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닮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던 그때, 내 마음을 돌아보며.
며칠 전이었다. 새로운 영어 단어장을 만들기 위해 책상 위에 나란히 꽂혀있던 세 개의 작은 수첩들을 하나씩 펼쳐보기 시작했다. 그중 두 개의 수첩에는 내가 썼다고는 믿기지 않을 '토익 정복!!'이라는 네 글자의 허언이 적혀있었다. 떠올리려면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대학교 졸업하던 그 시절을 힘겹게 머릿속으로 한번 그려주고는 그 옆에 세워져 있던 알록달록한 작은 수첩을 집어 들었다.
이 수첩을 빠르게 훑어보니 여기에는 2~3년 전 떠났던 세계 여행과 워킹 홀리데이 시절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정보나 드문 드문 남긴 간단한 일기, 그리고 그때그때 느꼈던 감정들이 적혀있었다. 나는 이렇게 오래전 내가 쓴 일기를 우연히 발견해서 다시 읽을 때마다 느껴지는 이 오묘한 감정을 좋아한다. 분명 내가 쓴 일기장이지만 꼭 누군가의 오래된 일기장을 몰래 보는 듯한 이 느낌. 낯설지만 익숙한 타인의 지난 기억과 감정 속을 여행하는 느낌이랄까.
무심코 펼쳐본 그 수첩 속 한 페이지에는 폰트 크기 4pt 정도의 손글씨로 손바닥 만한 공간이 빽빽이 채워져 있었다. 그렇게도 꾹꾹 눌러 담고 싶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진 나는 그 작은 글자들을 읽어 내려갔다. 한 페이지로 끝내지 못했던 2년 전 어느 날의 이야기는 세 번이나 종이를 넘기고 나서야 끝이 났다. 그 기록 속 주인공은 K였다.
K는 2년 전 가을 어느 날 인도 여행 중 한 숙소에서 우연히 만난 여행자였다. 처음 그를 숙소 로비에서 마주친 그 순간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여기저기 뜯어진 낡은 그의 큰 배낭과 쪼리 모양 그대로 탄 그의 발등이 얼마나 오랜 시간 그가 길 위에 있었는지 말해주는 듯했다.
같은 숙소에 머물게 되면서 K를 포함한 다른 세 명의 친구들과 자연스레 가깝게 지내게 되었고, 우리는 매일 밤 길고 긴 새벽을 함께 했었다. (물론 맥주와 음악과 함께.) 그때 유독 K와 나는 더 친해졌었는데, 그 첫 번째 계기는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그 후로도 K와 나는 서로 좋아하는 작가, 좋아하는 여행지, 좋아하는 영화, 좋아하는 음식마저 비슷했고 우리는 그럴 때마다 동그래진 두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너도?", "나도!"를 외쳤다.
오랜 시간 머물렀던 그 도시에서 K와 나는 친했던 다른 동행을 하나, 둘씩 먼저 보내야만 했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온 마음을 다해 함께 했던 누군가를 먼저 보내는 일은 장기 여행 중 내가 가장 어려워했고 힘들어했던 순간이다. 동행들이 탄 택시, 버스의 뒷모습이 눈 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고는 축 처진 어깨와 슬픔이 잔뜩 묻은 얼굴을 숨기지 못한 채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시 숙소로 걸어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놀랐던 건 내 옆을 나란히 걷던 K 또한 나와 너무도 같은 몸짓, 표정, 목소리였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우리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던 동행 C가 떠난 그날 밤이었다. 밀려오는 아쉬움과 아련함에 홀로 숙소 주변 벤치에 앉아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그때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고, 고개를 돌려보니 K였다. K는 아무 말 없이 내 옆자리에 앉더니 이어폰 한쪽을 건넸다. 자연스레 그의 이어폰을 오른쪽 귀에 꼈다. 3초 정도 지나자 내 귓가에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가수, 그리고 그 가수 노래 중에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만큼은 이별의 슬픔보다는 나와 너무도 닮은 K를 보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가수 이야기는 우리가 한 번도 나눠본 적도 없고, 그 가수는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가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K에게 물어봤다.
"너 이 노래 어떻게 알아?"
그러자 K는 내게 되물었다.
"너도 이 노래 알고 있었어?"
그때 뭐랄까. 그저 나와 너무 비슷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K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노력 없이도 이미 나와 너무 비슷해서 나의 아픔과 슬픔도 함께 공감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닐까. 이런 사람이라면 어쩌면 내가 마음을 열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렇게 K와 애매한 친구사이를 유지해가고 있을 때쯤, K는 내게 그의 마음을 고백했다. 사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시나리오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선뜻 K에게 '나도 네가 좋아.'라고 말할 수 없었다. 당시 K와 나의 그다음 계획은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지구 정반대 편으로 떠나는 것이었다. 이 곳을 떠나는 날짜까지 미리 정해진 이 와중에 K와 연애를 시작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K에게 갖는 감정이 이성적 호감인지 아닌지 그 조차 확신이 없었다.
나는 K에게 솔직하게 내 생각을 이야기를 했고, K는 이 모든 상황을 다 알고 고백했기에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K는 떠나기 전 남은 시간만이라도 잘 지내자고 했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과 같은 여행은 며칠 계속됐었다. K와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나는 K의 얼굴 표정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그는 자주 우울해 보였고, 슬퍼 보였고, 외로워 보였다. 하지만 그는 그 감정들을 숨기려고 노력하는 듯 보였다.
맞다. 그와 나는 '비슷한 사람'이었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나와 비슷했기에 그의 우울함, 슬픔, 외로움, 공허함과 같은 감정들이 내 눈에는 너무도 잘 보였다. 생각해보면 그가 외로운 눈동자로 입은 웃고 있을 때, 그의 눈에 비친 나 또한 같았을 것이다.
K와 내가 각자 다른 나라로 떠난 후에도 나는 한동안 K의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가 마냥 그립다기보다 내가 그에게 어떤 감정을 갖고 있었는지 그 정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도 K에게 호감이 있었지만 너무도 먼 곳으로 오랫동안 떨어져야 했기에 시작하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그저 또 사랑 앞에서 겁이 나서 도망갔던 걸까? 아니면 결국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던 걸까?'
그에 대한 감정이 또렷한 한 단어로 정의 내려지지 않은 채 시간은 흘렀고 서서히 나는 내 두 다리를 딛고 있는 그곳에서의 삶에 집중했다. 그렇게 그의 기억과 감정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 후 두 번의 계절이 지났을 때쯤 우연히 K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가 새로운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이야기였다. 궁금해진 마음에 sns에 들어가 K와 그녀의 사진을 봤다. 사진 속 K와 그녀는 너무도 행복해 보였다. sns에서 보이는 그녀의 나이, 외모, 하는 일, 성향 등은 나와 정반대로 보였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진 속 K의 두 눈은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녀와 있을 때만큼은 외로움, 우울함, 슬픔을 잊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바로 그날이다. 그 소식을 듣고 그의 사진을 본 그날 나는 지금 내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수첩에 K에 대한 기록을 남겼던 것이다. 세장의 페이지에 빼곡히 그에 대한 생각, 감정들을 남기고 나서야 나는 내 마음이 정리되었던 것이다.
낯선 어떤 여자와 행복하게 웃는 K를 보고 처음에는 각종 질투, 미련과 같은 감정에 당황스러웠지만 결국 맨 마지막에 든 생각은 '다행이다.'였다. 나와 닮은 K의 상처와 아픔, 슬픔이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만나 잠시라도 잊히길 바랐다. 나는 나와 닮은 K가 그 누구보다 행복하기를 바랐다. 헤어질 때 서로에게 했던 약속, '어디에서든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지내.'라는 그 약속을 먼저 지켜줘서 고마웠다.
오래된 수첩 덕분에 잊고 있던 K와의 기억 여행을 마치고 나서야 더 명확하게 그때 나의 마음이 보였다.
나는 그때 K를 좋아하면서도 결국은 좋아할 수 없던 것이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그는 나와 비슷했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외로움, 우울함, 슬픔 그 모든 것 마저 나와 닮았기에 나는 그를 좋아했지만 결국은 좋아할 수 없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에 대한 나의 마음은 딱 거기까지 였던 것이다.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도 모를 K에게 멀리서나마 나의 마음을 전해 본다.
헤어지기 전 약속했던 그 약속을 지금도 너는 여전히 지키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나와 닮은 너의 외로움, 우울함, 공허함, 슬픔이 조금은 더디게 너를 찾아갔으면 좋겠다고.
나와 너무 닮은 네가 어디에서든 누구와 함께하든 늘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오늘도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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