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투고 일지 ep.9 원고 투고 하자마자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두 번째 원고 투고를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약 80곳의 출판사에 부지런히 원고 투고를 했다. 지금까지 받은 답장은 모두 '출간 방향이 맞지 않아~'로 시작되는 거절 메일이었다. 이번 출판 기획은 나름대로 시장성이 있는 글과 콘셉트를 뽑아 만들었는데 결과는 처참했다.
작년에도 그랬지만 80개 정도의 출판사에 원고 투고를 보냈다는 것은 에세이를 출간하고 있는 출판사 중 80%의 출판사에는 문들 두드렸다는 뜻이다. (반자비나 자비 출판을 제외한 출판사이다.) 이제는 투고할 출판사를 찾는 것조차 또 다른 미션이었다.
강남에서 일이 있는 날이면 교보문고에 들려서 '에세이 신간' 코너로 갔다. 실제로 새 책을 출판하는 출판사도 보고 책의 퀄리티도 보기 위해서였다. 대부분의 출판사는 이미 내가 투고를 한 곳이었다. 그래도 간간이 처음 보는 출판사의 이름도 발견할 수 있었고 그때마다 책에 맨 뒷장에 나와있는 출판사 이메일을 적어놓았다.
8월 둘째 주 수요일이었다. 총 8곳의 출판사에 원고 투고를 이어나갔다. 이제 정말 몇 개의 출판사가 남지 않았기 때문에 이전보다 더욱 간절해진 마음으로 '제발.. 제발..'을 속으로 되뇌었다. 집중해서 메일을 다 보내고 한숨을 돌릴 때쯤, 010-XXXX-XXXX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딱 느낌이 왔다. 이 번호는 출판사일 것 같았다. 지금까지 투고를 하면서 출판사에서 전화 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내 느낌이 그랬다. 떨리는 마음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이슬기 작가님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그런데.. 어디시죠?"
"아, 오늘 보내주신 원고 투고 메일 보고 연락드립니다. A 출판사입니다."
맞았다! 정말 출판사에서 온 전화였다. 목소리로 듣기에는 나이가 지긋해 보이셨는데, 자신을 출판사 대표라고 소개하셨다. A 출판사는 대표인 자신이 모든 책을 직접 계약 한다며 내가 보낸 기획서와 샘플원고를 모두 다 잘 읽어보셨다고 했다.
이어서 대표님은 내 원고 중에 어떤 원고가 참 좋았다고 콕 집어서 말씀해 주셨다. 요즘 젊은이들 감성에 잘 맞아떨어질 것 같다면서 내가 쓴 원고는 시장에 내놓아도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셨다.
예전에 다른 작가분 원고 투고 후기에서 읽었는데, 이렇게 출판사 대표님이 기획서와 원고를 읽고 바로 전화(메일)를 하는 경우는 확- 꽂힌 경우라고 했다. 그래서 대부분 출판 계약이 비교적 쉽게 성사된다고 들었다. 나에게도 이런 일이 생기다니.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대표님의 목소리가 그렇게도 달콤할 수 없었다.
대표님은 내 원고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 내가 쓴 '작가 소개' 글에 대해 이야기하셨다.
"슬기 작가님~ 소개글을 보니까 여행을 엄청 많이 다녀오셨더라고요. 집에 돈이 많은가 봐요~?"
아무리 농담이라고 할지라도 갑자기 이런 선 넘는 질문을 한다고? 얼굴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한테 갑자기 "집에 돈이 많은가 봐요~?"의 멘트는 아무리 생각해도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기분이 좋지 않아도 질문은 질문이니 나는 답했다.
"아닙니다. 다 제가 아르바이트하고, 직장 다니면서 돈 모아서 떠난 여행이었어요."
무례한 농담이라고 생각했던 이 질문은 농담이 아니었다. 대표님은 2절을 이어갔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집이 어렵거나 상황이 안 좋으면 이렇게 여행 다니기 힘들죠~ 아무튼 어느 정도 여유가 있으니까 여행 갔던 거 아니겠어요?"
그리고는 '본론'에 들어갔다.
"아니, 우리 출판사가 아무나랑 책을 내지 않아요. 얼마 전에도 유명한 교수님이 우리 출판사에서 책냈어요. 그 교수님도 책 낼 때 몇 백만 원 투자를 했어요. 그래서 말인데.."
그 뒤로 이어진 진짜 본론은 이것이었다. '책이 출시되면 바로 작가가 300부를 무조건 사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후 10분 넘게 출판사 자랑을 늘어놓으셨다. 솔직히 말해서 이 출판사는 이번에 80개의 출판사에 메일을 보낸 후 찾고, 찾다가 알게 된 출판사인데 말이다.
일단 하시는 이야기는 다 들었고, 메모까지 했다. 홍보 방법과 계약 시 내가 이득이 될만한 사항이 있는지 궁금한 점들도 물어봤다. 결론적으로는 반자비, 자비 출판 계약처럼 작가 인세가 높은 것도 아니었다. 기존 기획 출판과 작가 인세 비율은 똑같았다. 다른 점은 작가가 300권을 무조건 사야 한다는 항목만 있는 것뿐.
30분의 긴 전화 통화 끝에 마무리 인사를 나눌 때였다. 대표님은 마지막에 다시 한번 선을 넘었다.
"슬기 작가님~ 여행도 많이 하시고~ 돈도 많은 것 같은데~ 책 우리랑 내요! 다른 작가님들은 1000부씩 사고 그래요~ 그래도 작가님은 인터넷에서 활동도 꾸준히 해오시고 그러니까 내가 적게 받는 거예요~"
대충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이건 전화를 끊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전화는 분명 끝났는데 내 기분은 내내 찝찝했다. 화가 나고 욕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씁쓸했고, 슬펐다. 슬픔에 조금 더 가까웠다.
맞다. 책이라는 물건은 시장에서 팔아야 하기에 '돈'은 무척 중요하다. 돈이 들어가는 일이고, 그렇기에 돈을 벌어야 한다. 하지만 책은 다른 공산품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 책이라는 물건에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는 사람이 쓴 '글'이다. 그 글은 '돈'이 아닌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대부분의 글 쓰는 사람들은 오직 '돈'을 위해 '글'을 쓰지 않는다. 삶에 돈이 최우선이었다면 글을 택했을까? 돈은 당연히 삶에 있어 매우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자신의 가치를 지키고 실현시키기 위해 선택한 것이 글이었을 것이다.
지난번에 작가에게 '도전 미션'을 주는 복잡한 출판 제안이 온 메일과 방금 '돈'을 노골적으로 말하며 자신의 회사에서 출판하라는 대표의 전화. 이 두 제안이 글이라는 꿈을 가진 나에게는 참 씁쓸했고, 쓰라렸다. 아팠고 슬펐다. 앞으로 걸어갈 꿈의 길이 더욱 어두워진 것 같았다. 작은 빛마저 느끼기 어려웠다.
글이라는 같은 꿈을 꾸고, 쓰고 있는 분들 모두 응원합니다.
오늘도 제 이야기를 찾아주시고, 끝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길었던 나의 원고 투고 일지>는 시리즈물입니다.
첫 회부터 보시거나 전 에피소드부터 보시면 더욱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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