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말했듯 훈자에서 난 여행자가 아니었나 보다.
워낙 잠자리에 예민한 나는 여행 중 70% 이상 깊은 잠에 못 들었었다. 특히 훈자의 날씨는 전형적인 고산지역의 기후여서 건조함은 기본이었고, 낮에는 뜨거운 태양이 강하게 내리쬐어 반팔만 입어도 되는 기온이었다가 태양이 퇴근하고 나서부터 기온은 뚝-떨어져 최소한 경량 패딩 정도는 입어야 할 기온으로 변했다. 그러니 새벽에는 안 봐도 비디오다. 게다가 만성 비염을 달고 사는 '나'라는 잔병 부자 여행자는 공기의 온도차만으로 일단 잠에서 여러 번 깬다. 숙소에서 두꺼운 담요를 한 장 더 받아왔는데도 새벽에 추워서 자주 깨는 그 순간만큼은 한국의 보일러가 빵빵하게 돌아가는 뜨끈뜨끈한 방바닥이 그리웠다.
그렇게 오늘도 차가워진 코를 한 손으로 감싸 안고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우리 방은 숙소의 리셉션과 꽤 멀리 떨어져 있어서 와이파이가 잡히지 않지만 이제는 익숙하게 와이파이가 되지 않는 휴대폰으로 잘도 논다. 옆 침대에 자고 있는 H언니는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오늘은 조용히 먼저 활동을 개시해본다. 익숙해진 회색빛 찬 물에 머리를 감고 부지런을 떨어 손빨래까지 마쳤다. 혼자 숙소 주변을 산책하고 돌아오니 그제야 H언니는 일어났다. 우리의 오늘 계획은 '각자 할 일을 하며 휴식을 취하는 것'이었다. 인도에서 훈자에 오고 나서 숙소를 알아보느라, 파키스탄 할아버지들과 투어를 다니느라, 현지인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느라 우리끼리 차분하게 휴식을 취하 지를 못 했었다. 그리고 여행을 다니면서도 일을 하고 있는 H언니는 오늘은 꼭 인터넷을 써야 한다고 했다. 나도 여행 중에 블로그에 꾸준히 여행기를 연재하고 있었는데 북인도, 훈자를 여행하면서 열악한 인터넷 사정과 함께 포스팅이 뚝 끊긴 지 언 3주가 넘었다. 그래서 오늘은 H언니랑 같이 노트북을 들고 카페 드 훈자 (정전이 쉼 없이 나는 훈자에서 가장 큰 발전기를 돌리는 곳이라 신호는 약하지만 와이파이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로 향하기로 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H언니와 백팩을 메고 나란히 메인 바자르를 향해 걷고 있었다. 그때 오토바이를 탄 사람이 우리 옆을 지나가며 "Hello~~~"라고 인사했다. 훈자에서 지내는 요 며칠 동안 이미 친해진 훈자 사람들도 있었고, 잘 모르더라고 많은 훈자 사람들은 여행자들을 보고 반갑게 인사해줬다. 이제는 나도 익숙하게 우리를 스쳐가는 오토바이에 탄 누군가에게 웃으며 "Hello~"라고 인사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오토바이가 우리 앞쪽에 급하게 정차하더니, 뒷자리에 앉아있던 헬맷을 쓴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어디서 많이 본 실루엣이었다. '응? 저.. 성큼성큼.. 긴 다리... 어디서 많이 봤는데.. 누구였지..?' 빠르게 두뇌 회전을 하고 있는 찰나 그 사람은 헬멧을 벗었고 우리를 보고 활짝 웃어 보였다.
"뭐야..!! 벡!!!!!!!!!!!!!!!!!!!!"
H언니와 나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소리를 꽥 질렀다.
파키스탄에서 처음 사귀게 된 현지인 친구이자 당시 파키스탄 밤 버스의 분위기가 무서워서 한껏 움츠려있을 때 먼저 다가와준 그 친구, 벡이었다. 길깃 버스정류장에서 헤어질 때 급하게 교환한 sns 아이디가 잘 못 되어 어느 누구도 먼저 연락을 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우연히 길거리에서 다시 만나다니. 1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우리 셋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훈자 길목에서 서로 손을 붙잡고 방방 뛰며 반가워했다. 벡은 길고 요란한 우리의 인사가 끝나고 오토바이를 운전하고 있던 분을 자신의 사촌 형이라며 소개해줬다. 그리고 벡은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인데 밥을 먹지 않았으면 같이 먹으러 가자고 했다. 원래 계획은 카페에서 간단히 빵과 커피로 한 끼를 때우려고 했지만 이렇게 우연히도 반갑게 벡과 만났는데 바로 헤어지기는 아쉬웠다. 벡은 맛있는 로컬 음식점을 알려주겠다며 자신 있게 우리를 리드했다.
파키스탄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먹는 볶음밥인 '브리야니'가 유명하다는 맛집에 도착했다. 사촌 형까지 우리 넷은 한 테이블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벡은 원래 훈자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교육을 위해 부모님께서 도시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그래서 훈자에는 1년에 2~3번씩 친척들을 만나러 오는데, 그때 우리를 만났다고 했다. 함께 점심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던 도중 벡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너네 파키스탄에 오니까 어때? 훈자는 어때?" 이 질문은 벡뿐만 아니라 훈자에서 만난 여러 현지인들이 묻던 질문이었다. 우리는 느낀 그대로 훈자에 오고 나서 좋은 점을 이야기해줬다. 그러자 대뜸 벡은 하나의 부탁이 있다면서 우리에게 밥을 먹고 어디에 갈 것이냐고 물어봤다. 우리는 카페 드 훈자에 가서 컴퓨터로 작업을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벡은 사촌 형과 헤어지고 우리가 있는 카페로 오겠다고 했다. 우리는 내심 벡이 말하는 '부탁'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오늘따라 카페 와이파이 연결이 자꾸만 끊어져 언니도, 나도 해야 할 일을 하나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카페에 온 지 1시간도 채 안된 시간, 그때 벡이 우리가 있는 2층의 테이블로 걸어왔다. 벡은 자연스레 우리 자리에 합석을 하고 본격적으로 아까 못다 한 이야기를 했다.
"나 유튜브 채널을 하나 운영하려고 하는데, 너희가 거기 출연해줬으면 좋겠어.. 그냥 내가 질문을 하고 너희는 거기에 대답만 하면 돼."
"응? 그러면 얼굴도 공개되는 거야? 무슨 내용의 영상을 만드는 거야?"
"얼굴도 찍어야지. '외국 여행자들이 파키스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내가 질문을 할게. 그러면 너희는 대답만 하면 돼. 해줄 수 있지?!"
벡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우리에게 영상 제작에 도움을 달라고 했다.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정말 별거 아닐 수 있지만, 언니와 나는 어떻게 편집이 되어 올라갈지 모르는 채널에 얼굴까지 공개하면서 출연하기에는 부담스러웠다. 우리는 그러면 얼굴 공개를 하지 않고, 인터뷰를 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벡은 얼굴 공개를 꼭 해달라고 밀어붙였다. 언니와 나는 그때부터 약간 당황을 했다. 벡한테 받은 고마움을 갚고 싶었지만 이렇게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는 도움을 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벡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영상을 찍자고 강력하게 말했다. 나보다 싫은 말을 더 잘 못하는 H언니는 거절을 못 해 끙끙거리고 있었다. 이럴 때는 그래도 단호하게 말해주는 게 서로를 위해 나은 거라 생각하고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벡에게 말했다.
"벡, 정말 정말 미안한데.. 우리는 얼굴 공개까지 하기에는 힘들어. 너를 도와주고 싶지만 이런 방법은 아닌 것 같아. 미안해. 차라리 얼굴을 비공개로 하던지 다른 방법이 있다면 우리가 협조할게!"
벡은 나의 말을 듣더니 그제야 우리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러면 영상을 찍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 말을 전할 때 벡에게 미안했지만, 우리의 신상과 관련된 부분이니 만큼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벡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연락을 한다며 그 자리를 떠났다.
H언니와 나는 벡이 간 후에도 카페에 남아 각자 할 일을 마치고, 뭔가 찜찜한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우리 숙소 바로 옆방에는 우연하게도 훈자 둘째 날 투어를 함께 다녀온 할아버지와 아저씨가 지내셨는데, 들어오는 길에 그중 대장 할아버지를 마주쳤다.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같이 저녁을 먹지 않겠느냐고 하셨지만 우리는 오늘 함께 저녁을 먹고, 웃고, 이야기하기에는 이미 심적으로 지쳐있었다. 우리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계속 함께 밥을 먹자는 할아버지의 제안을 오늘만큼은 우리도 끝까지 거절했다. 조금 전에 벡에게도 오히려 거절을 할 때 확실히 못하고 미안한 마음에 질질 끌게 되니 그 끝도 애매하게 났던 것 같았기에 이번에는 일부러 틈을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께는 우리 둘 다 정말 몸이 좋지 않다고 다시 한번 정중히 말씀을 드리고 H 언니와 나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각자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불이 들어오지 않은 컴컴한 방에서 우리 둘은 진이 빠진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니.. 우리.. 오늘도 결국 할 일도 못하고, 제대로 쉬지도 못했네..?"
"내일은 꼭 우리 각자 할 일도 하고, 하루는 좀 쉬자! 근데.. 괜히 마음이 안 좋다. 벡한테도 할아버지들한테도.."
"그러게.. 그렇다고 해달라는 것 다 들어줄 수도 없는 거고.. 저 사람들의 마음을 이미 느껴서 그런지 거절도 어렵다 언니.."
여행 중에는 생각지도 않은 곳에 오고 나서 "내가 여기 왜 있는 거지?"라고 느끼는 순간 진짜 여행이 시작되는 거라고 길에서 만난 누군가가 그랬다. 요즘 부쩍 상상도 못 한 일들, 그런 사람들을 만나 '어? 지금 나 뭐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순간, 순간 들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정말 여행을 하고 있구나..'라고 느껴진다. 훈자 사람들의 관심과 친절함이 아주 조금은 피곤하다고 느껴진 오늘 하루. 이런 감정이 조금은 어려웠고, 버거웠다. 장기 여행을 시작한 지 120여 일이 넘은 오늘, 여행자로서는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아마 다른 곳에서 이런 상황을 겪었다면 단순히 '기분이 나쁘다, 좋다, 미안하다.'정도로 간결하게 내 감정을 표현할 수 있었겠지만 이곳에서는 그게 잘 안된다. 하루아침이면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는 여행자에게 약간은 복잡하고 무거운 감정을 느끼게 한 것은 훈자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는 진심이 있었고, 또 우리가 그 진심을 느꼈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곳에서 만났던 여러 훈자 사람들과 나눴던 대화 중 Ctrl+c, ctrl+v를 한 것처럼 여러 번 나누었던 문장들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너희 파키스탄에 오니까 어때? 훈자는 어때? 훈자 사람들은 어떤 것 같아?"
"파키스탄도, 훈자도 이번에 다 처음인데 너무너무 좋아. 특히 우리가 만난 훈자 사람들은 정말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같아.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훈자 사람 모두가 우리에게 친절해. 어느 여행지에서도 못 느꼈던 친절함이야."
"훈자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의 가족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훈자에 온 사람들을 우리 집에 온 손님이라고 생각하지. 훈자 사람들은 여기까지 찾아온 손님들(여행자)한테 고마움을 느껴. 훈자에서 지낼 때 우리의 손님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나중에 훈자를 떠나고 나서도 훈자를 떠올리면 행복한 기억으로 가득했으면 좋겠어. 우리는 그거면 돼."
다른 건 몰라도, 아마도 그들이 바라는 대로 나중에 훈자를 떠나고 나서도 오랫동안 훈자를 그리워하고 또 그 안에서 받았던 따뜻한 관심과 친절을 떠올리면서 나는 행복한 미소를 지을 것 같다. 괜스레 오늘 벡에게도, 할아버지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가득한 밤이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오늘도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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