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urist가 아니라 guest라고요?

훈자에서 만난 사람들이 나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by 기록하는 슬기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꼭 체력장 다음날처럼 온몸에 알이 꽉 배긴 느낌이었다. 30시간 이동의 여파는 생각보다 강했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돌려 옆 침대에서 누워 휴대폰을 보고 있는 H언니에게 걸걸한 목소리로 건넨 내 첫마디.

"언니.. 우리 어제 사 온 사과 어디 있지..?"

맞다. 더 자고 싶었는데 배가 고파서 깬 '나'라는 사람이다. 어제 훈자에 들어오기 전 알리아바드 시내에서 훈자 가는 지프차를 구하는 와중에 우리는 그 맛있다는, 그 유명한 '훈자 사과'를 사 왔었다. 눈곱도 때지 않은 채 퉁퉁 부은 얼굴로 사과를 봉지에서 꺼내 대충 물에 헹궈 티셔츠에 슥슥 닦아냈다. 왠지 훈자에서 먹는 '훈자 사과'는 훈자의 바깥 풍경을 보며 먹고 싶었다. 우리 방문을 활짝 열고 화창한 햇살에 오늘은 더욱 선명히 보이는 설산을 보며 아담한 사이즈의 사과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역시는 역시'라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었다. 씹으면 씹을수록 달달한 물이 쭉쭉 나오는 사과를 입에 한가득 넣고 눈 앞에 펼쳐진 설산을 바라보니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와.... 이게 훈자의 매력인가..? 왠지.. 나 훈자 좋아할 것 같아..'

(뒤돌아보니 이 순간, 내가 훈자에 반하게 된 것 같다.)



훈자에서 맞는 첫 번째 아침, 훈자 사과와 훈자에서만 볼 수 있는 저 풍경. 여기에 반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오늘 우리는 일단 숙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해 훈자 마을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나 호텔에 발품을 팔기로 했다. 일단 H언니와 나는 차갑고 뿌연 색깔의 훈자 워터(실제로 훈자에서 수돗물을 틀면 회색빛 물이 나온다.)에 빠르게 샤워를 마치고 큰 배낭에 다시 짐을 꾸역꾸역 밀어 넣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우리 방문에 노크를 해왔다. H언니가 문을 열고 나가보니 우리와 같은 숙소에서 머물렀던 파키스탄 할아버지 한 분이 서 계셨다. 어제저녁 숙소 다이닝룸에서 할아버지 두 분, 아저씨 한분과 간단한 인사를 했는데 이분들은 파키스탄 라호르에서 이곳 훈자까지 여행을 오신 거라고 하셨다. 평소 현지인이나 낯선 사람에 경계심이 많은 나는 일단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방 안에서 주의 깊게 들었고, H언니는 자연스레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눴다. 들어보니 할아버지들은 차가 있어서 오늘 파수(Passu, 훈자 북부의 작은 마을로 지대가 상당히 높고 빙하를 볼 수 있는 곳)를 지나 쿤제랍 패스(파키스탄과 중국 국경) 쪽으로 투어를 다녀올 계획인데 같이 가지 않겠냐는 이야기였다. 언니는 내게 할아버지가 같이 투어를 가자는데 어떻냐고 물어왔고,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다고 언니에게 말했다. 그 할아버지들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같이 차를 타고, 어딘가를 간다는 것 자체도 마음에 걸렸고, 영어로 소통도 잘 안될 것 같아 불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니는 내게 그래도 나쁜 사람 같지는 않으니 한 번 같이 가보는 게 어떻냐고 다시 물었다. 계속되는 언니의 설득에 "ok..."를 찜찜하게 내뱉고 우리는 그 차 위에 올라탔다.




여행을 다니며 가장 어려운 게 뭐냐고 묻는다면 바로 길 위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 그들의 '진짜 속마음'을 구별하는 일이다. 나는 일부러 동행을 만든 곳(인도, 파키스탄 훈자)을 제외하고는 따로 미리 동행을 만들지 않았고 혼자 다니다가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만 동행해왔다. 나는 특히 현지인들의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지 않고 무조건 의심하고, 외면해왔다. 그래서 조금 전 그 할아버지가 같이 투어를 가지 않겠냐고 제안했을 때도 처음 든 생각은 '저 사람들 이상한 사람 아니야?'였다. 어쩔 수 없이 언니의 설득에 같이 찜찜한 마음으로 할아버지들 차에 올라탔지만 함께 하면 할수록 이번에는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할아버지들, 아저씨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같은 여행자로서 제안하셨었고, 또 배려 넘치는 분들이셨다. 그들의 호의는 어떤 나쁜 의도를 숨긴 호의가 아닌 정말 '호의(好意)'였다. (덧붙여 영어로 소통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할아버지들이 나보다 영어 훨~씬 잘하셨다.)



훈자에서 첫 번째 투어를 함께 해주신 분들



할아버지 두 분, 아저씨와 함께 먼저 훈자에서 가까운 호수이면서 그 물빛이 꼭 CG 처리한 것 같은 비현실적인 에메랄드 빛 호수인 아따바드를 구경하러 갔다. 나는 북인도 판공초 호수 물빛이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울 거라고 확신했었는데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호수를 제대로 감상하기도 전에 파키스탄 현지인들이 나와 언니를 보고 사진을 찍자고 줄을 섰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 줄을 서서 사진을 찍어줬다.) 인도에서도 셀카를 함께 찍고 싶다는 현지인은 자주 만났었지만 그것보다 그 열기가 뜨거웠다. 이곳에는 외국인 여행자가 드물어서 그런지 총을 메고 있는 군인까지 와서 사진을 찍자고 할 정도였다. 나중에는 정말 연예인처럼 사람들에 둘러싸여서 "sorry~ sorry~"라고 하며 급하게 도망치듯 그 자리를 나왔어야 했다.




[아따바드 호수(Attabad Lake)는 2010년 산사태로 인해 훈자 강이 막히면서 만들어진 천연 호수이다. 그 당시 몇 개의 마을이 물에 잠기는 대참사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그 후로 훈자에서 파수를 가려면 이 아따바드 호수에 배를 띄워 건넜어야 했는데, 2015년 몇 개의 터널을 뚫고 도로를 만들고 나서부터는 도로를 이용해 왕래가 가능하게 되었다. 현재 이곳은 이전의 대참사의 슬픈 기억을 뒤로하고 아름다운 호수 빛 덕분에 파키스탄 국내에서도 각광받는 관광지가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몇십 명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슬픈 사연이 있는 호수이기도 하다.]










파수(Passu) 마을 안까지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멀리서 보이는 파수 사르의 산맥들은 라다크에서 보았던 갈색 돌산을 연상케 하면서도 뒤로 보이는 365일 눈이 녹지 않는 설산이 또 다른 웅장함을 더했다. 그리고 쿤제랍 패스에 가기 전 우리는 점심을 먹으러 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할아버지들이 추천해주셔서 시킨 메뉴는 파키스탄의 가정식 종류의 음식이었고, 다행히 나는 입맛에 잘 맞았다. 한 할아버지께서는 잘 먹는 나를 빤히 보시더니 꼭 자신의 손녀딸 같다며 귀엽게 바라봐 주셨다. 식사를 모두 마치고 언니와 나는 덕분에 차를 타고 편히 다니는 게 너무 감사해서 우리가 점심을 대접해드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중 대장 할아버지께서 진지한 표정으로 "이거 우리가 내는 게 당연한 거야. 너희는 내지 마."라고 하셨다. 어제 버스에서 만난 벡도 그렇고, 할아버지도 그렇고.. 마음이 불편해서 다시 한번 할아버지께 나는 말했다. "이러면 저희 마음이 불편해요. 이거는 저희가 살게요..!" 그리고 곧바로 할아버지께서 한 마디를 하셨고, 그 한 마디는 더 이상 나에게 아무 말도 못 하게 했다.

"You are not just tourists, you are our guests."


"너희는 단지 관광객이 아니라, 너희는 우리의 손님이야."라는 말. 지금까지 어떤 나라를 여행하면서 들어보지도, 심지어 어느 푯말에서도 보지도 못한 한 마디였다. 어제는 벡이 아침식사를 사주며 "훈자에 가는 손님인데 내가 이 정도는 당연히 대접해야지."라는 말을 듣고도 한참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자꾸만 그 한마디가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었는데 이번에 할아버지께서 하신 저 한마디는 앞으로 어느 곳을 여행한다 해도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파수 가는 길에 창문 너머 카메라를 자꾸만 들게 만들었던 파수 산





파수에 도착해서 할아버지들과 아저씨와 함께




점심 식사로 먹었던 파키스탄 가정식 반찬들




가는 길에 사과 과수원을 발견했다. 산지에서 직접 맛보는 유명한 훈자 사과와 훈자 말린 살구. 이 맛은 아직까지 절대 잊지 못한다.




파키스탄-중국과의 국경인 쿤제랍 패스는 높은 고도에 있어 설산을 가까이 볼 수 있다.







[쿤제랍 패스(Khunjerab pass)는 파키스탄과 중국의 국경으로 해발 4,693m에 위치해 있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경'이다. 파키스탄과 중국을 잇는 카라코람 하이웨이의 가장 높은 지점으로 일명 '하늘길'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곳은 국경이자 또 관광지로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실제로 중국을 통해 파키스탄 훈자로 들어오는 관광객들은 이 국경을 통해 들어온다.]




유쾌하게 우리 모두는 중국과의 국경인 쿤제랍 패스까지 구경을 하고 다시 훈자 마을로 돌아가고 있었다. 때는 9월, 훈자의 가을이 찾아오고 있을 시기여서 해는 생각보다 빨리 떨어지고 있었다. 도로는 포장이 잘 되어있었지만 높은 산맥들 사이를 구불구불 곡선을 타며 조심히 운전을 해야 하는 길이었다. 우리의 대화 소리만 가득하던 차 안에 갑자기 '퍽-'하고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갓길에 일단 차를 세우고 우리 모두는 차에서 내렸다. 차 여기저기를 살피던 할아버지께서 타이어가 펑크가 났다고 하셨다. 다행히도 스페어타이어가 있다며 갈아만 끼우면 되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우리를 안심시켜주셨다. 그런데 타이어 교체 중에 한 부품이 어디론가 빠졌고, 주변은 어두워서 그 부품이 보이지 않았다. 언니와 나까지 우리 모두 그 부품을 도로 여기저기 찾아 해메였다. 그래도 다행히 할아버지께서 작은 부품을 찾으셨고 다시 타이어 교체를 시작하셨다. 이미 차 밖으로 나온지는 시간이 꽤 지났고, 고도가 높은 지역이라 점점 날은 추워지고 있었다. 언니와 나는 '우리 오늘 숙소로 무사히 잘 들어갈 수 있을까..'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때 어느 차 한 대가 우리 바로 뒤에 깜빡이를 켜고 정차를 하더니 운전자가 바로 내려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무엇인가를 물어보는 듯했다. 그 둘은 너무 친근하게 이야기하길래 이미 알고 있는 사이인가 싶었다. 그러고 그 차에 타 있던 젊은 청년 4명 모두 우르르 내리더니 타이어 교체하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단 10분 만에 타이어를 갈아줬다. 그들은 예의 바르게 할아버지들께 인사를 깍듯하게 하고 바로 차에 타서는 시끄러운 음악을 다시 틀고는 쌩-하고 출발했다.


'응? 이게 뭐지? 10분 만에 무슨 일이 있던 거지?' 싶을 정도로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고 그들은 그 자리를 훅 떠버렸다. 나는 할아버지께 원래 저 청년들과 아는 사이냐고 물어봤다. 할아버지는 웃으시면서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너무 신기하다며 어떻게 처음 보는 사이에 살갑게 다가와서 자신의 일처럼 도와주느냐며 놀랍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이런 대수롭지 않은 일에 왜 이렇게 혼자 감동을 먹냐며' 오히려 나를 더욱 신기하게 쳐다보셨다.



항상 낙석과 산사태에 주의하고 운전해야 하는 도로였다.



갑자기 나타난 청년들이 타이어 교체를 도와주고 있다.



그리고 한 번 생각해봤다. 지금 같은 상황에 내가 운전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갓길에서 타이어를 갈고 있다면 나는 도와줬을까? 나라면 '도와줄까?'라는 생각만 하고 그 차를 지나쳐간 후 아마 백미러로 그 모습을 멀리서만 지켜만 봤을 '지나가는 행인 1'에 지나치지 않았을 것 같다.


훈자라는 동네에 오고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은 '이상하다.'였다. 그리고 '이상하다'라는 생각 뒤에는 '과연 나라면?'이라는 질문들이 내게 화살처럼 꽂혔다. 그리고 자주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우리나라, 우리 동네에 여행 온 누군가에게 무조건 좋은 음식, 편안한 여행을 베풀며 대접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연 나는 지금까지 어땠었나 돌아보게 되었다.

'낯선 곳에서 온 누군가를 위해 먼저 다가간 적은 있었나? 아주 작은 미소라도 지어준 적이 있었나?'

무조건 경계하고 외면하고 나만을 위한 여행을 했고, 그런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니었나 싶었다. 조금 불편하고, 조금 귀찮아도 결국 그 불편함과 귀찮음이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세상을 움직이게 한다는 것을 직접 내 피부로 느낀 순간이었다.

어두운 도로 위 희미하게 보이는 회갈색 산맥을 바라보며 이제는 저 산맥의 색깔로 변해버린 내 마음을 떠올려봤다. 그리고 조금 때 타고 더럽혀진 마음을 이제는 꺼내야겠다 싶었다. 겉으로 밝은 색으로 화장을 한다고 해서 결국 그게 진짜 내 것이 아니듯 그 마음을 자꾸 가리고 숨기기보다 꺼내서 훈자의 따뜻한 햇빛에 나쁜 곰팡이 같은 마음들은 날려버리고 싶었다.



딱 24시간 전 H언니와 나는 훈자에 실망하며, 훈자를 언제 떠날지 계획했었다. 하지만 훈자에서 보내는 두 번째날 밤, 우리는 점점 이전의 훈자 여행자들과 같이 훈자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슬기야. 오늘 어땠어? 그래도 좋았지? 할아버지 따라가서?"

"응.. 좀 의외였어. 난 혹시라도 사기꾼들이나 그럴 줄 알고 또 의심했거든.. 근데 훈자에서 만난 사람들 왜 이렇게 다 친절한 거지? 부담스럽게.. 아니, 괜히.. 미안하게.."

"우리 저 할아버지들 떠나는 날 꼭 우리가 좋은 한 끼 대접해드리자. 선물도 뭐 하나 해드릴까? 편지도 쓸까?"

"그러자! 근데 언니.. 훈자 좀 좋아지는 것 같지 않아? 어제보다 좀 더 좋아진 것 같아.."

"응.. 좀 짜증나게 점점 좋아지려고 하네.. 사람들이랑 정들면 안 되는데.."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오늘도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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