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인생과 꿈을 위해 '아직도'하고 있는 멋진 삶들에게.
1년 7개월 간의 세계 여행과 워킹 홀리데이를 마치고 한국에 입국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여러 지인들과 바쁘게 만남을 가지고 있던 중 친구 B와 만났던 어느 날이었다. B는 예전에 일하던 곳에서 친해진 친구인데 원래는 B를 포함해서 여러 명의 친구들과 다 함께 만나곤 했었다. 하지만 내가 떠났던 사이에 대부분의 친구들은 인생의 큰 일(주로 결혼, 출산, 육아)들을 치르고 있느라 이번에는 다 함께 보지 못했다.
나는 B에게 다른 친구들의 안부를 물었다. B는 모두 멀리 흩어져 사느라 내가 없던 기간에도 거의 만나지 못했다고 하며 그나마 가장 최근에 만난 게 1년 전이라고 했다. 나는 그 친구들 중 sns도 잘하지 않고, 나와 연락이 뜸하던 K의 안부를 물어봤다.
"요즘 K는 어떻게 지내는 거야? 너도 걔랑 연락 잘 안 하나?"
"아.. K..? 나도 K 본 게 그 1년 전 다 같이 만난 날이야. 잘 지내겠지 뭐."라고 말하는 B의 얼굴 표정에는 떨떠름한 뭔가의 감정이 묻어있는 것 같았다. 혹시 내가 없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건 아닐까 걱정되는 마음에 나는 B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너 K랑 무슨 일 있던 건 아니지? 뭔가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 아닌가..?"
"아니~"라고 B는 바로 대답했다. 그리고 뭔가 망설이는 듯 뜸을 들이다가 B는 입을 뗐다.
"사실은 1년 전 다 같이 만나던 날, 네 얘기가 나왔었거든. 애들이 너 진짜 떠난 거 보고 대단하다고, 멋있다고 그랬었어. 그런데 K만 너에 대한 질문을 나한테 이런 식으로 하는 거야. '걔는 아직도 여행만 하는 거야?', '걔 그럼 거기서 책 쓴데?', '그렇게 오래 나갔다가 한국 와서 뭐한데?' 이렇게.. 너에 대해 흉을 본 건 진짜 아녔거든? 근데 묘하게 나는 기분이 안 좋더라고.. 그리고 든 생각이 너는 얼마나 이런 질문을 많이 들었을까 싶더라.. 아무튼 K랑 별 일은 없었어."
B는 내가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상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B의 예상대로 K가 했던 질문들은 이미 면전에서 수도 없이 많이 들었기에 불쾌하지도, 유쾌하지도 않았다.
나는 B에게 한껏 쿨한 척하며 "나 그런 말 엄청 많이 들었어. K 원래 좀 말투가 그렇잖아. 괜찮아. 너도 괜히 신경 쓰지 마~"라고 말하고 B의 맥주잔을 향해 내 맥주잔을 들어 올렸다.
B와 만난 지 며칠이 지났고, 나는 K가 한 말에 대해 잊고 있었다. 아니, 잊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 문장이 자꾸만 내 귀에 거슬렸다.
"걔는 아직도 여행만 하는 거야?"라는 문장, 그리고 정확히 말하자면 그 속에 '아직도'라는 그 단어가 자꾸만 나를 자극시켰다.
돌이켜보면 '아직도'라는 단어가 들어간 문장들을 들었을 때 그리 기분이 좋았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아직도 거기밖에 못했어?"
"아직도 마무리 못하고 뭐한 거예요?"
"아직도 취직 못했어?"
"아직도 남자 친구는 없고?"
"아직도 돈은 못 버는데 글 쓰는 거야?"
"아직도 구독자가 1,000명도 안된 거야?"
등등..
이렇듯 듣기만 해도 명치가 쓰려오는 말들이다. 위의 문장 속 '아직도'에는 '나의 무능함'과 그로 인한 '상대방의 실망감'이 강조되어 느껴진다. 물론 저 문장을 듣는 사람은 화도 나고, 억울하고, 때로는 기가 죽기도 한다.
'왜 나는 아직도 뭔가를 해내지 못하고 있는 걸까..' 싶으면서 말이다. 어쩌면 나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걸 K에게 들켜서 유독 그 문장이 내 가슴에 콕 박혔는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약 1년 후, 며칠 전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나는 이마 위에 몇 개 없는 잔머리를 쥐어 잡고, 비틀고, 비비면서 글을 쥐어 짜내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의 짧은 진동이 울렸다. 메시지의 출처는 동생 J였다. 몇 달만에 연락을 해온 J는 내게 어떻게 지내는 거냐며 안부를 물었고, 나는 (작년 여름 이후로) 늘 그렇듯 글을 쓰고 있다고 답했다. 그러자 J는 곧바로 이런 메시지를 보내왔다.
"우와.. 언니, '아직도' 글 써요? 대단하다. 진짜.. 언니 은근히 독하다니까?!"
이 메시지를 읽은 순간 바로 나는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뿌듯했다. 정말 내가 뭔가를 끈질기게, 독하게, 꾸준히 하는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특히 그 메시지 속 '아직도'라는 단어가 유독 눈에 띄었다. 이번에 들은 '아직도'라는 세 글자는 나를 아프게만 하던, 기죽게 만들던 단어가 아닌 오히려 나를 뿌듯하게, 가슴 설레게 만드는 단어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동안 내가 들어왔던 '아직도'라는 단어가 들어간 문장들이 다시 보이고 들리기 시작했다. '아직도'라는 말은 '아직도 결과를 만들지 못했다.'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보면 '포기하지 않고 아직도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내가 세계 여행을 갔다가, 호주 워홀을 하다가, 혹은 글 쓴다고 도전했다가 중도에 포기했다면 나는 "걔 아직도 여행만 하는 거야?", "걔 아직도 외국이야?", "걔 아직도 글 쓴대?"라는 말은 못 들었을 것이다.
즉,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묵묵히 해내고 있었기에 그 말을 들을 수 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라는 말은 내게 너무도 매력적인 단어였다. 그 세 글자 속에는 '저 힘들지만, 오래 걸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고 있어요.'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앞으로 나에게 "너 아직도 연애 못하고 있는 거야?"라고 물어본다면
"응, 나 진짜 좋은 연애 하고 싶어서 아직도 좋은 사람 찾는 중이야."라고 말할 것이다.
"너 아직도 돈은 못 벌고 글만 쓰는 거야?"라고 물어본다면
"응. 나 아직도 글 써. 앞으로 글로 돈 벌고 싶어서."라고 말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넌 아직도 '꿈' 타령이야? 이제 현실을 생각해."라는 말에는
"맞아. 현실을 생각해야지. 그래서 나는 아직도 꿈을 꾸고, 꿈을 이야기해. 조금 더 나은 현실을 만들고 싶어서."라고 두 눈을 반짝이며 말할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내 앞에서든 뒤에서든 '아직도'의 부정적인 의미를 부각해 지금 내가 겪어내고 있는 과정에 대해 공격을 한다면 이렇게 대답하면 되지 않을까.
"난 아직도 못한 게 아니라, 아직도 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될 때까지 할 거야."
오늘도 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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