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쟁이 나그네가 훈자에서 만난 따뜻함에 결국 외투를 벗는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내 마음은 점점 훈자에 매료되고 있었지만, 훈자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었다. 이른 아침과 밤늦게 급격하게 떨어지는 기온, 미지근한 물이라도 나오면 감사하게 되는 열악한 난방시설, 매일매일 나는 정전(정전이 기본이고 가끔 전기가 들어온다고 보면 된다.), 그에 따라 자연스레 매번 끊기는 와이파이 등.. 기본 인프라가 빈약해 생활환경은 내가 이전에 갔던 여행지 중에 힘든 곳 top 3 안에는 들었었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말하는 치명적인 단점은 아니다. 내가 꼽은 훈자의 단점은 '식당(먹을거리)'이었다. 오후 늦은 시간에는 바자르에 있는 식당들이 대부분 문을 열지만 오후 12시가 넘은 시간에도 대부분의 식당은 오픈조차 하지 않았고, 그마저도 날마다 오픈 시간이 제각각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던 것이 '오늘은 어디 가서 뭐 먹지..?'였다.
이런 상황 속에 우리 숙소가 위치한 제로 포인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규칙적인 시간에 문을 여는 한식집(아리랑 식당) 하나가 있었다. 내가 여행했을 당시 그 식당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메뉴판도, 간판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상태였다. 인터넷 레시피를 보고 만들었다는 어설픈 한식이었지만 그래도 한식 비슷한 음식을 먹을 수 있기에 우리는 그곳을 자주 갔었다. 하지만 메뉴도 다양하지 않고, 메뉴 두 가지만 시켜도 1시간을 기다려야 했기에 우리는 그곳에 약간의 실증을 느껴갔다.
(현재는 이 식당 운영을 잠시 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훈자 4일 차, 그 한식당 옆 옆 건물에 아담한 호텔과 함께 운영하는 식당이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다. 오늘만큼은 가격이 조금 비싸더라도 한 끼 제대로 먹자며 그곳으로 향했다. 점심시간에 딱 맞춰가서인지 식당에는 앉을자리가 없었고, 직원들은 너무 바빠서 우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다시 아리랑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의 주인이자 셰프인 이삭(Essak)은 우리를 여느 때와 같이 반갑게 맞아줬고 우리는 김치찌개와 오므라이스를 주문했다. 역시나 1시간 가까이 기다리고 나서야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 그릇이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사실 이전부터 밥을 먹을 때 이삭은 늘 우리 옆 테이블에 앉아 이것저것 물어봤었다. '훈자 투어는 어디 어디 가봤느냐', '혹시 너네 이글네스트 가고 싶지 않느냐', '가고 싶다면 내가 내 친구한테 말해서 싸게 지프차를 구해주겠다.' 등등.. 우리는 이삭의 질문을 그저 훈자에서 사업을 하는 한 사람의 비즈니스적인 질문으로 받아들였다. 이삭이 우리를 '친구'라기보다 '고객'으로 대한다고 생각했다.
그날도 이삭은 음식을 갖다 주고 우리 옆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대화는 흐르고 흘러 어쩌다 보니 '이삭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이삭은 한국이나 일본으로 나가 자영업 관련된 일을 배우며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훈자에 들어오는 관광객 중 한국인과 일본인을 자주 만났던 이삭은 특히 한국사람에 대한 기억이 참 좋았다고 했다. 하지만 파키스탄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 나가기 위해 관광비자마저도 받기 어렵다며 우리에게 넋두리를 했다. 그런 이삭의 고충과 그의 꿈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삭이라는 사람이 조금은 다르게 보였다.
이야기를 나누며 금세 밥을 다 먹은 우리는 이삭에게 훈자에서 '카페 드 훈자'(유일하게 에스프레소 기계로 만든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 말고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다른 카페가 있는지 물어봤다. 카페 드 훈자는 분위기도, 커피 맛도 좋았지만 가격대가 부담스러워 매일 가기에는 여행자의 지갑은 너무도 가벼웠다. 그 말을 들은 이삭은 곰곰이 생각을 해보더니 우리에게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하고는 갑자기 가게 밖으로 나가 어딘가로 뛰어갔다.
10분 정도 지나 급하게 가게로 뛰어 들어온 이삭은 헉헉 거리며 숨을 골랐다. 주변 동네 주민들에게 물어보고 왔다고 생각한 나는 이삭에게 물어봤다.
"이삭, 여기 동네 사람들도 거기(카페 드 훈자)밖에 없대지??"
그때 이삭은 한쪽 팔을 우리 테이블을 향해 뻗더니 주먹을 쥔 손을 내보였다. 그 손 안에는 휴지가 쥐어져 있었고, 그 휴지를 우리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삭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네가 원하는 건 아니지만 이거라도 먹을래?"
돌돌 말려있는 휴지를 펼쳐보니 그 안에는 갈색빛 인스턴트 원두커피 가루가 들어있었다.
그 커피가루를 보자마자 나랑 H언니는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다. 둘 다 아무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같은 마음이었다. 나보다 더 여린 H언니의 두 눈에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이 인스턴트 원두커피 가루는 훈자에 있는 작은 슈퍼 마켓에서도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이삭이 우리말을 듣자마자 헐레벌떡 뛰어나가 급하게 얇은 휴지 한 장에 감싸 온 이 커피가루는 어디에 가도 구할 수 없다. 나는 지금까지 이삭이 우리를 반겨주고, 인사하는 것이 단지 비즈니스적인 행동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 휴지에 돌돌 말려 가져온 커피 가루를 보고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한 순간에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숙소에서 쉬고 있던 우리에게 이삭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몇 분 후 우리 숙소 쪽에 들를 테니 잠시 나오라는 메시지였다. 해가 떨어지면 급격히 추워지는 훈자의 날씨 때문에 언니와 나는 오후 6~7시가 넘으면 방 밖으로는 거의 나가지 않았었다. 우리 둘은 왜 갑자기 이 저녁에 부르는지 영문도 모른 채 오들오들 떨며 우리 방과 멀리 떨어져 있는 숙소 리셉션으로 향했다. 몇 분 뒤 이삭이 하얀 봉지를 든 채로 우리에게 나타났다.
이삭은 "이거 우리 집 농장에서 기른 복숭아야. 아직 덜 익었는데 너네 한번 먹어봐."라고 하며 우리에게 대뜸 봉지를 내밀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인 걸까. 오늘 커피에 이어 이삭은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불어넣으려고 작정한 거라도 될까. 오늘 낮에 같이 훈자에서 나는 과일 이야기를 하며 복숭아를 먹어봤냐는 이삭의 질문에 아직 못 먹어봤다고 했었다. 그 대화를 기억하고 이삭은 자기네 집에서 직접 기른 복숭아를 따서 우리에게 먹어보라고 이 저녁에 찾아온 것이다. 우리는 또 한 번 이삭에게 고마웠고, 그간 우리가 이삭을 오해했다는 생각에 미안했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과 눈으로 세상을 볼 수밖에 없다고 하지 않던가. 나는 한국에서도 항상 사람을 잘 믿지 못했다. 자라면서 그렇다 할 큰 상처를 받지는 않았지만 타고난 마음이 약하고 무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관계의 끝에 내 가슴에는 잔 상처와 잔 흠집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어른'이라는 가면을 쓰고 만나는 어떤 인간관계에서든 먼저 온 마음을 다해 믿음을 준 적도, 사랑을 준 적도 없었다. 훗날 상처 받고 아파할 내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노심초사하며 그들의 마음을 먼저 살피고 내 나름의 필터를 거쳐 그들을 바라봤고, 멋대로 판단했고, 그 후에 내 마음을 줬다. 이런 비겁한 겁쟁이가 나였다. 하지만 훈자에서 만난 사람들은 나와는 달랐다. 그들이 갖고 있는 따뜻한 시선과 마음으로 사람을 바라봤고, 그렇게 대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이솝 우화 중 한 에피소드가 있다. 해님과 바람이 한 나그네의 외투를 벗게 하기 위해 둘이 내기를 한다. 바람이 강하게 나그네에게 몰아붙이지만 그럴수록 나그네는 펄럭이는 외투를 더욱 꽁꽁 싸맨다. 그다음에는 해님이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햇살을 나그네에게 비추자 나그네는 외투를 벗는다. 훈자에 있을 때 한 사람, 한 사람을 겪으며 꼭 내가 그 나그네가 된 것 같았다. 늘 사람에 대해 의심을 품고, 믿지 못하던 나를 무장해제시킨 것은 결국 따뜻함의 연속이었으니까.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지금까지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공감과 댓글은 글 쓰는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