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인연은 몇 번의 우연을 통해왔을까요?

훈자 마을에서 만난 우연한 인연, 그리고 우리 삶 속의 인연을 떠올리다.

by 기록하는 슬기


오늘 아침 식사를 뭘로 해야 하나 고민하던 우리는 오랜만에 숙소 레스토랑(투숙객들에게만 간단한 메뉴를 제공한다.)에서 때우기로 했다.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다시 우리 방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갑자기 앞서가던 H언니가 어딘가를 보더니 "꺅!!!!!!"하고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라 바라본 반대편에서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실루엣의 두 명이 언니와 같이 고성을 지르며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둘의 얼굴을 알아보고 놀라움과 반가움에 나는 반자동으로 양팔을 벌려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이분들을 처음 만난 건 훈자로 넘어오기 전, 인도의 국경도시 암리차르에서 가장 유명한 행사인 '인도-파키스탄 국기 하강식'을 구경하러 갔던 날이었다. 행사 요원은 우리를 외국인 좌석으로 안내를 해주었고, 외국인 자리에는 몇몇의 서양인들만 앉아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국분들로 보이는 부부 두 분이 먼저 앉아 계셔서 나는 그 옆자리에 냉큼 앉았다. 반가운 마음에 먼저 인사를 하려던 찰나 들려오는 그분들의 대화 소리는 일본어였다. 어쩔 수 없이 두 분과는 짧은 인사만 나누었다.


인도 암리차르에서 본 '인도-파키스탄' 국기 하강식



그날따라 유독 강렬했던 태양 아래 우리는 아이스박스를 메고 지나가는 아저씨를 불러 세울 수밖에 없었다. 아이스크림 포장지를 뜯음과 동시에 행사는 시작되었고, 일단 나는 아이스크림 껍데기를 내 자리 바로 아래에 두었다. 그때 갑자기 옆 자리에 앉아 계셨던 아저씨께서 내 쓰레기를 집어서 본인의 쓰레기 봉지에 챙기시고는 같이 버려준다고 하셨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나는 '이따가 행사가 끝나고 내가 버리려고 했다고, 그리고 감사하다고' 말씀을 드렸다. 인상이 좋으신 아저씨께서는 '괜찮다'라고 하시면서 인자한 미소를 지어주셨다.


생각보다 긴 국기 하강식이 지루하다고 느껴질 무렵 아주머니께서는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내게 '어디서 왔느냐', '혹시 파키스탄으로 갈 거냐'라고 물어오셨다. 안 그래도 H언니와 나, 단둘이 파키스탄으로 넘어가는 게 무서웠었는데 잘 됐다 싶어 아주머니께 여쭤봤다.

"저희는 내일 파키스탄으로 넘어가요. 그러면 혹시 두분도 파키스탄 훈자로 가시나요?"

"아.. 글쎄요. 우리도 계획을 짜고 여행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잘은 모르겠어요.. 근데 저희도 파키스탄은 내일이나 내일모레쯤 넘어가려고요."

"저희는 파키스탄 여행은 하지 않고, 훈자로 바로 넘어갈 것 같아요.. 혹시 훈자 가시는 거면 같이 넘어갈까 해서 여쭈어봤어요."

"음.. 확답은 못 주겠네요.. 앞으로의 계획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우리 우연히 만날 수 있으면 또 만나요!"

이렇게 이 두 분을 처음 뵙게 되었고,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다.


그다음 날, 인도에서 파키스탄으로 넘어가던 날이었다. 파키스탄 이미그레이션에서 짐 검사를 하기 위해 길게 늘어진 줄 속에서 있을 때였다. 건너편에서 누군가 조금 큰 목소리로 "Oh!!!!!! Hello!!!"라고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어제 만났던 일본인 부부였다. 파키스탄 이미그레이션에서 우리를 아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조금도 예상하지 못해서 더욱 놀라웠고, 반가웠다. 우리보다 조금 일찍 오셨던 아저씨 아줌마는 이제 막 이미그레이션 짐 검사까지 마쳤다며 밖에서 기다릴 테니 택시를 같이 타자고 하셨다. 모든 검사를 마치고 나가 이야기를 나눠보니 아쉽게도 우리와는 가는 방향이 달랐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수많은 택시기사들과 가격 흥정이 오가는 혼돈의 분위기에서 정신없이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헤어진 지 10일이 지난 오늘, 이렇게 다시 우연히 두 분을 뵙게 된 것이다. 게다가 더 신기한 것은 훈자에 많은 숙소 중에 하필이면 같은 숙소였고, 또 바로 우리 옆 방으로 들어오신 것이었다. 아줌마 아저씨를 이렇게 우연히 세 번이나 만나게 되다니. 오래전부터 들어왔던 한 문장을 아줌마 아저씨게 해드리고 싶었다.

"우연이 세 번이면 인연이래요.."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 그 전 두 번의 만남 동안 길게 대화를 나눈다거나 심지어 차 한잔을 함께 마신 적도 없었지만 아줌마 아저씨도 우리와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여행지로 보편화되지 않은 나라나 도시에 가서 느끼는 낯섦은 때로는 설렘보다 두려운 감정을 더욱 크게 가지고 온다. 그때 우연히 만나는 우리나라 사람, 혹은 우리의 이웃나라인 동아시아 여행자들만 봐도 느껴지는 특유의 친숙함과 안정감이 있다. 인도라는 나라에서, 그리고 인도와 파키스탄 국경에서, 마지막으로는 파키스탄 훈자에서 우연이 겹쳐서였을까. 아저씨와 아줌마 그리고 H언니와 나, 우리 넷은 함께한 시간에 비해 서로에게 더욱 가까워져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다음날 넷이 함께 검은 빙하를 볼 수 있다는 호퍼로 투어를 다녀오기로 했다.



특별한 우연으로 만나게 된 인연만큼 내가 정말 좋아하던 두 분.




아줌마 아저씨와 내일의 일정을 모두 결정짓고, 언니와 나는 방으로 들어와 한참 동안 아줌마 아저씨와 다시 만나게 된 게 너무 신기하다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반가움과 신기함이 오가는 감정 속에 지금까지의 여행에서 만났던 길고 짧은 인연들이 떠올랐다. 여행을 하며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모두 어쩌면 아줌마 아저씨를 만나게 된 것처럼 '우연'이 여러 번 겹쳐 나와 만나게 된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만난 건 인도 델리에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어느 길거리 위 찰나 같은 순간이었다 할지라도 그 한 번의 만남이 있기까지 여러 번의 우연과 우연이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꼭 여행에서뿐만 아니라 내가 태어나 자란 곳, 한국에서 만난 모든 인연도 결국은 이와 같지 않을까.

한국에서 맺어진 다양한 인연들을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우리가 왜 가까워지게 됐는지 그 과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여간 신기한 일이 아니다. '학교가 같아서', '같은 반이어서'로 당연히 생각했던 우리의 인연이 다르게 다가왔다. '왜 하필 내가 그 연도에 그 학교로 입학을 했고', '10개나 되는 학급에서 왜 나는 3반에 배정을 받았는지', '그리고 왜 하필 입학식 날 너는 내 옆자리에 앉았는지'를 떠올려보니

우리는 엄청난 우연의 연속이었다.



일상 속 인연도 모두 하나같이 엄청난 우연을 동반한 신기한 인연이었고, 낯선 길 위에 인연도 그러했다. 꼭 새로운 장소, 시기에 만나야 특별한 인연이 아니었다. 결국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갔거나 오랫동안 지키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셀 수 없는 우연이 겹쳐 만나게 된 대단한 인연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인연이 오래가느냐 못 가느냐의 차이는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는 보이지 않는 마음과 더불어 눈에 보이는 노력의 유뮤에 따라 달라진다.



오늘도 역시 정전이 나서 컴컴한 방 안, 침대에 누워 별은커녕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색 천장을 바라본다. 그냥 내 곁에 오래 있어서,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당연한 나의 사람들이 천장 위를 둥둥 떠 다닌다. 그리고 작은 다짐을 해본다. 결코 당연하지 않았던 그 엄청난 인연을 더욱 잘 지켜야겠다고, 그리고 내일은 와이파이가 되는 곳을 찾아가 연락을 꼭 해야겠다고.. 그렇게 한참 동안 나는 별이 보이지 않는 천장을 바라봤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지금까지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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