했다 건 이제 곧 끝나간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죠.

그래서인지 이런 무더운 여름날에 지치고 힘들기도 하지만, 금세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걸 생각하니 조금은 아쉽기도 하네요.


여러분의 지난여름이 무탈하셨기를, 그리고 앞으로의 여름-가을-겨울 또한 늘 다행인 날들로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행인 나날들 속에 저의 이야기가 위로와 힘을 전달드렸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제주에서 여전히 글 쓰며 살아가고 있는, 아직까지는 글 쓰며 살아남고 있는,

기록하는 슬기 작가의 장기 프로젝트 '슬기 드림 8월 호' 구독자 모집 소식을 전해드리며 오늘 이야기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항상 고맙습니다.


-기록하는 슬기, 이슬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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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외롭지만 그 외로움을 즐기며, 씩씩하게,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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